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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36화 (236/609)

00236  비밀  =========================================================================

“허억! 헉!”

외마디 비명과 함께 한서진은 꿈에서 깨어났다.

폐가 터질 듯 호흡이 거칠었고,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그는 간신히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땀이 고인 손은 아직도 파르르 경련하고 있었다.

호흡과 맥박이 점점 가라앉는다. 그러나 팽창한 마음까지 진정되지는 않았다.

“그 왕이…… 나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줄곧 왕을 지켜봐왔으면서 왜 한 번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까. 마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의도적으로 판단 능력을 흐트러뜨린 것은 아닐까.

주먹을 꽉 쥐며, 그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신효진 씨가 왜?”

똑똑히 기억했다. 초상화의 왕비, 그녀는 분명히 신효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게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것은 그도 안다. 머나먼 차원이든 뭐든, 분명히 실존하는 세상이라 믿는다.

신효진이 왕비와 놀랍도록 닮은 게 과연 우연일까? 그렇게 인과관계가 간단할 리가 없다.

통찰안의 힘을 준 것은 꿈속의 왕.

그 왕은 또 다른 자기 자신이며, 왕비는 신효진이다.

‘내가 왕이고, 신효진 씨가 왕비라서 반려 판정이 떴나?’

한서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꿈의 비밀은 아직 밝혀낸 바가 없다. 에테르가 비밀의 열쇠가 되어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시도를 하기도 전에, 중대한 선택의 길로 앞에 떠밀어져 버렸다.

‘그래서 반려라고?’

“아직도 안 사귀는 거 같다고?”

백철중의 목소리는 제법 날카로웠다. 직원은 쩔쩔매며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인자하기 그지없던 회장이 온몸으로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었다.

“알고 지낸지 2년이 넘었고, 이제 하나도 성인인데, 아직도 안 사귄다고? 그럼 둘이 대체 뭐하고 있나? 대체 얼마나 더 썸을 타려고 그러는 건가?”

“죄송합니다.”

“아! 혹시 한 박사가 이미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해서 편안하게 대하는 건 아닌가?”

“거기까지는 저희도…….”

백철중은 끄응 하며 팔짱을 끼었다. 눈빛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한 박사가 이렇게 숙맥일 줄이야. 하긴…….”

사실 순수한 애정만 담보된다면, 대학생과 고교생이 연애하는 게 불법이나 흠은 아니다. 심지어 아비인 자신도 간접적으로 몇 번이나 허락했다.

그런데도 선뜻 손을 내밀지 않은 걸 보면 어지간히 신중하거나, 아니면 숙맥일 것이다.

백철중은 초조했다.

“그만한 사윗감도 없는데…….”

처음 한서진이 보잘것없는 평직원이던 시절, 딸한테 딴 마음 먹지 말라고 압박한 벌을 받는 것인가?

백철중은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때의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회장님. 그리고 이번에 H통신이 드디어…….”

“치우게. 지금 한 박사 때문에 골치 아픈 거 안 보이나?”

백철중은 손사래를 치며 돌려보냈다.

덕분에 그는 H통신이 최다 가입자수 돌파로 국내 1위 통신사가 되었다는 낭보를 조금 늦게 접했다.

「반려.」

한서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스치듯이 확인한 신효진은 여전히 반려 판정이 떴다.

이제는 그 이유를 안다. 신효진은 꿈속 세상에서 왕비이니까.

‘그 세상과 이곳은 어떻게 이어져 있는 걸까?’

꿈을 매개체로 이어져 있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구체적인 실체가 짐작가지 않는다.

먼 우주의 어느 행성일까? 아니면 다른 차원일까? 그도 아니면 머나먼 미래일까?

‘통찰안. 만약 내가 신효진 씨를 선택하지 않으면, 넌 어떻게 할 건데?’

통찰안은 의지가 깃든 영혼 따위가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깃든 능력일 뿐이다. 대답을 듣는 건 불가능지만, 그래도 그는 물었다.

만약 통찰안의 계시를 거부하면 녀석은 어떻게 될까? 설마 영영 사라져버리기라도 하는 건 아닐까?

그는 가식의 미소를 지으며, 자재 정리에 여념이 없는 신효진에게 말을 걸었다.

“신효진 씨, 얼굴이 무척 밝네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네? 아, 박사님.”

그녀는 급히 뒤를 돌아보며 시선을 낮췄다. 뺨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빨개졌다. 뭐가 그리 부끄러운 것인지, 한서진은 조금 호기심이 생겼다.

“그냥 어젯밤에 좋은 꿈을 꾸어서 그런가 봐요. 몸과 마음이 아주 상쾌해요.”

신효진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부끄러움이 가득한 몸짓, 여러 모로 송하나와는 정반대다.

불현듯 얼마 전에 보았던, 풀 메이크업을 한 그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영락없이 다른 사람인 줄 알았던 화려한 모습, 그 실루엣이 화장기 없는 지금의 얼굴 위로 겹쳐 보인다.

봉오리를 오므리고 있을 뿐, 아마 그게 그녀의 진짜 모습이겠지.

“난 또 오늘 신효진 씨 환영회 때문에 기분이 좋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

“앗, 당연히 그것도 있구요!”

“우리는 회식 문화 깨끗하니까 염려하지 말아요. 정 걱정되면 내 시선 닿는 곳에 앉아요.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해주죠.”

“아니에요, 우리 회사에는 그런 직원 분들 없는 걸요. 다 매너 좋으신 분들 뿐이에요.”

새 직장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하는 그녀의 태도는 한서진의 마음에도 뿌듯함을 남겼다.

업무가 모두 끝나고, 직원들은 예약한 회식 장소로 향했다.

내일은 금요일, 회사의 공식적인 휴무일이다. 주4일제를 택하고 있다 보니 직원들은 어느덧 불금보다는 불목이라는 말에 더 익숙해졌다.

“자, 오늘은 불목이니까 편히 먹고 마시고 일찍들 집에 들어갑시다. 내일 다들 가족 행사 있죠?”

한서진이 대표로서 인사말을 이어 나갔다.

“신효진 씨가 새로 입사했는데, 회사 일정이 바빠서 미처 환영회도 못했습니다. 자, 효진 씨. 한 식구가 된 걸 축하합니다.”

신효진도 즐거운 마음으로 건배를 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회식이 시작되었다.

동료 여직원이 속삭이듯이 물었다.

“효진 씨, 휴무일에 따로 알바한다며? 무슨 알바야?”

“아, 피팅 모델 같은 거예요. 아는 분이 소개해주셔서 하고 있어요.”

“정말? 대단하네. 하긴 효진 씨는 얼굴 예쁘고 늘씬하니까 모델 같은 거 해도 잘 어울릴 거야.”

“……저 별로 안 예뻐요.”

“에이, 효진 씨가 그런 말 하면 우리는 뭐가 돼요? 겸손보다는 차라리 거만 떠는 게 더 나아요. 걱정하지 말고 예쁜 척 하고 다녀.”

“그래그래, 회사 나올 때 화장도 좀 하고. 너무 수수하게만 다니는 거 아니야?”

“통합 설계팀 미혼남 중에 신효진 씨 좋아하는 사람 많은데, 내가 한 번 다리 놓아줄까?”

저번 직장의 첫 회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유쾌한 분위기였다. 사원들은 친근하게 건배를 부딪치면서도 예의를 지켰다.

술을 강권하는 분위기도 없었고, 꺾어 마신다고 누구도 타박하지 않았다.

도수가 낮은 맥주를 입에 대며, 신효진은 연신 한서진을 흘끔거렸다.

‘박사님…….’

좋은 일이 있냐고 묻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다시금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 없는 일이다.

다름 아니라 어제 꿈에서 드디어 리온과 키스를 했다. 촉촉한 입술이 부딪칠 때의 감촉을 떠올릴 때마다, 아직도 부끄러운 마음이 뜨겁게 팽창한다.

그의 얼굴을 훔쳐볼 때마다, 마치 그와 키스를 나눈 것 같은 두근거림이 비밀스럽게 밀려온다.

살짝 취기가 오른 박수진이 조용히 귓속말로 물었다.

“효진 씨, 설마 대표님 좋아해?”

“네? 아, 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효진 씨가 가끔 대표님 보는 눈길 보면 알겠던데. 좋아하지?”

“…….”

“어떡하니. 마음 같아선 응원해주고 싶어도, 엄청난 강적이 있는걸.”

“……저도 알아요. 욕심낼 마음 없어요.”

신효진은 조그맣게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 설렜던 감정이 가라앉고, 대신 차분한 체념이 그 자리에 차올랐다. 그녀에게는 매우 익숙한 감정.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주세요.”

“걱정하지 마.”

7시쯤 되자 회식이 끝났다. 한서진은 계산을 하기 전 목청을 살짝 높여 말했다.

“자, 회사 내규대로 1차로 끝냅니다. 따로 2차 가지 마시고 모두 집으로 가세요.”

“대표님, 그런 내규도 있었어요?”

“사내 관습헌법입니다. 회식은 무조건 1차로, 알겠죠?”

몇몇 직원들은 아쉬워했다. 친한 그룹끼리 2차를 가고 싶은 눈치였으나, 한서진은 완강하게 지시했다.

“그게 반복되다 보면 나중에는 원치 않는 직원들까지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일찍 들어가셔서 가족들과 함께 시간 보내세요.”

“알겠습니다.”

회식이 끝나고, 직원들은 택시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한서진은 택시를 찾아 나서는 신효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녀는 살짝 비틀거리고 있었다.

어쩐지 기분 좋다고 조금 많이 먹는 거 같더니.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신효진 씨.”

“아, 박사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 치자 그녀가 얼른 뒤돌아보며 웃었다. 살짝 취한 듯 보이지만 눈빛만큼은 또렷했다.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아직 술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보였다.

“집까지 제가 태워줄게요. 타세요.”

그녀가 미처 거절하기도 전에, 세단이 둘 앞에 섰다. 한서진은 뒷좌석을 열고 신효진을 태운 뒤, 자신도 반대편에 탔다.

둘이 타자 운전기사가 차를 출발시켰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경호 차량이 앞뒤로 따라붙었다.

앞좌석과 뒷좌석이 완전히 격리된 고급 세단, 조용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적합한 장소다.

“고맙습니다. 집까지 태워다 주시다니……. 근데 저희 집은 어떻게 아세요?”

“안 그래도 지금 회사 서버에 접속해서 사원 기록 조회하고 있어요.”

“아, 맞다. 사장님이셨지.”

신효진은 부끄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말하지도 않은 집주소를 안다는 것, 그 사실에 혼자만 살짝 들떴다.

“효진 씨는 혼자 산댔죠?”

“네, 그래요.”

“아버지는 요즘도 걱정 많이 끼치나요?”

“…….”

부친 이야기가 나오자 신효진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요즘 부친은 연락이 뜸했다. 그래서 한숨 돌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폭탄이 터질지 몰라 불안하기도 했다.

“미안합니다. 내가 괜한 걸 물었군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아버지 때문에 속 썩는 일 있으면 언제든지 의논하세요. 절대로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요. 그러라고 사장이 있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목구멍에서 치솟는 고마운 감정에 신효진은 어쩔 줄을 몰랐다.

한서진도 그렇고, 송하나도 그렇고. 이 커플은 어쩜 저렇게 천사 같을까.

‘나 따위는 절대로 낄 수 없어. 끼어서도 안 돼.’

짝사랑하는 감정을 들키는 것조차 그녀는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큰 은혜를 베풀어준 두 사람에게 괜한 심려를 끼치는 것은 배은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박사님,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

신효진은 가만히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는 뭔가를 몹시 망설이는 눈치였다.

무슨 일일까. 어떤 말을 하려고 저리 망설이는 것일까. 신효진은 몹시 궁금했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별안간 한서진이 이쪽을 돌아봤다. 강렬한 시선이 마주치자 신효진은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부끄럽게도, 그 눈빛에서 신효진은 리온을 떠올려 버렸다.

같은 사람이라고 밖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그 동질감은 깊고 짙었다.

그때 저 눈빛으로 자신에게 청혼을 건넸었지. 그녀는 가슴이 쿵쾅거리듯 뛰었다.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은 스칼린으로 돌아가 있었다.

“신효진 씨, 혹시 진짜 같은 꿈을 꿔본 적이 있습니까?”

두근거림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 작품 후기 ============================

어느 날 꿈에서 깨어나 울고 있는 실탄을 가엾게 여겨 편집자님이 물었습니다.

“무서운 꿈을 꿨나요?”

“아뇨.”

“슬픈 꿈을 꿨나요?”

“아뇨. 일주일 출판사와 독자분들의 격려를 받으며 유급 휴재를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달콤한 꿈이네요. 근데 왜 우시죠?”

실탄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네. 어여 마감하시죠.^^”

....작가의 눈물은 무기가 아니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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