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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33화 (233/609)

00233  꿈과 현실  =========================================================================

꿈에서 깨어난 뒤 왕은 오래도록 침묵했다.

가끔 꿈의 내용에 충격을 받을 때면 으레 말이 없곤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전과 전혀 달랐다. 왕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고, 꽉 쥔 주먹은 부르르 떨렸다.

꼬박 하루가 저물 때까지 왕은 일절 말이 없었다. 시종을 드는 이들은 그런 왕의 반응을 걱정스러워했다.

대관절 저주 속 세상에서 어떤 일을 겪었기에, 왕이 저리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폐하.”

노신하가 찾아와서 고개를 조아렸다. 꿈에서 깨어난 오늘 하루 동안 벌써 세 번째로 청하는 알현이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왕은 마침내 눈을 떴다.

“꿈에서 왕비를 봤소.”

노신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주름진 얼굴에 경악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것이 정녕 사실이옵니까, 폐하? 왕비를 닮은 여인이 아닌, 왕비를 본 게 확실하옵니까?”

“확실하오. 짐이 어찌 왕비의 얼굴을 착각할 수 있겠소.”

왕은 다시 눈을 감았다.

아련한 기억이 오래 전의 추억을 더듬는다. 풋풋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미소가 떠오른다. 그것은 쓰디쓴 아픔을 가득 담고 있는 웃음이었다.

“짐이 청혼하던 그때 그 시절, 영락없이 그 모습이더군.”

감긴 눈썹이 과거를 회상하며 파르르 떨린다.

수줍게 청혼을 받아들이던 왕비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가슴에 남아 있다.

심장 언저리가 저릿해진다.

눈을 뜬 왕은 천천히 노신하를 돌아보며, 경직된 목소리로 물었다.

“설명해 주시오. 어째서 왕비가 꿈에 나타난 거요?”

신효진은 꿈에서 깼다.

멍하니 어둠 속의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별안간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거기서! 깨면! 어쩌자는! 거야!”

재미있는 영화를 감상하던 중 클라이맥스에서 정전이 돼도 이 정도로 안타깝지는 않을 것이다. 벌떡 상체를 일으킨 신효진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온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뿜어냈다.

“안 돼! 다시 자야 해!”

신효진은 얼른 누운 채로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양을 세며 잠을 청했다.

‘양이 103마리, 양이 104마리…….’

이상했다. 어째서 세면 셀수록 정신이 더욱 또렷해지는 걸까?

‘양이 1,501마리, 양이 1,502마리…….’

어느덧 머릿속 목장에는 천 마리가 넘어가는 양이 가득 뭉쳐서 시끄러운 울음소리를 냈다. 그래서인지 정신만 더 선명해진다.

“아아악! 잠이 안 와!”

신효진은 다시 벌떡 일어나 머리를 움켜쥐었다. 잠들어야 하는데! 왜 하필 거기서 꿈이 딱 깨버리느냔 말이다.

“효진 씨, 얼굴이 왜 그래요?”

사무지원팀 동료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신효진은 퀭한 눈으로 대답했다.

“어제 잠을 설쳤어요.”

“저런, 악몽이라도 꿨어요?”

“아뇨, 엄청 좋은 꿈이었어요.”

“……근데 왜요?”

“제일 좋은 순간에 깨는 바람에 안타까워서 다시 꾸려다가 잠도 못 자고 설치기만 했어요.”

“저런, 아쉬웠겠네요.”

동료는 대수롭지 않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마 그녀는 절대로 모를 것이다. 자신이 꾸는 꿈이 얼마나 생동감이 넘치고, 또 중독성이 있는지.

신비한 마법의 대륙에서 산도 뒤집는 힘을 지닌 여전사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꿈, 그게 얼마나 짜릿한지 절대 모를 것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사무소에 들어선 한서진은 눈이 마주치는 직원들마다 일일이 인사를 건네며 대표실로 향했다. 신효진도 그와 눈이 마주치고는 꾸벅 목례를 했다.

옆에서 동료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효진 씨,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 어디 열이라도 나요?”

“네?”

신효진은 얼른 거울을 확인했다. 그 말대로, 얼굴은 물론이고 귀밑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그녀는 기겁했다. 설마 박사님이 이걸 본 건 아니겠지?

“열나나 보다. 아프면 조퇴하고 일찍 들어가는 게 어때요?”

“아니에요. 잠깐 더워서 그런가 봐요.”

신효진은 손부채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로 나선 그녀는 공용 화장실로 향했다.

어차피 화장도 안한 얼굴, 그녀는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화끈거림이 다소 가라앉자 그녀는 가만히 거울을 주시했다.

물기 묻은 뺨과 젖은 머리카락, 화장기 없이 청초하지만 이목구비는 또렷하다.

“나도, 못난 얼굴은 아닌 거 같은데…….”

가만히 중얼거리던 그녀는 문득 한서진을 떠올렸다. 동시에 귓가를 스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귀하는 나의 반려로서 적합한 유일한 여성이오.

얼굴이 삽시간에 다시 빨개진다.

만약 꿈이 아니라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들었다면 어땠을까.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멈추지는 않을까.

그녀는 화장기 없는 거울 속의 자신을 주시하다가 가만히 입술을 매만졌다.

“그냥 꿈이니까…… 이 정도까지는 괜찮겠지?”

꿈에서 맛보는 약간의 자기만족. 이만큼의 욕심은 허락해도 괜찮겠지?

“어째서 왕비가 꿈에 나타난 거요?”

왕비는 친정인 카르쉬라이 가문의 저택에 연금되어 있다. 가문이 반역을 행한 이후 줄곧 저택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확히는 연금이 아니라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를 못하는 몸이다.

왕은 떨리는 음색으로 말했다.

“왕비는 분명 의식불명일 텐데…….”

“…….”

노신하는 고개를 숙였다. 무거운 분위기가 그의 로브를 타고 흘렀다. 숨을 막히게 하는 끈적끈적한 적막감이 대전에 고요히 부유했다.

한참 후 노신하가 드디어 얼굴을 들었다.

“리미트리스 드림은 알려진 바가 극히 드문 고대의 저주, 신이라 해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

“다만 고대 문헌에 저주의 발동 형태가 꼭 한 가지는 아니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발동 형태가 한 가지가 아니다?”

“피시전자를 영원한 악몽에 잠기게 하여 영혼을 소멸시키는 결과는 동일하지만, 저주의 발동, 전개, 과정이 전부 같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시전자의 역량이나 발동 수단, 그리고 피시전자의 항마력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나올 수 있습니다.”

노신하는 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카르쉬라이 가문은 왕비를 제물로 이용해 폐하께 고대의 저주를 걸었습니다. 그 결과, 왕비는 깨어나지 않는 잠에 빠지게 되었지요.”

모두가 카르쉬라이 가문을 멸하라 청하는데도 왕이 결정을 보류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왕비의 친정 가문이 저주를 건 것은 확실하나, 그 주체가 누군지는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왕비가 저주에 참여했는지, 희생양인지, 참여했다면 단순 가담인지, 아니면 적극적인 주모인지,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었다.

당시 가문의 주요 인사들은 멸문을 각오하고 자결을 해버렸고, 통찰안은 그들의 시신으로부터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왕비가 의식을 차린다면 통찰안으로 왕비가 아는 진실을 취득할 수 있겠으나, 왕비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었다.

노신하는 단정 짓듯이 말했다.

“왕비는 바로 자신의 영혼을 매개체로 하여 폐하께 저주를 건 것입니다. 즉 영혼을 폐하의 꿈속과 동기화한 것이지요.”

“영혼을 매개체로…….”

왕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그동안은 제물을 어떤 식으로 활용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왕비가 줄곧 의식불명인 것을 보고 조금은 의심했었습니다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허나 이제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결정적인 증거라면…….”

“폐하의 꿈속에 나타난 것이지요. 왕비의 영혼은 폐하의 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노신하는 차분히 청했다.

“저주의 꿈속에서 왕비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신에게 말해 주소서.”

“알겠소.”

왕은 목청을 가다듬고, ‘한서진’과 ‘신효진’이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노신하는 경직된 얼굴로 왕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고 귀담아 들었다.

설명이 끝났다.

“꿈속의 왕비는 레노지안의 모든 기억을 잃었군요. 마치 처음 저주에 걸렸을 때의 폐하와 같습니다.”

“그 말은, 왕비 역시 그때의 짐과 동일한 상황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결과적으로 왕비는 폐하와 자기 자신에게 리미트리스 드림을 걸게 된 것이지요. 자신의 영혼을 제물로 바쳐서 말입니다.”

왕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왕비가 모든 기억이 있으면서 꿈속에서 짐을 속이고 있을 가능성은 없소?”

“만약 폐하를 농락하기 위해 임의로 꿈의 내용을 비틀었다면, 왕비는 아마 폐하를 연모하는 그 귀족가의 소녀의 역할을 차지했을 겁니다. 그게 훨씬 쉬운 길이니까요.”

꿈에 개입할 수 있다면 신효진이 아닌 송하나의 위치를 택했을 거란 이야기다. 왕은 그 말에 납득했다.

노신하는 오른손을 펼쳐서 들어올렸다. 희뿌연 빛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두꺼운 책이 나타났다.

노신하는 고문서를 빠르게 펼치고는 어느 부분을 확인했다. 저주에 관한 기록이 적힌 장이었다.

“피시전자의 꿈을 시전자가 공유하는 형태…… 저주의 형태 중 가장 강력하면서도, 동시에 시전자가 가장 꺼리는 형태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을 희생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오?”

“그렇습니다, 폐하.”

왕비는 스스로를 제물로 삼았다. 그 사실이 뜻하는 암담함에 왕은 주먹을 꽉 쥐고는, 경직된 음색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왕비가 면책될 길은 없는 거요?”

“왕비는 고결한 영혼을 지닌 여인, 타인의 강압으로 자기 영혼을 바쳐 저주를 시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왕비 스스로가 저주의 발동을 원했기에 이 모든 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든 정황은 하나의 사실을 증명한다.

왕비는 가문의 대의에 희생된 게 아니다. 저주의 시전, 즉 카르쉬라이 가문의 반역을 주모한 것은 왕비라는 것.

왕비가 바로 주범이다.

“그러나 왕비를 해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왕비를 즉시 대전으로 데려와서, 상시 폐하의 옆에 두고 보호해야 합니다.”

“어째서요?”

“폐하와 왕비의 영혼은 저주의 힘으로 묶여 동일한 거짓을 공유합니다. 왕비가 죽거나 다치면 저주는 더욱 빠르게 완성될 것입니다. 그 즉시 종결될지도 모릅니다.”

왕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꽉 쥐었다. 이 가슴 어딘가에 왕비의 영혼이 들어 있다니.

“근위단장은 들어라.”

“예, 폐하.”

그늘 속에 없는 듯이 서 있던 근위단장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으며 경의를 취했다.

“지금 즉시 카르쉬라이 백작가로 가서 왕비를 데려와라. 절대 다치지 않게 해야 한다.”

“명을 받듭니다.”

근위단장은 순식간에 대전을 벗어났다.

노신하는 고문서의 어느 한 부분을 손으로 짚었다. 투영 마법이 발동하며, 그가 짚어낸 부분을 왕이 볼 수 있게끔 허공에 비추었다.

“이것은 리미트리스 드림의 발동 형태 중 가장 강력한 종류지만, 반대로 치명적인 약점 또한 있습니다.”

투영 마법은 고문서의 내용을 또렷이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알려진 방법은 폐하가 스스로 그곳을 부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저주는 힘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왕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한서진과 신효진, 둘 중 어느 쪽이라도 그곳을 부정한다면, 저주의 힘은 소멸한다.

“왕비가 그곳을 부정하게 만드는 게 훨씬 쉬울 거라 생각됩니다, 폐하.”

============================ 작품 후기 ============================

레노지안 입장에서는 꿀 빨고 있는 한서진 쪽보다 신효진 쪽을 공략하는 게 더 쉽겠죠.ㅋ

쪽대본 나와서 힘겹게 겨우 촬영했습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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