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8 비밀 =========================================================================
동생이라는 짐이 끼긴 했지만, 쇼핑은 즐거웠다.
쇼핑백을 잔뜩 든 한지혜는 낑낑대면서도 얼굴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세상에, 이게 다 얼마야. 한지혜 팔자 이렇게 펼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런 탐욕스러운 대사를 밉지 않게 치는 것도 재주라면 참 재주다. 안 그러냐?”
“탐욕이 나에게 빽을 준다면 난 기꺼이 탐관오리가 되겠어.”
한서진은 피식거렸다. 자신과 송하나는 얼마 안 사고 정작 한지혜만 이것저것 잔뜩 샀다. 자신의 카드로 긁었지만 별로 아까운 마음은 안 생긴다.
그는 근래 재물이 반드시 우애를 해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돈에 휘둘리지만 않으면 오히려 적절한 우애를 쌓는데 도움이 된다.
“근데 밥은 대체 언제 먹어? 나 배고프다니까.”
“넌 아까부터 오자마자 밥 타령이야? 알았어, 이제 가자.”
쇼핑을 마친 셋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홀에 들어서는데 지배인이 급히 다가왔다. 한서진은 작게 실소했다. 아무래도 자신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한 박사님께서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예약을 하지 않았는데도 지배인은 전망이 좋은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직접 주문까지 받았다.
“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한지혜가 스마트폰을 들고 일어났다.
한서진은 물컵을 매만지며, 송하나를 차분히 주시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가 부끄러운 듯이 눈을 돌렸다.
보면 볼수록 예쁘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질리지 않는다.
불현듯 그녀가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오빠.”
“응?”
“아직 멀었나요? 저한테 할 말 있다는 거.”
“…….”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그 표정은 불쾌감이 아니라 신중함이었다.
“하나야.”
“네, 오빠.”
“내일 시간 되지? 같이 수족관 보러 갈래?”
대답을 회피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가. 송하나는 갈팡질팡하는 듯했으나, 곧 입술을 살짝 깨물며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셋은 헤어졌다.
송하나는 시간 맞춰 도착한 개인 기사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고, 한서진 남매는 같은 차를 타고 귀가했다.
집 근처에서 한지혜가 불쑥 물었다.
“두 사람 무슨 일 있었어? 오늘 분위기 영 어색하던데.”
“그래 보이든?”
“있긴 있구나?”
조수석에 앉은 한서진은 대답 대신 작게 피식거렸다. 한지혜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바라보았다.
“오빠, 설마 다른 여자 생긴 건 아니지?”
“내가 여자가 어딨어.”
“안 그럼 왜 하나하고 아직도 안 사귀는 건데? 언제까지 썸만 탈 거야?”
“우리 썸타는 거 아니야.”
“사귀는 것도 아니고, 썸타는 것도 아니면, 대체 무슨 사인데? 가끔 보면 오빠 답답해.”
“나만큼 답답하진 않을 걸.”
한서진은 신효진을 떠올렸다. 곧이어 꿈에서 봤던 그녀의 모습을 상기했다.
꿈의 그 왕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리고 신효진은 바로 그 왕의 배필이었다. 그래서 통찰안은 그녀에게 반려 판정을 준 것이리라.
그 꿈은 단순한 허상이 아니다. 분명히 어딘가에 실존하는 공간이다.
신효진은 꿈에서 자신의 배필이다. 만약 현실에서 그녀를 선택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통찰안의 계시를 거슬렀다고, 왕이 불쾌하게 여겨 힘을 거둬갈 것인가?
“가만, 정문 앞에 누가 있는데? 기자인가?”
한지혜의 말에 한서진은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잠깐 세워주고, 너 먼저 들어가.”
“여자네? 이쁜데? 오빠, 설마……?”
“그냥 회사 직원이야.”
“회사 직원이 왜 여기까지 찾아와?”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한서진은 차에서 내린 뒤 엉거주춤 서 있는 신효진을 향해 다가갔다. 그를 발견한 신효진은 두 손을 모아 쥐며 시선을 살짝 떨어뜨렸다.
차가 정문 앞에 정지한 채 출발하지 않는다. 뒤에서 동생이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지 생각하니, 한서진은 쓴웃음이 나왔다.
“신효진 씨?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이,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인터넷에 치니까 박사님 댁이 나오더라고요. 이틀 전에는 제가 그렇게 가서 죄송했어요. 그래서 사과드리려고…….”
“아닙니다. 제가 먼저 실없는 소리를 했는데요. 불쾌하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전혀요!”
신효진은 기겁을 한 듯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한서진은 조금 긴장해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사과 할 일도 아닌데, 겨우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다.
저건 무언가 결심이 선 표정이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틀 전, 박사님이 하신 말씀에 관해서…….”
한서진은 잠시 뒤를 돌아봤다. 한지혜는 아직도 차를 출발하지 않은 채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리를 옮기죠.”
한서진은 저택 안으로 신효진을 안내했다. 그녀는 쭈뼛거리면서 따라왔다.
“이, 이게 진짜 전부 다 박사님 집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살짝 넓죠?”
“살짝 넓은 정도가 아닌데요…….”
신효진은 으리으리한 저택의 규모에 완전히 질린 듯했다. 조금 넋이 나간 듯한 표정, 평소라면 뿌듯했을 테지만 지금은 심각한 대화를 앞두고 있는 중이었다.
둘은 야외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신효진은 자리에 앉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했다. 시선은 신기한 듯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네, 좀 전에 먹었어요.”
“그런가요. 그런데 제게 하실 말씀이 뭔가요?”
신효진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망설임을 억지로 씹어 넘긴 뒤 입을 열었다.
“사실 저도 꿈을 꿔요!”
“…….”
“바, 박사님하고 완전히 똑같은 꿈이에요. 현실하고 완전히 똑같이 생생하고요, 그 안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돼서 자유자재로 돌아다녀요. 괴물, 환상, 마법…… 마치 커다란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꿈이에요.”
신효진은 살짝 흥분해서 설명했다. 한서진은 조금도 놀라지 않은 채 귀담아 들었다.
그녀는 어느덧 자신의 설명에 취해 있었다. 지금까지 겪은 모험을 자랑처럼 자세히 늘어놓았다. 일행을 만나게 된 경위, 마룡을 잡은 이야기, 그리고 마수 클로비의 습격까지.
리온이 화제에 나오기 직전 그녀는 멈칫했다. 한서진은 신중한 표정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계속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박사님의 도움으로 마수 클로비의 습격을 물리칠 수 있었어요. 아니, 정확히는 박사님을 완전히 빼닮은 남자 기사였죠.”
“저를 닮았다는 기사가 혹시 머리가 금발입니까?”
신효진은 흠칫 놀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
“전 처음에 참 신기한 꿈을 꾼다고 생각하고 그냥 즐기기만 했어요. 박사님이 나왔을 때만 해도…… 제가 많이 고마워하고 있구나, 그래서 제 꿈에까지 나오는 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 그런데 박사님도…….”
“저도 같은 꿈을 꿉니다. 아마 우리가 꾸는 꿈은 같은 세상으로 생각되네요.”
“……꿈에서, 저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한서진은 멈칫했다. 신효진의 눈동자에는 기묘한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왕과 왕비…….’
그녀와 자신은 같은 꿈을 꾼다. 아마 그녀는 알면서도 물어보는 것이리라. 여기에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할까.
“거기까진 제가 알지 못합니다. 저는 신효진 씨와 달리 꿈에서 자유롭지가 않아서요.”
“……아.”
“저는 어떤 왕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가끔 제3자의 시선에서 그 왕을 보기도 합니다. 그 왕은 머리카락을 제외하면 저와 똑같이 생겼지요. 그리고 저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럼 박사님이 보시기에, 저는 어떻게 보였는데요?”
“…….”
“근거 없는 주관이라도 좋으니, 그것만이라도 알려주세요.”
열망이 담긴 눈빛이 반짝거린다. 그것은 불결한 욕심이 아닌 순수한 기대감이었다.
한서진은 이를 악물었다.
‘만약 내가 신효진 씨를 선택하지 않으면…… 통찰안은 정말로 사라질까?’
수백 번이 넘게 반복된 고뇌. 통찰안의 소멸.
통찰안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힘이다. 암을 낫게 하고, 많은 돈과 명예를 안겨다 주었다. 통찰안이 사라지면 에테르의 흐름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신효진을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망설였다.
통찰안의 반려 판정을 무시하면, 영영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함에.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이제는 마음이 똑바로 섰다.
‘내가 진정 왕이라면, 고작 통찰안의 계시를 무시한다고 힘이 사라지지는 않을 거야.’
그런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단단하게 굳은 자기다짐.
‘그리고 정말로 통찰안이 사라진다 해도…… 상관없어.’
그는 보이지 않게 주먹을 꽉 쥐었다.
통찰안은 자신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통찰안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송하나를 만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놓지 못하고, 두려워했다. 통찰안을 놓아버리면, 지금껏 이룩한 모든 것이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러나 힘에만 얽매여 정작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어리석은 게 아닐까.
통찰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사라진다 해도, 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야 마음을 덜어낼 준비가 된 것이다.
“잘 모르겠습니다. 친한 사이로는 보였지만, 말했다시피 전 그곳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러시구나. 전 다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데.”
신효진은 시무룩해서 중얼거렸다.
‘만약 약혼 관계라고 밝히면…… 박사님이 민망해하겠지?’
우울함이 입안에 쓰게 고인다. 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참 신기하네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게요. 저도 놀랐어요.”
“아무도 믿지 못할 거예요. 이런 소설 같은 이야기. 그렇지요?”
“절대로 비밀로 하죠.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겁니다.”
“비밀, 좋아요. 우리 둘만 아는 비밀로 해요, 그럼.”
신효진은 하얗게 웃으며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생각했다. 우리가 꿈속에서 무슨 사이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닐까 하고.
같은 꿈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해서 그 달콤한 분위기를 모를 수 있을까.
약혼 관계는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연인 사이라는 것을 모를 순 없을 것이다. 누가 봐도 그리 다정한데.
‘박사님은…… 혹시 그게 부담스러우신 걸까?’
신효진은 문득 송하나를 떠올렸다.
같은 나이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한 여자. 그녀의 존재가 지금 한서진에게 거짓말을 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어, 근데 박사님.”
“네.”
“송하나 씨, 그 분이요. 박사님에게는 어떤 분이에요?”
그는 꿈속의 자신들 관계에 관해서 숨겼다. 현실에 관해서는 어떤 태도를 보일까. 신효진은 그것이 알고 싶었고, 또한 대답이 두려웠다.
한서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제가 좋아하는 여자입니다.”
“…….”
잠시 말이 없던 신효진은 억지로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분, 주제넘지만 제가 봐도 정말 잘 어울려요. 진짜 영화 속의 커플 같아요. 볼 때마다 너무 예뻐요.”
“감사합니다.”
“전…… 이만 늦어서 가볼게요. 그리고 꿈에 관해서 특별한 일이 있으면 연락드려도 되죠?”
“물론입니다.”
한서진은 기사를 불러 신효진을 태워다주었다. 차창 너머에서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은 어딘지 슬퍼 보였다.
차가 보이지 않게 되자 비로소 그는 무거운 한숨을 토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단단했다.
‘이게 옳은 거야.’
통찰안은 그녀를 반려로 판정했고, 그는 결국 거부했다.
그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후회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그날 밤, 그는 원인불명의 고열에 밤새 시달렸다.
============================ 작품 후기 ============================
“미안하다. 처음부터 한국계 아랍인으로 설정했어야 했는데....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