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9 비밀 =========================================================================
한서진이 고열에 시달리자 저택은 난리가 났다.
집사 최수한은 인근 종합병원에 연락해서 구급차 두 대에 의료진까지 불렀다. 일반 환자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한서진은 지금 국내 최고 유명 인사였다.
간단하게 진찰을 마친 의사가 난색을 표했다.
“현재로선 원인을 진단하기 어렵습니다. 서둘러 병원으로 모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오빠 꼭 살려주세요.”
한지혜가 동의했고, 의료진은 그대로 구급차에 한서진을 태워 후송했다.
세 대의 경호 차량까지 거느린 채 새벽을 질주하는 구급차의 위용에, 거리의 취객들이 뭔가 하고 바라보았다.
한서진의 후송에 종합병원측도 난리가 났다. 교수급 의료진이 세 명이나 붙어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열은 40도 가까이 치솟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40도를 넘기기도 했다.
해열 약물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간호사들이 달려들어 얼음마사지로 필사적으로 체온을 내렸다.
“무슨 병인지 알 수 없다고요?”
“병의 원인은 보이지 않고 증세만 있습니다. 그것도 고열 증세 딱 하나만요. 심지어 약물도 듣지 않습니다. 현재로서는 열을 내리는 것 외에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병원이 발칵 뒤집어진 채로 새벽이 다가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증세가 호전되었다.
“열이 내렸어요!”
간호사가 기뻐하며 외쳤다. 순식간에 정상 체온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 의료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아직 원인이 잡히지 않았어. 방심하지 말고, 눈을 떼지 말고 지켜보게.”
새벽에 급히 출근한 병원장은 날카로운 눈으로 의료진을 훑어보며 지시했다. 그는 하늘이 만들어준 이 우연을 어떻게든 자기 인맥으로 만들고 싶었다.
아침 8시 즈음 한서진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숙면을 취하고 깨어난 듯 눈빛이 맑았다. 의료진은 비로소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한서진 환자님, 이 불빛을 바라봐 주세요. 예, 아주 좋습니다.”
혈액검사 등 각종 검사에서 아무 이상이 없고, 체온도 정상이었다. 의식이나 인지 능력도 또렷했고, 대화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내가 아팠다고?”
“그래, 아주 그냥 밤새 열이 펄펄 끓었어! 기억 안 나?”
“기억이 안 나. 그냥 잠들었다가 깨보니 여기던데.”
“내가 마침 오빠 침실 앞을 지나가다가 신음소리 못 들었으면 큰일 났을 거야. 웬일로 오늘 문을 열어놓고 잤대? 진짜 아버지가 도우셨나?”
한지혜는 오빠의 어깨를 두 손으로 턱 짚은 채 진지하게 말했다.
“오빠는 우리 한씨 집안을 크게 부흥시킬 위대한 사명이 있어. 부디 오빠 몸은 오빠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
“가문은 무슨. 너랑 나랑 겨우 두 명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노력해야지.”
한서진은 쓴웃음만 지었다. 불길한 예감이 으슬으슬 작은 오한을 느끼게 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뉴월드백화점 사태.
4시간 동안 어떤 손님도 뉴월드백화점을 찾지 않은 그 사태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그런 백화점 쫄딱 망해버리라고 혼잣말을 했었고, 그리고 또…….’
그때도 동일한 증상을 앓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의 석연치 않은 느낌은 아직도 그의 무의식에 남아 있었다.
‘설마?’
그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주시하며, 눈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사물이 감추고 있는 진실도, 자신에게만 보이는 에테르의 흐름도,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큭.”
그는 눈을 감았다가 뜨고, 다시 한 번 정신을 집중했다. 사물에 담긴 진실을 들여다보려 애썼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통찰안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아니, 통찰안의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망연자실해져서 한참 동안 넋 놓고 있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진짜…… 가버렸구나.”
통찰안이 사라졌다.
한서진은 힘들게 그 사실을 인정했다. 어느 정도 어렴풋이 각오하고 있었어도, 현실로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사물의 진실을 꿰뚫어보던 그의 눈은 이제 평범한 안구에 지나지 않았다. 더 이상 물체의 구조식도, 사물의 본질도, 에테르의 흐름도 볼 수 없게 되었다.
퇴원을 앞두고, 그는 상실감을 좀처럼 떨치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약했었나.’
만약 반려 판정을 무시하는 대가로 통찰안이 사라진다 해도, 상관없다 생각했다. 각오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나 보다.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이리 상실감이 큰 것을 보니.
“오빠, 괜찮은 거예요?”
송하나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왔다. 표정이 어두운 게 어지간히 걱정을 했나 보다.
그는 괜찮다는 듯이 그녀의 팔꿈치를 살짝 다독여 주었다.
“괜찮아. 이제 멀쩡해.”
“그래도 안 되겠어요. 집에 가셔서 쉬세요.”
“괜찮다니까. 마침 잘 됐네. 그냥 퇴원하면서 같이 수족관 보러 가자.”
“이 상황에 수족관은 무슨 수족관이에요? 다른 생각 말고 집에 가서 푹 쉬세요.”
“의사가 몸 완전 멀쩡하댔어. 괜찮아.”
“안 돼요.”
송하나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옆에서 한지혜도 거들었다.
“그래, 그래. 밤새 펄펄 앓아놓고 무슨 데이트야. 하여간 남자들은 죄다 늑대라니까. 당신은 한씨 가문을 부흥해야 할 위대한 사명이 있으니까 집에 가서 푹 쉬세요.”
결국 두 여자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한서진은 퇴원 후 곧장 집으로 향했다. 최수한은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전담 의료진을 데려와서 며칠 간 대기시키기로 했다.
“그동안은 말씀을 차마 못 드렸는데, 역시 회장님도 개인 주치의를 두는 게 좋겠습니다.”
“좀 민망하네요. 제 나이에 무슨 개인 주치의입니까? 몸이 어디 아픈 것도 아니고.”
“회장님 정도 되는 지위면 다 두고 있습니다. 제가 한 번 후보군을 추려보겠습니다.”
송하나와 한지혜도 거기에 찬성했고, 한서진은 결국 개인 주치의를 두기로 했다. 몸도 건강한 20대 청년이 이 나이에 벌써 주치의라니…….
“소식 듣고 걱정했어요. 그래도 하루 만에 다 나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걱정까지야. 그냥 열 좀 난 것뿐인데.”
“그냥 열이라고 무시하시네. 원래 열은 모든 병의 신호인 것도 몰라? 열 좀 올랐다고 무시하는 거 아니라고.”
한지혜가 옆에서 거들었다. 한서진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고, 한지혜는 툴툴거리며 침실에서 나갔다.
침실에는 송하나와 둘만 남았다. 그녀는 신기한 표정으로 침실 곳곳을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오빠 방이구나. 처음 들어와 봐요.”
“아, 그래?”
그러고 보니 집에 놀러온 적은 많아도 방에 데려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고 집이 워낙 크다 보니 굳이 방까지 데려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방이 정말 크구나. 이런 데서 혼자 잠들면 외롭겠어요.”
“그래서 불 다 켜고 자.”
“그럼 숙면을 못 취하실 텐데.”
“메인등은 안 켜고, 수면용으로 보조등만 켜. 볼래?”
한서진은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모든 창문에 커튼이 쳐지며, 천장에 희미한 간접등이 켜졌다. 밝지 않으면서도 희미하게 방 풍경이 보인다. 천장을 다양한 색으로 수놓은 간접등을 보고 송하나가 손뼉을 쳤다.
“불빛이 엄청 예뻐요. 잘 꾸며놓으셨네요. 설마 오빠가 직접 하신 거예요?”
“아니, 지혜가 자기 방 하는 김에 나도 같이 세트로 했어. 잠자기에는 좋더라고.”
송하나는 배시시 웃었다.
잠시 침묵이 둘을 찾아왔다. 어색함이 아닌 다른 의미를 띠고 있는 정적. 간접 조명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욱 신비하고 예뻐 보였다.
“오늘 수족관 꼭 가고 싶었는데.”
“안 돼요. 다음에 몸 다 낫고 가요. 아픈 사람이 무슨 수족관이에요?”
“꼭 할 말이 있었거든.”
“…….”
송하나는 멈칫했다. 침대에 비스듬하게 누운 채로 주시하던 한서진은 몸을 일으켰다. 가죽 의자에 앉아 있던 그녀가 흠칫 놀랐지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송하나 앞에 똑바로 선 그는 가만히 두 손을 쥐었다. 그녀는 살짝 움츠렸으나, 손을 빼지는 않았다.
“하루 이틀쯤 기다렸다가 말을 할까 생각했어. 그런데 웃기게도, 이제 와서 그 하루 이틀 참는 게 도저히 안 되겠더라. 자신이 없어.”
“오빠.”
“하나야. 좋아해.”
“…….”
“우리 사귀자.”
송하나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과연 지금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한서진은 사라진 능력, 통찰안을 생각했다.
그 힘이 없었으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다. SJ인더스트리의 오너이자, 미국의 친우이자 명예시민, 세계 최고의 부자, 심지어 송하나와의 인연까지. 그 모든 것은 통찰안을 가졌기에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통찰안, 미안하다.’
원대한 야망이 있었다. 에테르의 근원과 그 꿈의 비밀까지 밝혀내서, 더욱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소유하는 것. 지금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인물이 되는 것.
그 야망에는 통찰안이 반드시 필요했다. 어쩌면 자신의 야망은 여기서 멈출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까지 교정하고 싶진 않아. 통찰안, 네가 이해해라.’
송하나와의 인연은 통찰안 덕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인연은 어느덧 통찰안 그 자체를 포기해도 좋을 만큼 깊어졌다.
더 높은 곳으로 데려다줄 힘을 잃는 것은 아쉽지만, 더 높은 곳으로 뛰어오를 의지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놓지 않겠다. 그런 의지가 있음을 확인했을 뿐이다.
‘지금까지 이룩한 것만 해도 충분해. 그리고 타르타로스가 있으니 에테르 연구를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니야.’
어느덧 부끄러움에 젖은 송하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한서진은 마음을 굳게 다졌다.
‘고작 통찰안 하나만 포기했을 뿐이야.’
가죽 의자에 앉은 채로 그녀가 조심스럽게 올려다본다.
“갑작스러운 고백이라 당황스러워요. 생각할 시간을 며칠 주시면…….”
“안 돼. 못 줘.”
“알았어요. 좋아요.”
주저 없는 거절과 기다렸다는 듯한 승낙. 약속이라도 한 듯한 장난이었다.
송하나는 생긋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언제부터 1일로 할까요?”
“그게 무슨 말이야? 언제부터 1일로 하자니…….”
고백은 지금 했는데, 언제부터 1일로 하자고?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감이 안 잡혔다.
“전 오빠 처음 만났을 때부터 1일로 하고 싶은데. 안 돼요?”
“…….”
한서진은 조금 당황했다.
송하나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백철중의 수십 년 단골집으로 찾아왔을 때, 당시에는 영락없이 개인 비서인 줄만 알았다.
18세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정갈하고 성숙한 복장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선명함으로 남아 있었다. 영락없이 성인인 줄만 알았으니까. 그녀는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때보다 더욱 어려 보인다.
“저, 그런 로망이 있어요. 처음 만나서 한눈에 반하고, 서로 사귀고……. 우리 실은 그때부터 남몰래 사귀고 있었다고 치면 안 될까요?”
“소급 적용을 하잔 말이네. 좋아.”
“물론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에요. 아셨죠?”
“그럼. 대외적으로 우리는 오늘부터 1일이다.”
비록 통찰안은 사라졌지만, 후회는 들지 않는다.
그보다 더 소중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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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그날부터 1일인 걸로 치자고?
이것들이 누구 잡혀가는 꼴이 보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