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240화 (240/609)

00240  비밀  =========================================================================

통찰안을 잃었지만, 타르타로스는 여전히 건재했다.

더 이상 타르타로스의 주변을 감싸는 에테르의 흐름을 볼 수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타르타로스를 통해 에테르의 흐름을 간접적으로 판독하는 것은 가능했다. 재해를 예측하는 SJ사이트 역시 멀쩡히 잘 돌아갔다.

사물의 진실과 본질을 읽어내는 눈은 잃었지만, 지금까지 쌓아둔 것은 건재했다.

한서진은 상실감을 애써 덜어냈다.

“에테르 연구를 못하게 된 건 아냐. 그저 통찰안 하나만 잃었을 뿐이니까.”

꿈에 관한 연구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타르타로스를 통해서든, 아니면 꿈을 통해서든, 그 신비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테니.

다만 어찌할 수 없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에테르 반도체는 더 이상 개량할 수 없겠네. 새로 개발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SJ인더스트리의 주력 제품은 특허 등록이 되어 있는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이다. 케르베로스는 그 둘을 합친 복합 반도체로, 반도체 그 자체가 한 개의 서버 컴퓨터나 다름이 없다.

통찰안을 잃었으니 더 이상은 에테르 반도체를 만들거나 개량할 수 없으리라.

무척 아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진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다.

“케르베로스는 절대로 특허 등록을 하면 안 되겠네. 마지막 무기는 나만 알고 있어야지.”

특허는 보통 20년의 기간이 있다. 20년 후에 슈나우저를 넘어서는 일반 반도체가 나올 수 있을까?

한서진은 그 점에 관해 회의적이었지만, 그래도 기술이란 모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20년은 현대 기술 발전에 있어 어마어마한 시간 아닌가.

한서진은 타르타로스가 수집한 에테르 데이터를 확인했다.

주모니터에 둥근 지구의 3D 모형이 떠오른다. 단색으로 그려진 표본 주위로 푸른 선이 빼곡하게 감싸고 있다. 그 푸른 선 하나하나가 에테르의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젠 에테르의 흐름을 직접 볼 수 없으니, 타르타로스의 판독 결과를 거쳐서 보아야 한다.

“너라도 남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한서진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 스마트폰이 진동했고, 메시지를 확인한 그의 얼굴에서 씁쓸한 웃음이 사라졌다. 대신 밝고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저 출발해요.

‘여자친구’의 메시지였다.

한서진은 급히 작업을 마무리하고 일어섰다. 보안룸을 철저히 잠그고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스포츠카와 세단을 놓고 고민을 하다가 스포츠카를 골랐다. 역시 첫 데이트에는 2인승이 어울리겠지? 결코 낮은 차체가 빚어줄 비주얼을 기대해서가 아니다.

경호 차량은 평소보다 더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한서진은 새삼 유명세가 불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데이트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몰래 데이트하는 연예인들 심정이 이해되네.’

물론 자신들은 그들과는 다르다.

자칫 경호를 소홀히 해서 납치라도 당한다면 부르는 게 몸값이다. 자신의 몸값만 해도 웬만한 국가 예산은 넘길 테니. 불편하지만 감내해야 했다.

예정 장소에는 송하나의 개인 차량이 도착해 있었다. 한서진이 조용히 차를 뒤에 대자, 뒷좌석이 열리더니 송하나가 얼른 내려서 옮겨 탔다.

앞의 차가 출발하고, 한서진도 조용히 차를 출발시키며 송하나를 힐끔 살폈다.

“왜요? 저, 어디가 이상해요?”

“아니, 옷이 잘 어울려서.”

송하나는 배시시 웃었고, 한서진은 자신의 결정에 내심 흐뭇해했다.

그녀는 흰 반바지에 헐렁한 티를 입고 있었다. 스무 살 대학생의 평범한 데이트 차림이다. 가뜩이나 낮은 좌석에 앉아 있는데 반바지까지 짧으니 긴 다리가 시원하게 드러난다.

‘이거 괜히 쑥스럽네.’

둘이서 놀러 다닌 적은 많다. 하지만 커플로 데이트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기분이 괜히 묘했다.

“그럼 수족관 갈까?”

“네, 좋아요.”

CS 아쿠아리움.

국내에서 알아주는 정상급 아쿠아리움으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를 자랑한다. 요금이 비싸기로 유명하지만 그만큼 화려한 볼거리를 갖추고 있어, 연인이나 가족들의 방문으로 언제나 북적거리는 곳이다.

그런 아쿠아리움이 오늘따라 한 명의 손님도 없이 조용했다. 송하나가 가만히 바라보자 한서진은 어색해하며 말했다.

“그냥 하루 통째로 빌렸어. 아무래도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관람하면 경호 문제도 있고 해서.”

“이해해요. 오히려 둘만 있어서 조용하고 좋네요.”

경호원들은 내부까지 들어오지 않고 입구만 지켰다. 사전에 샅샅이 내부 점검을 한 터라 다른 위험도 없이 안전했다.

조용히 복도를 걸으며, 물속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물고기 떼를 구경했다.

한서진은 물고기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온 신경을 송하나의 옆모습에 집중하고 있었다.

걸음걸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손이 흔들린다. 몇 번 잡아본 적 있는 손이지만, 지금처럼 긴장된 적은 없었다.

이제 커플인데, 당당히 손을 잡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슬쩍 손을 쥐었다.

“…….”

송하나가 멈칫해서 옆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웃어 보였다. 그녀도 덩달아 웃으며 손에 힘이 꼭 들어갔다.

둘은 손을 꼭 잡은 채, 자신들만의 시간을 나란히 걸었다.

점심 식사를 하던 중 한서진이 불쑥 말을 꺼냈다.

“여름휴가는 우리 둘이서 가자. 짐 덩어리는 집에 놓고.”

“지혜 언니가 섭섭해 할 텐데요.”

“전혀 안 그럴 테니 걱정하지 마.”

“그래도 저희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어허, 우리끼리는 처음 만난 그날부터 카운트하기로 했잖아? 그럼 2년이 다 된 거야, 우리.”

송하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그럼.”

“저기, 회장님한테는…….”

“걱정 마세요. 셋이 가는 걸로 말해둘게요.”

한서진은 속으로 조용히 환호했다. 중요한 미션을 이렇게 무사히 마쳤다.

VIP 전용룸에서 식사했기에 다른 이들의 방해를 받진 않았다. 하지만 돌아다닐 때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법 많은 이들이 한서진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한 박사님, 팬입니다. 사인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와, 옆의 분은 여자친구인가요?”

보통 젊은 재벌이나 후계자에게 이렇게 다가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한서진은 대중에게 그런 딱딱하고 이기적인 재벌이 아니었다.

자수성가를 했고, 수많은 미국인들을 살린 영웅. 단순히 돈 많은 젊은 부호가 아니라 누구나 동경하는 스타였다.

그렇다 보니 거리에서 우연히 신분이 노출되면 제법 사람들이 몰려들어 골치가 아팠다. 그럴 때면 경호원들이 나서서 겨우겨우 중재를 했다.

“사진 찍으시면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만, 지워주시죠.”

“박사님은 연예인이 아니라 일반 개인입니다. 사생활을 방해받지 않도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다. 겨우 사람들을 뚫고 나온 한서진은 송하나를 돌아보며 미안한 마음을 품었다.

“첫 데이트가 이렇게 방해를 받네. 미안해.”

“아니에요. 오빠가 유명하셔서 그런걸요. 사람들도 친근하게 생각하는 거 같아서 좋다고 생각해요.”

송하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오빠와 사귀려면 이런 것도 당연히 익숙해져야 한다고 봐요. 오빠는 지금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잖아요.”

겉치장이 아닌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태도에 한서진은 마음이 놓였다. 이런 게 내조라는 게 아닐까.

“우리 그냥 집에 가요.”

“집?”

“네, 오빠 집 정원 크잖아요. 사람들한테 방해받거나 사진 찍힐 걱정도 없고. 거기서 놀아요.”

“그럴까?”

둘은 저택으로 차를 돌렸다.

넓은 정원에서 풀과 나무를 벗 삼아 시간을 보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둘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으니, 절로 마음이 푸근해졌다.

“근데 오빠 집에는 야외 수영장이 없네요. 보통 정원이 크면 하나쯤은 있던데.”

“하나 만들까?”

“그럼 좋죠. 사실 이제 오빠가 일반 수영장이나 해변을 가기는 어렵잖아요.”

너무 유명하다는 것은 이렇게 골치가 아프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일일이 신경 써야 하니.

“그래야겠다. 당장 야외 수영장 하나 만들어야겠어.”

실내 수영장이 있긴 하지만, 야외 수영장은 그와 또 다른 운치와 재미가 있지 않은가.

“오빠, 근데 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전 오빠가 꽤 옛날부터 저 좋아했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제가 잘못 짚었어요?”

“……아니야. 제대로 짚은 게 맞아.”

“근데 되게 오랫동안 말씀을 안 하셔서, 절 그냥 여동생으로만 보는 줄 생각했어요.”

송하나는 그 말을 하면서 수줍은 듯이 작게 웃었다. 한서진은 멋쩍게 웃으며 가만히 손을 잡았다.

“실은 내가 고민을 좀 길게 하고 있었거든.”

“어떤 고민이요?”

“내가 널 좋아해도 되나, 하는 그런 고민.”

“……이상해요. 그런 고민은 안 해도 되는데.”

“나한테는 중요한 문제였어. 근데 이젠 안 그래.”

“이제는 해소된 거죠?”

“당연하지.”

성숙한 얼굴에 걸린 해맑은 웃음은 참으로 예쁘다. 한서진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선택이 늦은 것을 후회했다.

더 빨리 태도를 정할 수 있었을 텐데. 통찰안의 능력에 대한 미련과 망설임이 그것을 막았다.

“맞다. 저 폰 좀 가져올게요. 1층 응접실에 놔뒀어요.”

송하나는 벌떡 일어나서 본채로 향했다. 한서진은 턱을 괸 채 흐뭇한 미소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늘씬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뒤태는 남자의 마음을 사정없이 짓밟는 폭력기다. 저런 폭격이라면 언제든지 사정없이 당해도 흡족할 것 같다.

‘아이는…… 한 다섯 낳을까? 아니면 여섯? 그 이상?’

결혼식은 언제하지? 약혼은? 이럴 수가!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손 밖에 못 잡아봤어!

흐뭇하게 뒤태를 바라보는데 순간 찌잉 하고 가벼운 두통이 머릿속을 울렸다.

일시적인 현기증인가 하고 눈을 비비려는 순간, 다시 한 번 두통이 머릿속을 찔렀다. 조금 전보다 분명히 짙고, 선명한 통증이었다.

“흐윽!”

그 순간 매스꺼운 어지러움이 덮쳤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이 보였다. 중심을 잡을 수 없었고, 균형감각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한서진은 힘겹게 송하나의 뒤태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듯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세상이 반전했다.

「ŀIJØ Œ ß æ  Ŋ Æ 」

머릿속이 뱅글뱅글 도는 와중에도, 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송하나의 ‘진실’이 보였다. 비록 읽을 수는 없었지만.

‘통찰안? 설마?’

그는 눈을 부릅떴다.

설마 통찰안이 사라진 게 아니었단 말인가? 아직 자신의 안에 남아 있었단 말인가?

그는 필사적으로 중심을 잡았다. 다행히 몸은 멀쩡했다.

혼란의 원인은 시각이었다. 그가 감당하기 벅찬 시각 정보가 무수히 쏟아지며 두뇌를 헝클어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정신없이 사방을 돌아보았다.

「ʤß ɦɢœŋɑijŦß .」

「Bier chroommiieks.」

「ĸ ðÐ ª Ħ ħʼn.」

「..―··· ――· ―· ――...· 」

온 사물이 감추고 있는 본질, 그리고 진실이 시각 정보로 변해 끊임없이 쏟아진다.

하늘, 구름, 지붕, 기둥, 의자, 풀, 벌레, 바람, 질소, 온도, 에테르…….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이 객관적인 데이터로 변해 망막을 사정없이 폭격한다.

‘통찰안…… 사라지지 않았어!’

불끈 쥔 주먹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 무수한 정보 중 단 한 조각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아서 왕. 이게 당신이 보는 세상이야?”

“ㅇㅇ. 좀 어지럽지?”

“그럼 지금까지 내가 본 통찰안은…….”

“그건 레벨 5짜리고, 내 건 레벨 999짜리.”

챌린저가 보는 킬각, 사망각은 브론즈5는 볼 수 없죠.ㅋ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