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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이잉.
작은 통로를 급히 빠져나가다 말고 한서진은 순간 멈칫했다. 길을 안내하던 비서실장과 뒤따르던 경호원들이 흠칫 놀라서 급히 다가왔다.
“박사님!”
“괜찮으십니까?”
한서진의 몸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그의 컨디션에 따라 SJ인더스트리의 주가가 널뛰기를 하고, 그에 따라 미국 주가지수가 휘청거린다. 그리고 미국이 휘청거리면 전 세계가 자빠진다.
“아, 괜찮습니다.”
다행히 한서진은 금방 털고 일어섰다. 그래도 비서실장의 얼굴에는 희미한 근심이 남았다.
혹시 남들이 알지 못하는 지병이 있는 건 아닌지, 췌장암이 다시 재발한 것은 아닌지…… 등등 별의별 걱정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던 것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잠깐 현기증이 났네, 하고 웃으며 넘어가겠지만 워낙 귀한 몸이 아닌가.
‘통찰안이 하필 이때…….’
한서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온 시야에 알 수 없는 문자와 기호가 가득했다. 눈에 닿는 모든 사물의 본질이 사정없이 각막을 꿰뚫는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재수 없게 통찰안이 발동한 것이다. 그는 어지러움을 참고 걸었다. 머릿속이 뒤틀리다 보니 걸음걸이가 시원치 않았다.
빨리 발동을 중지해야 하는데. 발동이 됐을 때 제멋대로였던 것처럼 중지도 제멋대로였다. 말을 듣지 않는다.
‘괜찮으신 건가?’
이서나의 비서실장은 불안함을 품고 한서진의 걸음걸이를 면밀히 주시했다. 정말 지병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술도 거의 안 마셨는데 갑자기 왜 중심을 못 잡아?
한서진은 겨우 차에 탔고, 경호차량과 함께 호텔을 떠났다.
“아직도 어지러워? 요즘 오빠, 진짜 이상하다. 검진이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한지혜가 걱정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오빠는 한씨 가문을…….”
“부흥시킬 위대한 사명이 있다.”
“잘 알고 있네.”
“그 소리 좀 이제 그만해라. 아니면 멘트라도 바꾸던가. 내 고막이 지긋지긋하대.”
“그러니까 검진 좀 받아봐.”
“됐어. 그런 문제 아니야.”
통찰안의 사정없는 시각 정보 폭격으로 인한 어지럼증이니, 진찰을 받는다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자신이 강화된 통찰안에 익숙해지는 수밖에는.
‘그나저나 진짜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네.’
그 뒤로 한 번도 그곳의 꿈을 꾸지 않았다. 타르타로스를 통한 간접 탐사도 못했다.
마치 그 세상이 자신을 거부하는 것처럼, 좀처럼 그곳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반려인 신효진을 거부한 부작용일까? 하지만 통찰안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아니면 내가 자격이 안 된다거나.’
한서진은 감은 눈에 팔을 덮은 채, 꿈속의 왕을 떠올렸다.
군주의 위엄이 가득한 왕은 바로 자신이었다. 어쩌면 모습만 닮은 건지도 모르지만, 그건 결코 아님을 강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신효진 씨라면 뭔가 알지도 모르는데.’
신효진은 자신과 다르다. 꿈을 즐기기만 할 뿐, 그곳에서 어떤 능력도 얻지 못했다.
그녀와 자신의 차이는 뭘까. 그리고…….
―나의 왕이시여. 이곳의 모든 것은 꿈이자 거짓이며, 그곳만이 진실입니다.
―모두가 그대를 속이더라도, 그것을 잊지 마세요.
왕이 초룡을 얻었을 때, 다정히 축하를 건넨 여자.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그때의 풍경조차도 흐릿해서 확신할 수가 없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은 왕비를 닮았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왕비였는지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의 모든 기억은 흐릿하기만 했다.
‘신효진 씨를 만나봐야 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로부터 듣고 싶은 이야기가 굴뚝같지만, 꿈에서 자신의 왕비라는 사실이 부담스럽다.
반려. 그 원하지 않는 운명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겨버릴까 봐 두렵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피할 수는 없겠지.’
“……이로써 축사를 마치며, 다시 한 번 진성그룹의 탄생일을 축하합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고위 공직자, 국회의원, 재벌계 인사. 그들은 강단에 선 대통령을 올려다보며 힘차게 박수를 쳤다.
축사를 마친 김두박 대통령은 성대한 환호를 받으며 내려왔다. 카메라를 의식해서인지 웃고 있었으나, 얼굴 한편에 드리운 불쾌한 감정까지 지워지지는 않는다.
가장 앞쪽 테이블에 홀로 앉은 대통령은 비서실장을 돌아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갔다고?”
“예, 각하께서 도착하기 15분 전쯤에 일어섰다고 합니다.”
“우연인가, 아니면 나를 피한 건가?”
“……아마 우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서진 박사의 일정이 매우 빽빽한 건 사실입니다.”
“그렇게 바쁜 사람이 느긋하게 여자나 사귀나?”
비서실장은 말문이 막혔다.
바쁘다고 연애가 금지되는 건 아니지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한 번 만나서 밥이라도 먹고 싶은데 약속을 잡을 수가 없다. 수석까지 보내서 정중히 초청 의사를 밝혔건만 아예 초대하지 말라는 거절까지 듣고 왔다.
‘한 박사를 잘못 건드리면 안 되는데…….’
대통령의 얼굴에 서린 불쾌한 감정을 읽은 비서실장은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가진 집안에 태어나 화려한 정치 인생을 걸어온 사람이다. 실패나 좌절 따위는 겪어보지 못했고, 오만하면서도 권위적이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런 성정은 불같은 카리스마로 그럴 듯하게 포장돼 많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리고 이제 겨우 임기 2년차, 대통령으로서 한창 권력을 발휘할 때다.
한서진은 정말 대단한 인물이지만, 정작 대통령은 세간보다 그를 낮춰 생각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모셨기 때문에 비서실장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각하, 대학으로 직접 찾아가시는 건 어떨지요?”
“대통령 체면에 어찌! 이 자리도 체통이 손상되는 걸 무릅쓰고 힘들게 나온 건데!”
“…….”
“젊은 친구가 아주 고약해. 미국 대통령하고 친분이 있다 이건가? 그래봐야 여긴 한국이야!”
한서진이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여기는 한국 땅이고 자신은 최고통수권자다. 그런 자신감이 대통령의 판단력을 흐렸다.
“대미 외교 정책 수립에 그 친구의 협조가 필요한데, 도대체가 애국심이 없으니. 하여간 요즘 젊은 것들은…….”
“각하. 누가 들을까 염려됩니다.”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누가 듣겠나?”
대통령은 연신 혀를 찼다.
그때, 이서나 회장이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대통령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녀는 정중히 목례했다.
“이런 좋은 날에 직접 행차해주시니 영광입니다, 대통령님.”
“다시 한 번 그룹의 생일을 축하하오, 이 회장.”
“감사합니다.”
이서나는 웃음을 짓고 자리에 앉았다.
대통령, 무소불위의 권력자 앞이지만 그녀는 주눅 들지 않았다. 정권은 한시적이지만 돈은 영원하다. 이 나라의 진정한 지배자는 국민도, 정치인도 아니고 재벌 아닌가.
국가원수를 대하는 입장으로서 예의는 차리지만, 주인을 섬기듯 태도를 낮출 필요는 없다.
대통령도 그녀의 뒤에 있는 진성그룹을 의식하는지 태도가 한결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한서진 박사는 언제 돌아간 거요? 내가 그 친구를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죄송합니다. 저도 대통령님이 참석하시는 걸 너무 늦게 전해 들었습니다.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말렸을 텐데요.”
“그거 참 아쉽군요.”
대통령은 이서나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지만, 그런 내색을 꺼내진 않았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속아주고, 모르면서도 아는 척 넘어가고, 당사자만이 느끼는 칼을 감춘 웃음 속에서 담소가 이어졌다.
문득 대통령이 지나가듯이 툭 화제를 변경했다.
“조만간 청와대에서 비공개 경제정책 논의 자리를 마련할 거요. 10대 그룹 총수들에게 초청장을 발송하여 남은 임기 동안 국가 경제 발전의 방향성을 의논할 겁니다. 현직에서 뛰고 있는 경제인들의 고충과 심상도 귀담아 들을 생각입니다.”
얼핏 듣기에는 좋은 자리를 갖추는 것 같다. 하지만 이서나는 웃을 수 없었다. 말을 꺼내는 자리가 의미심장했다.
“이 회장이 한서진 박사 그 친구와 친하다고 들었어요. 그 친구 역시 초청을 할 생각인데, 모양이 좋게 나오도록 넌지시 거들어줄 수 있겠소?”
“……대통령님. 한서진 박사님은 대기업 총수가 아닙니다.”
“SJ인더스트리 오너가 대기업 총수가 아니면 대체 누가 대기업 총수라는 거요? 그거, 시가총액이 1조 불이 넘지 않소? 한서진 박사는 86% 넘게 가지지 않았나요?”
“미국 기업입니다. 한서진 박사님은 국내에서는 기업 활동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 SJ설계사무소인가 하는 건 그럼 뭡니까?”
“그건 규모가…….”
“부탁해요, 이 회장.”
김두박 대통령은 다소 고압적으로 나왔다.
70에 달하는 나이, 이서나와는 수십 년의 연배 차이가 난다. 아무리 재계 1, 2위를 다투는 오랜 재벌이라 해도, 이런 사소한 부탁쯤은 얼마든지 강압적으로 안겨줄 수 있는 것이다.
이서나는 속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이 자리에 자신이 아닌 부친이 있었어도,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대통령이 백철중 회장에게도 이런 식으로 할 수 있었을까?
2, 3년 뒤에 보자.
이서나는 속으로 가볍게 이를 갈면서도, 겉으로는 웃음을 유지했다.
“대통령님이 그렇게까지 부탁하시니 제가 말은 한 번 전해보겠습니다.”
“오빠, 나 할 말 있는데.”
저녁을 먹는데 한지혜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한서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마셨다. 어쩐지 깨작깨작 젓가락질을 하며 슬금슬금 눈치만 보더라.
“뭔데? 해봐.”
“으음, 일단 인터넷에서 오빠 헐뜯고 다니는 악플러들 죄다 고소해서 벌금형 때렸어. 원래라면 초범이니 반성의 여지니 뭐니 해서 기소유예 나올 판인데, 내가 발 벗고 뛰어다닌 덕에 한 명도 남김없이 벌금형 받아냈어. 아, 벌금은 진짜 얼마 안 되지만 전과 이력을 쫙 남겼다는 게 어디야?”
다른 이도 아니고 한서진의 여동생이 오빠의 명예를 위해 나선 일인데, 검찰도 무작정 기소유예를 때리기에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발 벗고 뛰어다닌 건 네가 아니라 변호사겠지만, 어쨌든 그 이야기를 왜 각 잡고 하는 건데?”
“일단 본론을 꺼내기 앞서 나의 자그마한 공적을 알아달라는 거지.”
“청소는? 요새 안 하더라? 그래놓고 공적 타령?”
“……그건 최수한 집사님이 알아서 잘 하시잖아.”
“우리 합가할 때 약속이 뭐였더라?”
“내 방 청소하는 것만 해도 매일 뼈가 빠질 거 같거든?”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수저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알았으니까 말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분위기를 잡아?”
“나, 변리사 공부 계속하는 게 맞는 건가 싶어서.”
“……공부가 힘들어?”
한지혜는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그런 건 아니고, 오빠 주변에 내로라하는 전문가들 널렸는데 나까지 변리사로 오빠 특허 사업 돕는 건 비효율적인 일인 거 같아서 그래.”
한서진은 잠시 생각했다. 한지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하긴, 이제 사정이 바뀌긴 했지.’
원래는 국제 변리사로 SJ인더스트리 특허 관련 사업을 돕는 일을 맡기려 했다. 주력 사업인 반도체의 핵심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이다.
근데 본인이 썩 원하는 눈치가 아니다. 아무래도 작은 설계사무소 오너인 줄만 알았던 오빠가 세계적인 재벌이니, 다른 마음이 생기기도 할 것이다.
“넌 그럼 뭘 하고 싶은데?”
“우리 한씨 가문의 이름값을 드높이는 일을 하고 싶어. 되게 보람찰 것 같고, 나 말고는 할 사람도 없을 거 같고. 사실 오빠는 그런 쪽에 별로 관심 없잖아.”
“너무 두루뭉술한데…….”
“그냥 쉽게 생각해. 오빠 명예와 영향력을 더 높이고, 사람들이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하게 만드는 뭐 그런 전반적인 역할을 하고 싶다는 거지.”
생각을 해보니 한지혜 말고 적임자가 없을 거 같긴 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알았어. 해봐.”
“예, 예산은 어느 정도나 주시렵니까?”
“특별히 상한은 두지 않을게.”
“와! 역시 오빠야!”
“단, 재무팀장님과 반드시 의논하고 철저하게 회계감사도 받아. 네 용돈으로 멋대로 쓰는 게 발각되면 접는다.”
“알았어.”
한지혜는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었다. 동생이 흡족해하자 한서진도 만족스러웠다. 진작 이럴 걸 그랬나?
‘애가 악플러 때려잡는 데 맛들이더니…….’
그래도 형제가 욕먹었다고 방방 뛰고 때려잡으러 다니는 게 어딘가? 오빠로서 기특했다.
그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한 한지혜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클레튼 대통령이잖아?”
“조용히 해. 전화 좀 받는다.”
한서진은 한 마디 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아, 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네, 그럼 그때 뵙지요. 네…….”
대화는 10분 정도 이어졌다. 통화가 끝나자 한지혜는 잔뜩 기대감에 차서 물었다.
“무슨 이야기했어?”
“별 거 없어. 한국 올 건데 볼 수 있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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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미국 사는 친구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