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42 적응기 =========================================================================
한가한 오후.
잔업을 하고 있던 박수진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네, SJ설계사무소 총무팀 박수진입니다. 네? 어디시라고요?”
순간 박수진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사근사근하게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해드릴게요.”
그녀가 전화를 끊자 옆에서 듣던 신효진이 의아해서 물었다.
“무슨 전화인데 그렇게 재밌어하시는 거예요?”
“아니, 글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인데 한 대표님하고 통화 좀 할 수 있겠냐고 하는 거야.”
“또요?”
“이건 무슨 너도 나도 장관이고 수석이고 총리고 국회의원이야. 내가 참, 어이가 없어서.”
한두 번 장난 전화가 걸려오는 게 아니다.
애초에 정말 그런 고위 공직자가 뭐 하러 설계사무소에 전화를 걸겠는가?
그런데 이번 보이스피싱은 좀 끈질겼다.
「여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인데요, 우리 수석보좌님께서 한서진 박사님과 통화하고 싶어 하십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는데 계속 연락이 없어서 다시 전화 드렸습니다.」
“일단 전달은 했는데 대표님이 별 말씀이 없으셔서요. 수석보좌관실이면 대표님께 직접 전화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여기는 대표님 소유의 회사일 뿐입니다. 비서실이 아니에요.”
「박사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전화 한 번만 받아달라고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그러니까 말씀드렸습니다. 이만 끊겠습니다.”
박수진은 전화를 끊은 뒤 ‘거봐’하는 눈으로 신효진을 돌아보았다. 그녀도 상황이 웃긴 듯 피식거렸다.
“이번 애는 제법 디테일하네. 일부러 시간 두고 전화를 여러 번 하잖아.”
“그러다가 정말 청와대면 어떡해요?”
신효진은 문득 상상해보았다. 청와대에서 직접 걸려온 전화를 받는 건 어떤 기분일까.
“청와대가 뭐가 아쉬워서 총무팀에 전화를 해? 대표님과 직접 통화하거나, 아니면 따로 찾아가겠지. 이런 장난전화가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그런가요? 왜 장난전화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원래 세상에는 쓸모없는 인간들 많아. 인터넷 기사 같은 것도 보면 쓸모없는 악플러들 넘쳐나잖아.”
그때 대표실 문이 열리며 한서진이 나왔다.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가는 모양이었다. 신효진은 눈이 마주칠세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박사님…….’
송하나를 좋아한다던 그 말이 떠오르자 가슴이 저릿했다. 그녀는 어두워진 표정을 감추기 위해 서류더미에 얼굴을 가까이 묻었다.
“대표님, 외출하세요?”
“전 이만 퇴근할게요. 해외 택배가 와서 수령하러 가야 돼요.”
“택배요? 얼마나 좋은 걸 주문하셨기에 대표님이 직접 수령하러 가시는 거예요?”
“전용기요.”
“네?”
박수진은 물론이고 사무팀은 눈이 휘둥그렇게 뜨며 놀랐다.
“전용기라고요?”
김포공항.
“저기 들어오는 저건가 봐.”
VIP 전용 게이트를 통과해 들어와 있던 한서진 일행은 멀리서 내려앉는 육중한 기체를 보았다. 한서진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어렸고, 한지혜도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서서히 속도를 줄인 비행기가 격납고로 가까이 다가왔다.
완전히 정지한 기체를 보고 한지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와, 대박. 진짜 크다.”
동생의 그런 반응이 뿌듯해진 한서진은 송하나를 돌아봤다. 그녀도 상당히 감탄한 얼굴로 손뼉을 작게 쳤다.
“크고 예쁘네요. 이게 오빠 거라는 거죠?”
“오늘 오후에 걸프스트림도 온다고 했는데.”
“어서 들어가 보자!”
한지혜는 자기 것도 아니면서 가장 신이 났다.
에어버스 측 인물들이 한서진 일행을 내부로 안내했다.
기체는 오너 및 귀빈들을 위한 2층과 일반 수행원들을 위한 1층으로 되어 있었다.
2층은 모든 좌석이 퍼스트 클래스 이상급으로 갖춰져 있었으며, 침실과 거실, 회의실 등 CEO를 위한 장거리 여행 시설을 두루두루 꾸며놓고 있었다.
1층도 모든 자리가 특별 주문 제작한 좌석으로 되어 있었다. 버튼 하나로 좌석이 완벽한 싱글 침대로 변하는 것이다.
덕분에 넓은 공간에 비해 좌석 개수는 적었지만, 수행원들이 장거리 여행에도 편히 쉴 수 있었다. 또 여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편의공간을 따로 갖추었다.
하늘 위의 호텔.
그 말이 잘 어울리는 인테리어에 한서진은 흡족했다.
“고맙습니다.”
“저희 에어버스의 제품을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불편하신 점이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책임자는 공손히 명함을 내밀었다.
무상 AS는 3년, 여기에는 정비도 포함된다. 무상 기간이 끝나고도 5년 동안은 실비만 청구하는 수준에서 모든 기체 정비를 해주겠다고 했다.
조종사 네 명은 미 공군 출신 파일럿을 고용했다. 걸프스트림까지 전용기 두 대를 운용하기 때문이다.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고, 무엇보다 실력과 신원 모든 게 확실했다.
제품 인도를 확인하고, A380을 다 둘러보고 나니 어느덧 걸프스트림 전용기도 도착했다.
“에계? 이렇게 쬐끄만 건 왜 산 거야?”
한지혜는 투정했고, 한서진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봤다.
“그럼 가까운 지역 갈 때도 매번 A380 타고 다니게? 이건 단거리 이동용이라고. A380은 장거리 이동용.”
“아는데, 그래도 같이 붙여 놓으니 무슨 어미새와 아기새같다. 아직 제대로 날지도 못하는 어린 아기새.”
“가까운 곳 가볍게 다니기에는 얘가 좋아. 매번 A380 타고 다니는 건 시간 낭비야.”
작은 놈이라고 소홀히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멀리 돌아다니지 않는 자신의 성정을 생각하면, A380보다는 걸프스트림을 자주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
한서진은 걸프스트림까지 꼼꼼히 살피고 난 뒤에야 비로소 공항을 벗어났다.
해외 구매가 무사히 끝났다.
집에 도착했을 때, 웬 세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경호 차량이 포함된 한서진 일행이 가까이 접근하자 세단에 타고 있던 이들이 내렸다.
“한서진 박사님, 반갑습니다.”
그 중 지위가 높아 보이는 50대 초반의 중년 남자가 정중히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한서진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결례인 건 알지만 좀처럼 연락이 되질 않아서 결국 이렇게 직접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가 한서진은 맞습니다만, 누구세요?”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보좌관 윤태웅이라고 합니다. 윤 수석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윤 수석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수십 번 통화를 시도했으나 워낙 여의치가 않아서…… 결국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아아, 그러시군요. 제가 워낙 스팸 전화나 문자가 많이 쏟아져서 모르는 번호로 오는 문자나 전화는 일괄 차단했거든요. 제가 저장한 번호만 받습니다.”
“그러시군요. 이해합니다.”
극을 넘어선 부와 명예를 동시에 쥐고 있으니, 온갖 스팸 전화와 문자가 쏟아진다. 1시간에 수백 개 이상씩 전화와 문자가 쏟아지니, 도저히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
전화번호를 바꿔도 소용이 없어서 결국 한서진은 단말기 설정을 바꿔버렸다. 저장된 번호만 수신이 가능하도록.
“어쩐지 전화가 계속 연결되지 않더군요.”
“재무팀이나 사무소에 연락하시면 됐을 텐데요.”
“학교와 사무소에 수차례 시도했습니다만, 장난전화로 받아들였는지 진척이 없더군요. 그래서 결국 직접 찾아왔습니다.”
“……그러시군요.”
저번에는 외교부 장관이 오더니, 이번에는 외교안보 수석이?
한서진은 그가 무슨 용무로 찾아왔는지 별로 궁금하진 않았다.
“일단 안에 들어가시죠.”
“감사합니다.”
계속 정문 앞에서 이야기를 할 수도 없는 일, 한서진은 그와 함께 저택으로 들어섰다. 도심 한복판에 꾸며진 드넓은 정원에는 청와대 수석이라 해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토지가격만 2조 원 이상. 현재 한국에서 그 어떤 부호가 이런 대저택을 갖고 있겠는가.
야외 테이블에 앉는 윤 수석의 태도는 공손했다. 지금까지 만나본 공무원 중에서 최고로 쳐도 될 만큼.
한서진은 먼저 선수 치듯 말을 꺼냈다.
“재해 예보 서비스 지역은 더 늘릴 계획이 없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과부하 상태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온 건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윤 수석은 표정과 말을 조심하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VIP께서 박사님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VIP? 그게 누구죠?”
“……대통령님을 돌려서 이르는 말입니다.”
“그럼 그냥 대통령님이라 하시면 될 걸, 괜히 헷갈렸네요.”
한서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윤 수석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살짝 굳었다.
‘대통령이 날 왜?’
예전이라면 모를까, 요즘 같아서는 대통령이 크게 대단하지 않게 생각되었다.
자신이 정치를 할 것도 아니고, 그에게 빚을 진 것도 없다. 무엇보다 세계 대통령이라는 미국 대통령을 직접 만났고, 가끔 전화로 사적인 잡담을 나누는 사이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공권력 앞에서 벌벌 떤다고 한다. 특히 대통령은 그 공권력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은 사업 기반도 국내에 없지 않은가?
그냥저냥 아무 상관없는 동네 아저씨 느낌?
이건 그 아저씨가 생뚱맞게 술 한 잔 하자고 자기 아들을 보낸 듯한 상황이다.
“어디서 만날 생각인가요?”
“청와대에서 정식으로 초청장을 발송할 예정입니다.”
“아, 그럼 안 갑니다. 발송하지 마세요.”
“……예?”
“제가 대통령님한테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번거로운 것은 싫어서요. 정 중요한 용건이 있으면 전화를 하시던가 아니면 메일을 보내주세요. 그게 편합니다.”
“저, 저기…….”
윤 수석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수석이 밑의 보좌관을 보낸 것도 아니고 직접 찾아와서 초청 의사를 타진하고 있다. 그런데 면전에서 거절이라니.
재벌 회장이라 해도 상상을 못할 일이다.
물론 상대는 그게 되는 인물이다. 지금 한국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이 대통령 이상일 테니까. 대놓고 거절을 해도 이쪽에서 압박은커녕 쩔쩔매며 매달려야 하는 인물이다.
“박사님, 이건 정말 중요한 자리입니다. 부디 생각을 한 번만 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전 청와대까지 밥 먹으러 갈 만큼 한가하지 않고, 그럴 필요성도 못 느낍니다. 차라리 제가 뭔가 범죄를 저질러서 정식으로 소환령을 내린다면 국민 된 의무에서 응하겠지만, 이건 그냥 개인적인 초청 아닌가요?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죠.”
“물론 박사님의 의지를 강제할 순 없으나, 단순히 개인적인 자리가 아니라 공적으로 중요한 일을 논하고자 함입니다.”
“그런 건 전화로도 되잖아요. 아니면 메일로 해도 되고요.”
“……박사님. 그래도 한 번만.”
“정확히 무슨 용건인데요? 일단 들어나 보죠.”
“이 자리에서 자세히 밝히기에는 곤란한 이야기입니다.”
“그냥 전화하세요.”
한서진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일어섰다. 강경하다기보다는 이게 당연하다는 듯한 자연스러움에, 윤 수석도 뭐라 할 말을 찾기 힘들었다.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그는 별다른 수확 없이 돌아가야 했고, 한지혜가 가만히 물었다.
“왜 거절했어?”
“정말 중요한 용건이면 통화가 효율적이고, 아니라면 내가 갈 이유가 없지. 친한 사람도 아니고, 그럴 관계도 아닌데.”
“내 생각에는 그냥 오빠 얼굴 한 번 보고 밥이나 먹자는 거 같은데…….”
“그런 사적인 이유라면 더 안 가지.”
한서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기억 안 나? 지금 대통령이 국회의원일 때 복지 예산 삭감해서 우리 그때 피 본 거?”
뒤끝은 본래 길어야 인지상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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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맞은 사람은 매우 잘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