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5 꿈과 현실 =========================================================================
“대의식의 성공으로, 폐하의 실체와 꿈속의 폐하는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눈을 감은 왕의 귀로 노신하의 힘 있는 음성이 내려앉았다.
보이지 않는 마력의 폭풍이 사방을 휘어 감고, 지진이라도 밀려온 듯 대전이 거세게 흔들렸다.
“꿈속의 폐하가 이곳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은, 폐하 또한 꿈속의 자신을 불러올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왕은 눈을 감은 채로 의식의 심층을 관조했다.
끝없이 뻗은 심연의 어둠 속에서 다른 의식에 연결된 흐름을 더듬었다. 의식이 맞닿아 있는 그곳을 찾았다.
이미 수없이 실패한 의식 접촉이다. 그럼에도 왕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이번은 뭔가 달랐다. 심연의 어둠 너머로, 뭔가 희뿌연 선의 통로가 보인다.
왕의 의식은 그것을 향해, 있는 힘껏 손을 내뻗었다.
―그것을 놓지 마십시오, 폐하.
노신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멀게 울린 그 순간, 의식의 심층이 일제히 반전했다.
한가한 오후.
사무직원들은 목소리를 낮춘 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신효진은 그 무리에 끼지 않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어제 꾸었던 꿈이 생각나자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그걸 귀신같이 알아차린 박수진이 물었다.
“효진 씨,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왜 자꾸 실실 웃어요? 좋은 일 있으면 우리도 알려줘요. 같이 웃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거 딱 남자친구 생긴 표정인데. 내가 그 심정을 알죠.”
옆에서 동료 직원이 장난처럼 한 말에 신효진은 화들짝 놀랐다.
“남자친구라니요!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수상해.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랬는데.”
동료들은 깔깔거리고 웃었다.
신효진은 붉어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부끄러운 마음에 열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남자친구라니…….’
남자친구는 아니다. 정확히는 약혼자가 생겼다.
꿈에서.
‘부끄러워서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해?’
그녀는 결국 리온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둘은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고, 동료들은 둘의 언약을 축하해주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리온은 ‘스칼린’의 가문, 인맥, 재산 등 일절 물어보지 않았다. 심지어 나이조차 묻지 않았다.
―귀하는 그 자체로 내게 귀중한 사람이오. 그 외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소.
‘약혼자’의 속삭임을 떠올리자 얼굴이 다시 또 새빨개진다. 그와 함께 보낸 즐겁고 다정한 시간을 떠올리자, 가슴에 행복한 마음이 절로 고인다.
포렌 산악지대를 통과하자 사금이 가라앉아 있다는 강을 발견했다. 신효진은 그게 바다가 아니라 강이라는 말을 듣고 까무러치게 놀랐다.
꿈속 세상, 광활한 마법의 대륙은 그처럼 이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절경으로 가득했다.
강바닥은 정말로 사금이 가득했다. 그리고 수중에는 무시무시한 괴어들이 살고 있었다.
그 괴어들 덕분에 사람들은 탐을 내면서도 사금을 쉽사리 얻지 못한 것이다. 물론 리온과 스칼린에게 그런 괴어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젯밤 그녀는 ‘약혼자’와 함께 사금을 풍성히 건지고, 강에 발을 담그고 장난을 치며 시간을 보냈다. 부드러운 분위기와 애정이 가득한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대표실에서 한서진이 나섰다. 사무직원들은 앉은 채로 꾸벅 인사했다.
“들어가세요, 대표님.”
신효진도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송하나와 함께 다정하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 어딘가가 얼얼하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면 제법 견딜 만했다.
현실에서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조차 송구한 자신.
그러나 꿈속에서는 누구보다 그가 사랑스럽고 소중히 대하는 약혼자가 아닌가.
‘아무리 생생해도 꿈은 꿈일 뿐이야. 나도 알아.’
달콤하기 그지없는 꿈이지만, 현실이 아니라는 것쯤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 꿈은 현실의 아픔을 달래주는 소중한 친구니까. 꿈속의 자신은 당당한 그의 약혼녀이니까.
이런 소박한 만족감쯤은 괜찮을 것이다.
재해 예보 사이트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첫날 접속자 수만 무려 8억 명을 넘어섰고, 일일 평균 접속자 수가 2억 명을 넘어섰다. 중복 접속을 제외한, 순수한 접속자 수만 따진 결과였다.
사람들은 서버가 폭주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접속자 수에도 불구하고 사이트는 건재했다. 아주 작은 지연조차 없었다.
SJ사이트에서 처음으로 공표한 재해는 미국 플로리다 지역의 폭우였다. SJ사이트는 일주일 뒤 큰 폭우가 찾아오며, 나흘 넘게 끊이지 않을 거라 예보했다.
주정부는 즉각 폭우를 대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SJ사이트는 일반적인 기상 예보가 아니라, 자연재해의 범주에 들어가는 규모만 예보한다. 당연히 폭우의 규모는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정확히 일주일 뒤, 폭우가 찾아왔다. 배수로가 막히고 도로에 물이 넘쳐날 정도로 큰 폭우였다.
단단히 준비를 했지만 폭우의 피해를 완전히 줄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미리 알고 일주일 동안 대비한 덕에 주민의 피해는 적었다.
―역시 한 박사다. 놀라워.
―정확한 날짜에 폭우가 찾아와서 정확히 그치네. 이제 미국은 자연마저 지배하는 건가?
정확한 예보에 전미가 들고 일어나서 한서진을 찬양했다. 플로리다 주지사는 기자회견을 통해 한서진에게 공개적으로 감사 의사를 밝히고, 따로 감사패를 전했다.
그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24시간 풀가동하기에는 아직 충분하지 않네.’
한서진은 타르타로스를 들여다보며 인상을 썼다.
미스릴 반도체, 케르베로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컴퓨터나 다름없다. 타르타로스는 그런 반도체 컴퓨터 일만 개를 엮어서 구축한,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성능의 수퍼컴퓨터다.
기존의 수퍼컴퓨터를 권총이라 하면, 타르타로스는 핵탄두에 빗댈 수 있으리라.
그런 타르타로스로도 지구 전 지역의 에테르 흐름을 24시간 분석하는 것은 무리였다. 한반도와 북미, 이 정도가 한계였다.
‘에테르의 정보량은 무궁무진하구나. 타르타로스로도 버거울 줄이야.’
한서진은 잠시 타르타로스의 하드웨어 업그레이드를 생각했다.
‘그러면 OS세팅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데. 그걸 또 어느 세월에 다 해.’
그는 마음속에서 조용히 업그레이드 계획을 치워두었다. 일단은 보류다.
메일함에 보고서가 도착했다고 알람이 깜빡거렸다. 그는 보고서 내용을 확인했다.
「전용기 구매에 관한 중간보고」
제목을 확인하고 내용을 읽어가던 중 그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스마트폰을 들었다.
“미스터 칼, 접니다. 한서진입니다.”
「아, 한 대표님. 혹시 제가 보낸 메일 때문에 전화를 주신 겁니까?」
“네, 그래요. 이게 사실인가요?”
「그렇습니다. 마침 매물이 나왔습니다. 갓 만든 새 항공기를 바로 받아보기는 쉽지 않은데, 정말 운이 좋았어요. 제가 나열한 모델들을 사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대표님의 입맛에도 딱 맞는 기종들입니다.」
칼 루이스가 제시한 항공기 매물은 두 종류였다.
걸프스트림 중형 제트기와 초대형 여객기 A380.
「걸프스트림은 국내용, 혹은 인접국을 오갈 때 쓰시기에 편할 겁니다. 그리고 A380은 장거리 여행에 쾌적하죠. 대표님이 마음만 먹으면 새것을 즉시 받아보실 수 있는 겁니다. 단 하루라도 빨리 결정을 해주셔야 합니다. 다른 매수자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요.」
두 모델은 주문 제작을 완료했음에도 매수인이 인수를 거절하는 바람에 허공에 붕 뜨게 되었다. 약간의 커스터마이징 작업만 거치면 얼마 걸리지 않아 받아볼 수 있다.
한서진은 망설이지 않고 결정했다.
“구매하겠습니다.”
「탁월한 결정이십니다. 그리고 말 나온 김에 전용 헬기도 별도로 구매하시는 게 어떨까요? 아무래도 집에 활주로가 없으시니 국내 공항에 두고 이용하셔야 할 텐데, 매번 자동차로 이동하기에는 교통 체증이 심하지 않습니까? 메일에 첨부했습니다.」
“……헬기도 구매할게요. 3번 모델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문제없이 준비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으면서 한서진은 왠지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집에 활주로가 없으시니, 그 말이 왜 이렇게 공허한 메아리를 울릴까.
한서진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였다. 타르타로스에서 파지직거리는 스파크 튀기는 소리가 났다. 그는 흠칫 놀라서 돌아보았다.
“갑자기 왜 저래?”
타르타로스의 주변을 둘러싼 에테르가 요란하게 파동을 치고 있었다. 그 진동폭은 크지 않으나 떨림의 반복 속도가 엄청났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종류의 흐름이었다.
당황해서 타르타로스에게 다가가려는 그 순간이었다. 주모니터에서 엄청난 흡입력이 자신을 잡아당기는 걸 느꼈다.
“으아악!”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긴?’
한서진은 정신을 차렸다. 주위를 돌아보고 싶었으나 시선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 다시 그 꿈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시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딘가를 걷는다. 뒤를 따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간혹 무어라 대화소리가 들리지만 발음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언어였다.
시야를 공유하는 인물이 향한 곳은 어느 대저택이었다.
정원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고, 하늘에는 용을 탄 기사들이 감시를 하듯이 순찰했다.
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가 다가와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한서진은 기사의 눈동자에 비친, 시야를 공유하는 인물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 왕이다.’
확실해졌다. 자신은 그 꿈속의 왕의 눈을 통해 이 세상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왕이 다시 걷는다.
한서진은 왕이 보고, 듣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반대로 왕의 시선을 강제하지는 못했다. 왕이 느끼는 감각정보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할 뿐이다.
왕은 화려한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시종들이 조용히 문을 좌우로 열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고민을 하는 듯 시선이 불안정했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 듯, 왕이 발걸음을 떼었다. 한서진의 의식도 왕의 시선을 쫓았다.
그곳은 침실이었다. 중앙에는 금은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침대가 있었다.
열 명이 누워도 넉넉할 듯이 큰 침대에는, 소박한 장식의 실크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누구지?’
이상했다. 여자의 얼굴이 어딘가 몹시 낯익었다.
왕은 물끄러미 잠든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한서진은 이 순간 왕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너무 궁금했다.
애정을 품은 표정인지, 애잔함을 담은 눈빛인지,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다른 마음인지.
왕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나 움직임도 없이,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서 내려다보기만 했다.
잠든 여자의 얼굴은 희고 갸름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이 여자의 매력을 한층 강렬하게 다듬어준다. 눈을 감고 있어도 대단한 미인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혹시 왕비인가?’
한서진은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왕의 시선을 따라, 여자의 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봤다.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낯이 익지만, 눈을 감고 있어서 더 이상은 확인이 어려웠다.
왕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벽에 걸린 거대한 초상화였다.
초상화에는 왕과 왕비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림이 아니라 사진으로 촬영한 듯이 생생하고, 정밀했다.
화폭 속 두 사람의 모습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밝게 웃는 왕비의 눈동자는 무엇보다 아름답고, 행복해 보였다.
멍하니 그림을 바라보던 한서진은 불현듯 벽돌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의식만 남아 있음에도, 가슴이 갑갑하게 조여 왔다.
그 이유는 바로…….
‘신효진 씨?’
어찌나 놀랐는지,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정지해버린 듯했다.
겨우 정신을 수습했을 때, 한서진은 시야가 완전히 반전된 것을 느꼈다.
‘자, 잠깐?’
놀랍게도 왕이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왕에게 빙의된 듯이 그의 시선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자신은 그의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왕의 시선은 더 이상 왕비도, 초상화도 보고 있지 않았다.
깊이 가라앉은 눈빛은 다름 아닌 자신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왕이 한 걸음 내딛었다.
“그대는 노예가 아닌, 세상의 유일한 군주다. 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가?”
신비하게도, 그의 말이 똑똑히 귓가에 닿고 있었다. 처음 듣는, 알지 못하는 발음과 문법. 하지만 그 의미가 뇌리에 분명히 새겨지고 있었다.
“눈을 들어 짐을 똑똑히 보라.”
왕이 다시 말했다. 한서진은 놀라서 굳어버린 채, 왕의 얼굴을 홀린 듯이 주시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왕의 얼굴이 이상하리만치 낯이 익다는 것을.
바보같이, 왜 한 번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을까? 왜 지금까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걸까? 내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게 아닐까?
‘잠깐, 닮았어. 아니, 똑같아. 왕은…….’
그의 시선이 더듬더듬 왕의 눈동자를 향했다. 왕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푸른 각막에 비친 자신, 왕이 보는 자신은 바로 눈앞의 그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활주로 성애자가 이렇게 또 여러분들의 딱지를 강탈하러 왔습니다.
다음 편에 또 딱지 수거하러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