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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43화 (243/609)

00243  적응기  =========================================================================

진성그룹 창립 기념일 행사.

고급 호텔에서 열린 행사에는 정재계를 막론하고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남김없이 참석했다. 재선 이상 국회의원, 고위 공직자, 그리고 30대 그룹 회장들까지.

초청을 받아 참석한 한서진도 이서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박사님이 이렇게 크게 될 줄 알았다면, 좀 더 친하게 지냈어야 했는데. 아쉬워요.”

오랜만에 만난 이서나의 얼굴은 밝고 당당했다.

얼마 전에 확인한 진성그룹 소식이 떠오른 한서진도 가벼운 마음으로 답했다.

“이제 자리를 잡으신 모양이군요.”

“네, 그래요. 아, 그렇다고 당장 로열티를 재조정하는 건 어려워요. 알죠?”

이서나는 봐달라는 듯이 눈웃음을 쳤다.

더 친하게 지내지 못해 아쉽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특허 라이센스로 500억 불을 벌었을 때만 해도 한서진은 재벌들이 함부로 무시 못 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재벌들은 오히려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그때 친분을 맺어야 했다. 그때가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지금은 말조차 걸기 버겁다.

미국 현 대통령, 차기 대통령과 스스럼없이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사람, 최대 1조 달러의 자산가, 그리고 미국인 모두가 영웅으로 숭배하는, 살아있는 유일한 미국 명예시민…….

그런 막강한 힘과 명예를 가졌으면서도 한국에 남았다.

재벌가의 젊은 여식들은 하나같이 땅을 치고 통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한 박사님, 얼마 전에 청와대 초대를 받았다고 얼핏 들은 것 같은데요. 아마 거절했다고.”

“아, 그게 진성그룹까지 소문이 났나요?”

“사실인가 보군요.”

이서나는 한서진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에 주목했다.

“왜 거절했나요? 현 정권과 친해두면 두루두루 좋을 텐데.”

“뭐가 두루두루 좋을까요?”

“일단…….”

이서나는 입을 열던 중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한서진이 현 정권과 친해서 좋을 게 뭐가 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현 정권이 한서진과 친해서 좋을 게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한쪽이 1의 이득을 보고 다른 한쪽이 1,000의 이득을 본다고 가정하자. 1의 이득을 보는 쪽도 손해는 없다.

그러나 같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상대만 1,000의 이익을 보면, 뭔가 자신이 큰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굳이 따지자면 H통신 정도가 있겠지만…….’

그러나 H통신이 특혜가 필요하지 않다.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하이테크와 H그룹의 막강한 자본력이 결합한 괴물이기 때문이다.

어떤 정책적 혜택도 없이 단숨에 시장 점유율 1위를 탈환했고, 지금도 꾸준히 가입자가 증가하고 있지 않은가.

한서진이 정책의 영향을 받는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정치에 뜻을 둔 것도 아니다. 정권과 연을 맺지 못해 아쉬워할 이유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한 박사님이 정권과 친하게 지내야 할 이유가 없군요. 그 반대라면 모를까.”

“하나 더 있어요. 전 지금 대통령 안 찍었거든요.”

“그래요?”

이서나는 예리하게 눈빛을 빛냈다. 한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흘렸을지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중요한 정보였다.

혹시 한서진이 현 대통령, 나아가 현 여당을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쪽인가? 만약 그걸 확실히 알 수 있다면 앞으로 그룹의 행보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키가 되어줄 것이다.

“마음에 안 든 점이라도 있었나 봐요?”

그녀는 넌지시 말을 건넸다. 속으로는 한서진이 쉽게 대답해줄지 의문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말해줄 것 같기도 했다.

그에게는 저번에 갔던 맛없는 음식집이 뭐냐고 물어본 것과 다를 바 없는, 별 거 아닌 질문일 테니.

“아, 국회의원 시절에 그 사람이 복지 예산 삭감한 거 때문에 좀 힘들었던 적이 있어요.”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서나는 속으로 ‘복지 예산 삭감’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한서진이 매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은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다. 이서나도 관련 보고를 받고 이렇게 사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에 경악했었으니까.

그런 시절, 예산 삭감으로 힘들었다면 그 묵은 앙금이 결코 작지는 않을 것이다.

“수급금 몇 만 원 때문에 동사무소 직원과 핏대 올리며 여러 번 싸우기도 하고, 빌기도 하고, 뭐 많이 그랬었죠.”

“…….”

“아무튼 그 시절 기억 때문인지 공직자라고 하면 본능적인 거부감부터 들어서요.”

그랬던 청년이 지금은 진성그룹 창립기념일 행사에서 내로라하는 국내 최고 인사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

늙은 재벌 회장들도 어떻게든 말 한 마디 붙이지 못해 안달을 낸다. 상전벽해도 이런 상전벽해가 없을 것이다.

“그럼 한 박사님은 정권이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군요.”

“네. 언제는 조용히 있다가, 미국 명예시민 되니까 갑자기 친한 척 다가오는 게 불편하더라고요.”

“그런 이야기는 백철중 회장님을 통하면 간단할 텐데요.”

“일단 백철중 회장님한테도 부탁은 했습니다. 그리고 정계 쪽 인맥은 진성그룹이 더 탁월하다고 들었습니다. 거들어주면 더 좋겠죠.”

“알았어요. 우리가 최대한 번거로움을 막아드리죠. 하지만 정치가들이 지지율 상승을 위해 염치불구하고 들러붙는 것까지는 막아드리지 못해요. 원래 그런 사람들이거든요.”

이서나는 특별한 조롱은 담지 않은 채로 덧붙였다.

“그런 악착스러움이 없으면 애초에 정치인으로 성공하지도 못했을 거예요.”

“어쨌든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부탁 들어드리는 건 어렵지 않은데…… 그럼 우리 진성그룹은 어떤 이득이 있나요?”

한서진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로열티 재조정, 지금 해드릴까요?”

“아니, 괜찮아요. 그 정도면 됐어요.”

이서나는 얼른 발을 뺐다.

“아참, 한 박사님에게 말해줄 게 있어요. 백혈병 직원들이 소송 취하했어요.”

“합의를 보셨나요?”

“치료비용은 영구적으로 그룹이 부담하기로 했고, 개별 배상금으로 4억씩 줬어요. 사망한 분에게는 9억을 줬고요.”

이서나는 조금 눈치를 보며 말했다.

진성그룹은 한서진과 관계 회복을 위해 다방면에 걸쳐 애를 쓰는 중이었다. 어떻게든 그의 기호, 그의 생각을 알아내서 맞추기 위해 애썼다.

이서나는 그가 측은지심이 상당량 있다는 점, 그리고 진성전자에서 재직 중 말기암에 걸린 점을 고려했다.

그래서 산재로 의심되는 모든 암 환자 직원들의 요구 조건을 전부 들어주었다. 한서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과감하게 움직인 것이다.

“바람직한 일을 하셨네요. 제가 재직 중이었을 때도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땐 제가 진성전자 소속이 아니었다는 말로는 변명이 안 되겠죠. 다시 한 번 미안해요.”

“큰 유감은 없습니다.”

이제는 아련한 오래 전 기억이다.

“그런데 이번에 또 천억 대 규모의 자선사업을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네, 이번에도 H그룹을 통해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 많이 하시네요. 칭찬이 자자하겠어요.”

“칭찬이 자자하긴요. 1조 달러나 가진 놈이 겨우 천억 원 밖에 안 쓰냐고 욕 엄청 먹고 있는데요.”

“그런 한심한 인간들은 원래 꼭 있어요. 소수의 발악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안 그래도 그런 건 동생이 알아서 하고 있어요. 그런 쪽으로는 철저한 아이거든요. 제가 욕먹는 건 두고 볼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이서나는 피식 웃었다.

“좋은 동생을 뒀네요. 그런 우애, 부럽네요.”

의미심장한 말이다. 과연 그녀는 진심으로 한서진 남매의 우애를 부러워하고 있을까?

“말이 1조 달러지, 사실 현금은 500억 달러 남짓한 수준인데 말이죠. 나머지 9,500억 달러는 그냥 기업평가기관이 제멋대로 제 주식에 가격표를 붙인 것뿐인데…….”

한서진에게 SJ인더스트리의 지분이 가지는 숫자는 86.5%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도 나도 9천억 불이니, 1조 불이니 하며 떠들어댄다.

어차피 팔 생각도 없고, 팔 일도 없는 지분. 열심히 가격표를 붙여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500억 달러도 엄청난 거죠. 우리나라 한 달 예산과 맞먹는 수준이잖아요. 지금까지 한 박사님이 국내 자선사업에 쓴 돈만 해도 몇 천억은 될 것 같은데.”

“그냥 만 원을 벌면 백 원 정도는 자선사업에 쓰자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얼마 되지도 않아요.”

“나도 여기 앉아도 되겠나?”

그때였다. 백철중이 호탕하게 말을 건네며 테이블에 앉았다. 이서나는 눈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목례했다.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백 회장님.”

“이 회장, 요즘 신수가 아주 훤하구만. 그룹을 단단히 잡고 있다며?”

“아직 완전히 안정된 건 아니에요. 긴장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어요.”

“그런 거 보면 참 한 박사가 부럽지 않나? 정권도, 여의도도, 심지어 사내 정치 같은 것도 일절 신경 쓸 것 없이 유유히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잖나.”

“그러게요. 그러면서도 온 세상의 주목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고요. 참 부러워요.”

대놓고 얼굴에 금칠을 하는데도 부끄러운 기분이 별로 들지 않는다. 어느덧 만성이 생겼다.

그래도 한 마디 하는 건 잊지 않았다.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전 아직 박사가 아닙니다. 지금 학부생입니다.”

“무슨 상관인가.”

“무슨 상관이에요.”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은 박사 아닌 거 알면서 박사라 부르는 걸 즐기는 거 같다.

“회장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서나의 비서실장이 급히 다가왔다. 안색이 굳어진 게 보통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서나의 눈빛도 덩달아 경직되었다.

비서실장은 허리를 낮추고 귓속말을 했다. 이서나의 얼굴도 창백하게 변해갔다.

한서진과 백철중은 담소를 나누다 말고 긴장해서 주시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리 놀라는 것인가?

“알았어요. 일단 가 봐요. 평상시처럼 대응하고.”

“예, 알겠습니다.”

비서실장이 급히 물러가고, 이서나는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한서진을 돌아봤다.

“어떡하죠, 한 박사님?”

“왜 그러시죠?”

“우리 VIP께서 아무래도 흘러넘치는 짝사랑을 감당하기가 버거운가 봐요.”

“……?”

VIP라면 혹시 대통령을 말하는 건가? 그런데 짝사랑을 감당하기 버거운 듯하다니, 이건 무슨 소리인가?

이서나의 굳은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지금 푸른 지붕 VIP그룹이 이쪽으로 오고 있대요. 대한민국 경제를 견인한 진성그룹의 창립기념일을 축하하고 싶다고 하네요.”

“네?”

“물론 전례가 없는 일이에요. 대기업의 창립기념일에 일일이 참가할 정도로 대통령직이 가벼운 건 아니니까요. 그야말로 전통과 체면을 염두에 두지 않은 방문이죠.”

“설마.”

“제 생각에는 한 박사님 때문인 거 같은데.”

한서진이 만나주지 않는다면 결국 대통령이 직접 만나러 가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염치를 불문한다 해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 대학교나 사무소로 그를 찾아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체신이 붕괴하는 것은 물론이고, 두고두고 구설수에 오를 것이다.

“하지만 진성그룹 창립기념일 축사라면 명분이 있죠. 사람들도 별로 뭐라고 하지 않을 거고요.”

이서나는 이제 표정이 완전히 펴진 채 그를 주시했다. 마치 어떻게 할 거냐는 듯 재미있는 기색이 묻어난다.

한서진은 재킷을 들고 일어섰다.

“즐거웠습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비서실장이 쪽문을 알려드릴 거예요. 재수 없게 경호실측과 마주치는 건 싫죠?”

“감사합니다.”

============================ 작품 후기 ============================

너와_나의_어긋난_인연.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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