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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49화 (249/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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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형은 평검사였다.

어린 시절부터 정의감이 남달랐던 그는 정의 구현을 위해 법조계에 몸을 투신했다. 사법연구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지만 일부러 판사가 아닌 검사를 택했다. 범죄자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잡아넣기 위해서다.

그는 특히 대형 범죄에 관심이 많았다. 기업 범죄, 주가 조작, 정치 자금 비리 같은 굵직한 사건들 말이다.

“나라에 도둑이 너무 많다. 도둑놈들을 다 때려잡아야 할 텐데.”

검사로 임관한지 어느덧 몇 년. 그러나 그는 일찌감치 현실의 벽에 부딪쳤다.

자신만만하게 기소를 진행한 사건이 상부의 압력으로 무용지물이 되기도 했고, 재벌 회장의 죄를 무마하게 위해 부하 임원이 대신 덮어 씌는 꼴을 보아야 했다.

선배 검사가 고위 공직자와 연관된 사건을 수사하다가 사건 종료 후 인사 불이익으로 좌천되는 것도 지켜봐야 했다.

내부고발자는 배신자로 찍혔고,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았다.

책에서 말해주는 검사동일체 원칙이니 뭐니 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었다.

‘아무리 단독 관청이라고 해봐야 이게 무슨 소용이야. 뿌리부터 다 썩었는데.’

한때는 옷을 벗고 변호사를 하거나 혹은 다른 일을 알아볼까 생각도 했다. 그러나 정의 구현에 관해 미련이 남아 포기하지 못했다.

모든 검사가 부패한 것은 아니지만 검찰 자체는 부패의 온상이었다.

하루하루 정의감이 무뎌지는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그는 낯선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변호사 서진혁.」

법조인은 넓게 보면 전부 선후배 관계라 할 수 있다. 연배를 보니 자신보다 적어도 20년 이상의 선배다. 김시형은 일단 깍듯하게 맞이했다.

“김시형 검사입니다.”

“서진현 변호사입니다. 고발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고발이라고요?”

“정일대학교 재단 비리입니다. 파악된 것만 해도 천억 원 대 규모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 담았습니다.”

서진혁 변호사는 두툼한 고발장을 내밀었다. 김시형은 흥미로운 눈으로 고발장을 그 자리에서 들춰 보았다.

고발장에는 비리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물증이 포함된 비리도 있었고, 증거가 없는 대신 증인 목록과 연락처, 관련자로 의심되는 인사 리스트가 첨부돼 있기도 했다.

‘파헤치면 제대로 나올 거 같긴 한데.’

서진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 사학비리가 어마어마하지요. 다들 자기들끼리 편들어주고 봐주고 하면서 묻어둘 뿐. 그런데 혹시 재단 이사장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김주일 이사장이지요.”

“현직 대통령 장남입니다.”

“…….”

“다른 재단은 몰라도, 아니 다른 재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학 비리가 불거져서 좋을 게 없으니까요. 심지어 대통령의 아들을 치겠다고요? 이 수사는 시작도 못하고 묻힐 겁니다.”

정의감에 불타는 인권변호사라 생각한 김시형은 솔직하게 소견을 밝혔다. 저 나이를 먹도록 정의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부럽고, 존경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진혁 변호사는 눈 하나 꿈쩍 하지 않았다.

“실은 저는 한서진 박사님을 모시고 있는 고문 변호사입니다. 그분의 재산관리 및 법적 업무를 관리하고 있죠.”

김시형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한서진 박사님? 혹시 미국 명예시민인 그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김시형은 다시 한 번 명함에 적힌 소속을 확인했다.

‘SJ설계사무소!’

그는 고발장에 적힌 고발인을 확인했다. 아쉽게도 한서진이 아니라 서진혁 본인의 이름이었다.

서진혁은 왜 굳이 한서진을 언급했을까? 김시형은 재빠르게 생각했다.

“한서진 박사님이 현 정부를 크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문은 얼핏 들었습니다.”

“그분은 다만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을 뿐입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자기 연구와 사생활을 방해하는 것을 싫어하시죠.”

김시형은 얼마 전 교육부에서 대대적인 한국대학교 감사를 시작한 일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왜 멀쩡한 최고대학을 못살게 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서진혁의 방문이 결정적인 조각이 되어 주었다.

그는 어떤 가설을 떠올리고는 오싹해졌다.

“한서진 박사님이 화가 나셨군요.”

“불법 청탁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올바르게 바로잡아달라는 정당한 요구를 하러 왔을 뿐입니다. 여기 적힌 정일 재단 비리의 대부분은 사실이지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한서진은 단순히 사학 재단 비리를 고발하고자 함이 아니다. 대통령에게 분명한 경고를 보내려고 하는 것이다.

메마른 긴장이 섞인 침이 꿀꺽 넘어갔다.

정일재단 이사장은 대통령 아들로 되어 있지만 재단의 실질적인 주인은 대통령이다.

재단은 대통령의 전 재산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대선에 출마하면서 재산 규모를 줄이기 위해 대부분의 재산을 재단에 기부했기 때문이다.

재단을 친다는 것은 곧 대통령의 몸통을 치는 것과 같다. 온갖 외압이 쏟아질 것이다. 청와대 역시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수사가 어떻게 되든 간에, 수사를 시작했다는 것만으로 큰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 한직으로 좌천되는 것은 각오해야 했다. 최악의 경우 옷을 벗고 아예 법조계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불길한 예측에도 불구하고, 흥분으로 몸이 떨려 왔다.

“험난한 가시밭길입니다. 결코 뚫기 쉽지 않을 겁니다.”

“검사도 엄연한 단독 관청,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기소에 관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지요. 물론 충분한 갑옷은 마련해 드릴 겁니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간에 제 검사 인생은 끝장입니다. 검찰도 엄연한 조직입니다. 아니, 어느 조직보다도 방어본능이 거셉니다.”

“고발장을 접수하시는 그 순간부터 한서진 박사님이 김 검사님의 후원자가 되어주실 겁니다.”

후원자.

짜릿한 감촉이 척추를 타고 흐른다.

평검사가 현직 대통령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사학 재단의 비리를 들쑤신다? 시작도 하기 전에 얻어맞고 넉다운 될 것이다.

그러나 한서진이 후원자가 되어준다면?

‘사학 비리, 제대로 파고들면 줄줄이 엮여 나온다. 잘하면 대통령직에 타격을 줄 건수가 나올 수도 있어. 아니, 그것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최소한 정일재단은 족칠 수 있어.’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린다.

서른 초반의 나이. 정의 구현이라는 큰 꿈을 안고 검찰에 투신했다가 현실의 벽에 부딪쳤지만, 아직 웅심이 사그라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제 그 웅심에 불을 지필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후원자…… 그 대가로 제가 무엇을 해드리면 됩니까?”

“아주 간단하고, 당연한 겁니다.”

서진혁은 덤덤히 덧붙였다.

“절대 멈추지 말고, 끝까지 나아가십시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가만히 있으면 사람을 바보로 본다. 한서진은 대통령의 수작에 똑같이 맞받아치기로 결정했다. 그것도 불법이 아닌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받아들이던가요?”

“네, 그렇습니다.”

“믿어도 괜찮겠죠?”

“임관한 지 몇 년 안 된 젊은 검사입니다. 아직 정의감에 피가 끓을 때죠. 대표님이 후원자를 약속하셨으니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이 사건을 끝으로 옷을 벗어도 좋다고 분명히 각오를 보였습니다.”

“다행이네요.”

원래 한서진은 고발을 통해 정일재단을 적당히 위협하는 시늉만 하려 했다. 그럼 대통령이 알아서 한국대에 대한 감사 압박을 철회할 거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서진혁 변호사가 반대 의견을 냈다.

‘뽑지 않았으면 모르되, 일단 칼을 뽑았으면 무엇이든 잘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번에 칼 손잡이에 손을 댄다 해도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조언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 일에 나서줄 검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적당히 위협만 하고 칼을 집어넣는다고 하면 아무도 찬동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찬동을 한다면 그는 대표님의 후원을 입으려 하는 정치 검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한서진은 서진혁 변호사에게 이 일을 일임했다. 법조계와 정계의 생리는 그가 자신보다 더 잘 알 것이기에.

“변호사님 보시기에는 결과가 어떻게 될 것 같나요?”

“제대로 파고든다면 정일재단에 큰 타격을 줄 수는 있을 겁니다. 대통령 장남 김주일 이사장을 엮어 넣는 것까지는 힘들겠지만 톡톡한 경고는 될 겁니다.”

“한 번씩 너무 일을 크게 벌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물론 이제 와서 그만 두겠다는 건 아닙니다만.”

“대통령은 원래 권위의식이 강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솔직하고 쓴 충언을 해줄 부하도 없지요. 모두 자기 자리를 보신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요.”

서진혁은 조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한두 번의 경고로는 제대로 말귀를 못 알아들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가요.”

“그리고 김시형 검사가 의외로 잘해준다면…… 뜻밖의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지요.”

“뜻밖의 결과?”

한서진은 의아해서 반문했지만, 서진혁은 그저 조용히 웃기만 했다.

김시형 검사는 집중 내사를 시작했다.

먼저 고발장의 자료를 토대로 사실관계 파악 및 증거와 증인 수집에 나섰다. 물론 상대가 눈치 채면 안 되기에 그 과정은 매우 은밀하게 이뤄졌다.

수사관에게조차 정일재단의 사학 비리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비밀이 새어나가는 것을 신경 쓴 것이다.

수사관 및 수사팀은 사학비리가 아니라, 정일재단 이사들의 개인 비리로 알고 있었다. 일부 이사들이 재단의 자금을 착복해서 유용했다는 정도로만.

그러나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굵직한 줄기가 딸려 나왔다. 수사관들도 비리 규모에 혀를 내둘렀다.

“재단 이사들의 공금 횡령을 파고 있었는데, 엉뚱한 게 자꾸만 튀어나오네요. 이거 제대로 물고 늘어지면 횡령 이사들보다는 재단이 더 큰 피를 볼 거 같습니다.”

“이만하면 이사들 횡령으로 집어넣기에 충분한 거 같은데요? 더 조사할까요, 검사님?”

수사관들이 은근히 물었다. 김시형은 차분히 그들의 눈치를 확인했다.

오랜 수사 경험으로 뼈가 굵은 이들이다. 아마 이쯤 되면 그들도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공금 횡령 이사들을 기소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더 이상의 보안 유지는 의미가 없다. 이미 수사관 중에서 정보를 흘렸을지도 모른다. 김시형은 외압이 가해지기 전에 먼저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김주일 이사장과 관련 이사들 전원을 참고인 소환해서 조사하겠습니다.”

김시형은 드디어 칼을 빼들었다.

김두박 대통령의 최측근인 비서실장은 요즘 한국대 감사 압박에 유독 신경 쓰고 있었다. 아무리 한서진이 돈이 많고, 미국의 힘을 등에 업고 있어도, 여긴 한국이다. 지엄한 대통령의 권력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그에게 위해를 가하겠다면 미국도 움직이겠지만, 위해를 가하려는 게 아니라 ‘친해지기’ 위한 수작일 뿐이다. 제아무리 명예시민이라 해도 미국이 섣불리 나서기 곤란할 것이다.

심지어 그에게 직접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니라, 한국대를 괴롭히는 것뿐이지 않은가.

‘돈과 힘이 있으면 뭐해. 결국 서른도 안 된 애송이일 뿐이지.’

적당한 타이밍에서 타협을 제시하면 그도 수용할 것이다. 위해를 가하겠다는 게 아니라 친해지고 싶다는데 뿌리칠 사람이 어딨겠는가.

심지어 그 친해지려고 하는 인물이 현 정부의 수장이다. 그에게도 좋으면 좋지, 나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일을 추진하던 중 그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었다.

“뭐? 정일재단 이사장이 구속되었다고?”

“예, 참고인 조사 도중 긴급체포되었다고 합니다.”

비서실장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떤 애송이 평검사가 그분이 누군지도 모른 채 검사의 직권을 남용한 모양이다.

“그놈 데리고 있는 검사장 연결해.”

비서실장은 아직 큰 그림이 어떤지 보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빅 픽쳐를 설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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