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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37화 (237/609)

00237  비밀  =========================================================================

“……네?”

상상을 완전히 벗어난 말에 신효진의 가슴이 굳었다.

그녀는 경직된 눈으로 한서진의 시선을 주시했다. 몸이 마비된 것처럼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경직이 풀리고, 그녀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지금 뭐, 뭐라고, 하셨나요?”

“어이없는 질문인 건 저도 압니다. 저도 이래도 되나 여러 번 망설였습니다. 제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점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확인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신효진은 하얗게 질린 얼굴에 가까스로 억지웃음을 만들었다.

“저, 박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진짜 같은 꿈을 꿔본 적 있냐고요?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당황스러워요.”

“신효진 씨, 저는 절대 농담을 하는 게 아닙니다.”

“농담이 아니라니요.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녀는 필사적으로 잡아떼면서도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진짜 같은 꿈을 꿔본 적이 있냐니. 그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리온은 한서진과 똑같이 생겼다. 그래서 꿈속에서 리온과 사랑을 속삭이며, 마치 자신이 한서진의 연인인 것 같은 착각을 즐겼다. 그것은 그저 꿈일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한서진이 마치 그걸 알고 있는 듯이 질문한다. 어떻게? 자신은 꿈에 관해서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데?

불안함을 뚫고 한 줄기 망상이 피어올랐다.

그때였다.

“저도 그런 꿈을 꾸거든요.”

“……네?”

신효진은 멍하니 그를 돌아봤다. 그는 주저 없이 말을 이었다.

“실은 제가 어떤 이상한 꿈을 자주 꿉니다. 현실처럼, 진짜처럼 생생한 꿈이죠. 꿈을 꿀 때나 깰 때나, 저는 그게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안 되더군요.”

“…….”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 꿈에서 저는 왕이었습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한서진은 자세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통찰안이라든가, 에테르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그 꿈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그런 것 위주로만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에 쐐기를 박았다.

“그런 꿈을 꾼 것도 신기한데, 심지어 그 꿈에서 효진 씨를 만난 적도 있습니다.”

어떻게 만났고, 왕과는 무슨 관계라는 이야기는 덧붙이지 않았다. 꿈에서 내가 왕이고, 당신은 왕비다,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자칫 수작을 부리는 것으로 오인하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

신효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꼭 쥔 주먹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 침묵이 예사롭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의 말을 허황된 헛소리나, 되도 않는 수작질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설마 했는데…….’

한서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신효진이 어떤 대답을 할지 새삼 불안해졌다.

그녀가 자신을 실없는 사람이라 오해해도 좋다 생각하고 던진 질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끝까지 아무렇지 않으면 불편한 장난 한 번 친 것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 나올 줄이야.

“박사님이 꿈에서…… 왕이었다고요? 그리고 제가 그 꿈에 나왔다고요?”

“그렇더라고요. 너무 신기하지 않나요?”

한서진은 어색하게 말을 받았다. 어느새 고개를 든 신효진이 똑바로 자신을 주시했다. 이제껏 보지 못한 강한 눈빛이었다.

“저는 그 꿈에서 뭐였나요?”

“……그건.”

“말해주세요. 저는 그 꿈에서 누구였고, 박사님과는 어떤 사이였나요?”

“…….”

이번에는 한서진의 말문이 막혔다.

당신은 꿈에서 왕비이자 나의 반려였다, 그런 말을 어떻게 하라고? 불가능하다.

그녀가 힘없이 미소 지었다.

“이만 내려주세요.”

“효진 씨. 저는…….”

“집 거의 다 왔어요. 여기서부터는 걸어갈게요.”

그제야 한서진은 정신을 차렸다. 내비를 확인하니 과연 그녀의 말대로였다.

“태워다주셔서 고맙습니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꾸벅 머리를 숙였다.

쉬이 대답을 들려주지 않을 것 같아서 한서진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억지로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실없는 소리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많이 취했나 봅니다. 효진 씨도 편안히 쉬세요.”

“네, 박사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뒷좌석에 앉아, 멀어지는 신효진의 뒷모습을 무겁게 바라보던 한서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출발하죠.”

잠이 들자, 꿈이 왔다.

멀리 새벽이 물러나고 있었다. 스칼린은 살짝 얼굴을 들어 옆을 바라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망토를 덮은 리온이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금발을 제외하면 영락없이 한서진과 똑같은 얼굴. 그녀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설마 박사님도 나와 똑같은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두근두근,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설마 리온의 안에 한서진이 있단 말인가? 그와 자신이 같은 꿈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도 안 돼.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답답해진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모닥불에서 멀어졌다. 밤바람을 맞으며, 냇가로 향했다.

달빛을 머금은 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마음을 조금이나마 다독여준다.

그렇게 심신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리온이었다.

“자지 않고 무엇을 하는 거요? 피곤하지 않소?”

“아, 리온. 일어났어요?”

스칼린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돌아봤다. 성큼 다가온 그가 자연스럽게 팔을 뻗으며 껴안는다.

그의 체온을 느끼며,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비록 꿈이지만,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해주는 남자다.

‘꿈은 꿈일 뿐이야. 나도 알아. 하지만…….’

부디 영원히 이 꿈이 끝나지 않으면 좋겠다. 이 꿈에서 영원히 그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런 소박한 마음 위로, 한서진의 눈빛이 겹치듯 떠오른다.

―혹시 진짜 같은 꿈을 꿔본 적이 있습니까?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그녀의 경련을 눈치 챘는지, 리온이 얼굴을 떼고 걱정스럽게 들여다봤다.

“왜 그러시오? 혹시 추운 거요?”

“……리온. 저 물어볼 게 있어요.”

“얼마든지 물어보시오.”

“제가 바보 같아 보일 수도 있을 거예요. 제가 생각해도 너무 한심한 생각이거든요. 근데 물어보지 않으면 답답해서 안 될 것 같아요.”

어느덧 그녀는 ‘현실’에서 한서진이 했던 말을 똑같이 읊고 있었다.

눈을 똑바로 들고 그를 주시하며, 그녀는 또박또박 물었다.

“혹시 당신은 아주 고귀한 신분이 아닌가요? 이를테면 왕족 같은…….”

“…….”

“미, 미안해요. 제가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을 했죠. 나, 난 항상 왜 이러지? 아하하…….”

불현듯 그의 손이 가만히 자신의 손을 감싸온다. 그 은은한 스킨쉽에 스칼린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미안하오. 귀하에게 조금 더 일찍 밝혔어야 했는데.”

“……리온?”

“리온은 내 아명이오. 내 진짜 이름은 아서 카드리온 슐트제너윈 코트발 1세.”

처음 듣는 이름임에도, 고귀한 형식에 담긴 무게감에 숨이 막힌다.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그의 손에 더욱 힘이 실렸다.

“레노지안, 모든 대륙의 지배자요.”

“그럼 미국 진출은 올 하반기에도 힘든 거예요?”

“글쎄, 잘 모르겠어.”

한서진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연방 정부와 협상할 게 좀 남아서…… 아직 여러 모로 장애물이 좀 있거든.”

“얼른 빨리 칼라폰이 미국에 널리 퍼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오빠가 돈 많이 벌잖아요.”

“에이, 돈은 지금도 많아.”

“전 오빠가 돈을 더 많이 버시면 좋겠는데.”

송하나는 밝게 웃었다. 그것은 탐욕과는 거리가 멀었다. 진심으로 자신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미소였다.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있는데 지나가는 남자 고객들이 연신 송하나 쪽을 힐끔거린다. 한서진은 그런 시선을 느끼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속물적인 마음이지만, 송하나와 함께 다니다 보면 어깨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고 마음이 뿌듯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결국 남자란 동물들은 참.

그때였다. 웬 20대 여자 세 명이 이쪽을 보고 수군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어, 혹시 한서진 박사님 아니세요? 얼마 전에 미국 명예시민권 받으신…….”

“잘못 보셨습니다.”

“마, 맞는 거 같은데…….”

“아니에요. 전 박사 아니고, 아직 학생이거든요. 이중국적자는 맞습니다만.”

그 말에 여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가운데 여자가 신이 나서 흰 노트를 내밀었다.

“와아, 한 박사님 맞으시구나. 저 팬이에요! 이렇게 뵙게 된 것도 영광인데, 죄송하지만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사인을 해주었고, 여자들이 신이 나서 이것저것 질문을 해댔다. 송하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팬미팅’이 끝나기를 기다려주었다.

“어머, 죄송해요. 데이트 중이셨나 봐요.”

“와, 여자친구 분도 엄청 미인이시네요. 진짜 놀랐어요.”

여자친구란 말에 기분이 좋아지다가도 한편으로는 괜히 송하나의 눈치가 보였다. 다행히 그녀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그런데 박사님.”

“저 박사가 아니라니까요.”

“그럼 교수님이라 불러도 되나요?”

“…….”

미 대통령은 명예시민권 수여 때 그를 한서진 박사라 불렀다. 그는 그래서 그 곤혹을 단단히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박사 학위가 두세 개쯤은 있는 줄 알고 있었다.

“박사님은 엄청 중요한 인물인데 이렇게 경호도 없이 돌아다녀도 되나요?”

“경호는 있어요. 보이지 않을 뿐이죠.”

“어머나, 세상에. 멋져.”

“역시, 어쩐지 이상했어요. 경호원이 안 보여서 설마 설마 했거든요.”

여자들은 뭐가 즐거운지 까르르 웃었다. 다행히 다른 손님들은 한서진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옆에 경호원이 있고 없고는 이런 차이가 있다.

“오빠, 이제 그만 가요. 지혜 언니 곧 도착한대요.”

“아, 그래? 미안해요. 저희가 이제 가봐야 해서.”

“네,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행히 여자 셋은 꾸벅 인사하며 순순히 보내 주었다.

나란히 정문을 나서면서, 송하나가 살짝 볼멘소리로 물었다.

“인기 많으시네요, 우리 한서진 교수님.”

“하나 너까지 그럴래?”

송하나는 킥킥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백화점 스카이라운지를 나선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명품관을 돌며 천천히 쇼핑을 즐겼다.

한서진은 손목시계, 송하나는 조그만 파우치 하나만 샀다. 계산은 서로의 카드로 했다.

통로를 걷던 중 한서진은 문득 뭔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저쪽 벽에 걸린 초대형 포스터, 세련된 원피스를 입고 활짝 웃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익었던 것이다.

“저 포스터…….”

“이제 보셨구나. 신효진 씨예요.”

“효진 씨가?”

한서진은 놀라서 송하나를 돌아보았고, 그녀는 부끄러운 듯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처음 효진 씨 봤을 때, 백화점 홍보 모델로 쓰면 딱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제안을 했었는데, 다행히 효진 씨가 쉽게 승낙했어요.”

“홍보 모델을?”

“원래 모델 하시던 분 있었는데 이번에 계약 만료도 다 됐고 해서 신효진 씨에게 부탁해봤어요.”

한서진은 조금 떨떠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잘 됐다는 마음도 들었다.

“효진 씨한텐 잘 된 일이지만, 괜찮아? 모델 교체하고?”

“네, 매출은 오히려 더 올랐어요. 사람들도 효진 씨가 누구냐고 난리예요.”

“그렇구나. 이러다가 연예계도 데뷔하겠네.”

“효진 씨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할 거예요. 대단한 미인이잖아요, 그분.”

신효진이 연예계에 데뷔한다? 한서진은 왠지 낯선 기분이 들었다. 잘 어울릴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지 염려도 되었다.

“그분, 걱정하시는구나?”

“조금은? 아무래도 성장 환경이…….”

“오빠랑 비슷해서 동병상련을 느끼시는 거예요?”

“……그런 것도 없진 않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분은 앞으로 충분히 행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한서진은 묻고 싶었다. 정말 이미지가 어울려서 홍보 모델 제안을 한 게 전부냐고. 다른 뜻은 없냐고.

하지만 해맑은 표정에 대고 차마 그런 질문을 꺼낼 순 없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

헐레벌떡 뛰어오던 한지혜는 약간 어색한 분위기를 느끼고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가볍게 헛기침을 내뱉은 한지혜는 사근사근 웃으며 말했다.

“배고픈데, 저녁부터 먹으러 갈까?”

============================ 작품 후기 ============================

후기력이 0이 된 관계로 오늘은 후기를 적지 않겠스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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