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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32화 (232/609)

00232  꿈과 현실  =========================================================================

“논문 게재는 잠시 미루게 됐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한서진은 덤덤히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송하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뭐가 잘못됐나요?”

“그런 건 아니고, 학교 이과지에 게재하는 건 너무 무심한 거 아니냐고 니트론 교수님이 항의하셔서. 일단 좀 권위 있는 학술회에서 먼저 발표하는 식으로 할까 해.”

“아아, 그렇군요.”

한국대는 기초과학 분야에서 국제적인 권위가 굳건한 대학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방침을 변경했다.

송하나가 즐거운 듯이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맞다. 축하드려요. 포브스 기사 봤어요.”

“아아, 그거?”

“1조 달러의 남자가 되셨잖아요. 대단해요.”

한서진은 내키지 않은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 그거 좀 웃기더라. 상장도 안 했고 거래도 일어나지 않는 주식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멋대로 5천억 달러니 1조 달러니 평가하는 게.”

오늘 포브스에서는 미국 명예시민 한서진의 지난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특히 재산 내역에 관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작정하고 파고들었다.

물론 L국을 이용한 조세처리 등 민감한 부분은 한서진의 명예를 생각해 다루지 않았지만.

아무튼 기사에서는 한서진의 개인자산 평가액을 1조 달러로 잡았고, 덕분에 그는 또 한 번 유명세를 탔다. 세계 부호 순위에서 2위와 너무 압도적인 격차였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점은 대부분의 자산이 86.5%에 달하는 SJ인더스트리의 주식이라는 사실이다.

SJ인더스트리의 기업가치가 세계 최고인 점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지만, 자본금 3억 달러의 회사를 놓고 이건 5천억 달러짜리니 1조 달러짜리니 하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우스웠다.

‘자본주의가 원래 그렇다고 하니 뭐.’

이러다가 SJ인더스트리가 몇 번 사업 말아먹으면 기업가치 평가액이 뚝 떨어질 테고, 자신의 재산도 줄어들 것이다. 정작 자신의 생활이 변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곧 여름인데, 또 놀러 가실 거죠?”

“지혜랑 같이?”

짐 덩어리를 추가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하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다고 다 큰 남녀 둘이서 갈 수는 없잖아요.”

“…….”

“전 언니도 같이 가니까 재미있던데. 이번에는 해외로 가는 게 어때요?”

다 큰 남녀. 듣기 묘한 말이다.

작년에는 미성년자라 안 됐고, 이번에는 다 커서 안 된단다. 그 말은 마치 자신에게 어떤 결정을 촉구하는 것처럼 들렸다.

‘반려만 아니면 정말.’

한서진은 보이지 않게 주먹을 살짝 쥐었다.

적합만 떴어도 그는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강한 반려 판정이 떴고, 그는 아직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통찰안의 계시를 반하는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백화점 홍보 모델 일을 한다고 특별히 세상이 격변하지는 않았다. 신효진은 평일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사무소에 출근했고, 쉬는 날에는 모델 일을 했다.

송하나는 촬영에 직접 동행했으며, 자신이 나오지 못할 때면 비서를 붙여 주었다. 고급 세단을 타고 스튜디오를 오갈 때면, 신효진은 자신의 신분이 상승한 듯한 묘한 설렘을 느끼곤 했다.

사무소에서는 그녀가 홍보 모델 일을 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긴, 자신이 보기에도 ‘모델 신효진’일 때와 ‘사무직 신효진’일 때의 격차가 너무 컸다.

‘이건 진짜 우리 엄마도 못 알아볼 거야.’

못난 얼굴은 아니다. 오히려 이 정도면 제법 봐줄 만하지 않을까 생각해왔다. 그래도 의상과 메이크업만으로 이렇게 사람이 달라 보일 수 있다니.

사진 속의 자신은, 스칼린 못지않은 근사한 미녀였다.

사진작가도 그 점을 늘 칭찬했다.

“촬영 한 번도 안 해봤다고 해서 사실 조금 걱정했는데, 신효진 씨는 대단한 재능이 있어요. 카메라 앞에서 전혀 위축되지도 않고 자연스러워요. 렌즈만 들이대면 사람이 달라진다니까.”

“……감사합니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평상복 차림일 때는 예쁘기만 한 여자인데, 메이크업을 전부 갖추고 카메라 앞에 서면 또 다른 신효진이 나온다고 할까요?”

그 말에 신효진은 조금 뜨끔했다.

피사체가 어떻게 비춰지는지 관조하는 것은 그녀에게 매우 익숙한 일이었다. 스칼린이라는 세상에서 완벽한 피사체를 매일 관람하고 있으니까.

광활한 마법 대륙을 무대로 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그녀는 매일 주인공이 된다. 그런 경험을 무수히 겪은 그녀에게 화보 촬영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상이 격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달라진 점은 있었다.

“세상에, 이게 대체 얼마야.”

통장에 찍힌 돈을 보며 그녀는 입을 가리고 놀랐다.

백만 원에서 시작한 일당은 어느덧 이백만 원이 되었다. 겨우 몇 시간 사진을 촬영하고 받는 돈이다. 모델인 걸 감안하면, 이 정도면 업계 최고 수준의 대우라고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루 촬영을 마치고, 신효진은 코디에게 부탁했다.

“저기, 메이크업은 안 지우면 안 돼요?”

“네?”

“간만에 화장 잘 먹었는데…… 분위기 좋은 곳에서 기분이나 좀 내보려고요.”

“아하, 그러세요.”

코디는 웃으면서 적당한 의상을 골라 주었다. 지금 입고 있는 의상은 너무 화려해서 고급 파티장에서나 어울릴 디자인이었다.

“의상과 가방은 내일 돌려주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드레스까지 빌려주다니. 생각지도 못한 친절에 신효진은 참으로 기뻤다.

‘박사님께 보여드리고 싶어.’

닿지 않을 짝사랑일 뿐이다. 욕심은 없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고 못나다고만 생각한 자신에게도 이런 예쁜 모습이 있다는 것을, 그저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신효진은 서둘러 사무소로 향했다. 한서진은 직원들이 회사 휴일에도 사무소에 나와 일을 처리한다. 사무소일 뿐만 아니라 학업 등 다른 일도 처리하는 것 같다.

빨리 가면 지금 마주칠지도 모른다. 다행히 오늘은 송하나도 오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빌딩을 향해 또각또각 걸었다. 주변에서 눈이 휘둥그레지는 시선이 느껴진다. 어떤 남자는 입을 헤 벌린 채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몰래 찰칵, 옆모습을 찍는 게 느껴졌다.

명백한 도촬, 분명히 불쾌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기이한 자신감이 가슴에 넘쳤다. 경탄이 가득한 사람들의 시선이 뿌듯했다.

“우리 빌딩에 입주한 회사 직원 중에 저런 여자가 있었나?”

“어디 회사 사람이지?”

수군거림을 태연히 흘러 넘기며,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사람이 내리다 말고 자신을 보고 순간적으로 흠칫 했다. 그 당황한 표정이 몹시 흡족했다.

당당히 엘리베이터에 탄 그녀는 슬쩍 벽면 거울을 확인했다.

거울 속의 자신은 낯설 정도로 화려했다. ‘사무직 직원’이 아니라 ‘모델 신효진’이 그곳에 서 있었다.

자신감으로 가슴이 더욱 부풀어 올랐다. 평소에는 불편했던 힐이 지금은 발에 딱 맞은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최상층에 내린 그녀는 사무소에 들어섰다. 슬쩍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있다.

그녀는 살짝 헛기침을 하고는, 또각또각 자신의 책상을 향해 걸어갔다. 문이 끼이익 열리며, 한서진이 얼굴을 드러냈다.

“누구시죠?”

그는 자신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게 이런 것일까.

그녀는 웃음을 치며 살짝 목례했다.

“박사님, 회사에 계셨네요.”

“어, 신효진 씨?”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한서진은 그녀를 알아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180도 다른 모습에 그는 살짝 당황했다.

“오늘 회사 쉬는 날인데, 어쩐 일로 오셨어요?”

“제가 어제 중요한 걸 책상에 깜빡 주고 퇴근했지 뭐예요. 그래서 근처 지나다가 잠시 가지러 들렀어요.”

그러면서 신효진은 책상 서랍을 열고 눈에 보이는 조그만 물품을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됐다, 자연스러웠어.

한서진은 아하, 하며 끄덕였다.

“데이트 가시던 중인가 봐요?”

“아니에요. 저 남자친구 같은 거 없어요.”

“보고 진짜 깜짝 놀랐어요. 신효진 씨라는 거 상상도 못했네요. 이런 의외의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저는 메이크업이 익숙하지 않아서 조금 어색한데…… 이상하지 않아요?”

“안 이상해요. 정말 잘 어울립니다. 이렇게 차려입고 출근하면 회사 마비되겠는데요. 직원들이 일은 안 하고 모두 신효진 씨만 쳐다볼 거 같아서.”

신효진은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그의 눈빛에 떠오른 것은 분명한 감탄이었다. 회사에 오면서 봤던 다른 이들처럼 정신없이 빠져든 표정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모델 신효진’의 미모를 인식하고 있다.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오빠, 누구 왔어요?”

그때였다. 대표실에서 송하나가 걸어 나왔다.

순간 신효진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고, 그녀를 발견한 송하나는 반갑다는 듯이 웃었다.

“효진 씨? 회사에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오늘 회사 쉬는 날 아니에요?”

“뭐 놓고 간 게 있어서 잠시 들렀대.”

“아하, 그러시구나.”

어린아이처럼 화사한 웃음 앞에서, 신효진은 비에 젖은 병아리처럼 무참한 패배감을 맛봤다.

송하나는 화사하면서도 가벼운 나들이 차림이었다. 적당한 노출에 늘씬하고 볼륨감 넘치는 몸매를 드러낸, 딱 발랄한 대학생다운 차림.

겉모습만으로는 풀 세팅을 마친 자신이 더 나을지 모른다. 얼굴 역시 못할 것도 없다. 몸매의 차이가 심하지만, 그것은 스타일의 차이일 뿐이다.

“잘 됐다. 우리 곧 저녁 먹을 건데, 효진 씨도 같이 갈래요?”

그러나 저 환한 웃음.

모든 것을 가진 이만이 지닐 수 있는, 구김살 없이 밝고 여유로운 미소에서, 신효진은 그만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직시하고 말았다.

송하나는 온몸에서 빛이 났다. 옷차림 따위에 연연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화려한 색광이 넘치는 여자였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어떤가. 화장과 비싼 옷, 가방, 구두, 그리고 예쁜 얼굴. 그런 것으로 작고 보잘것없는 마음의 어둠을 억지로 가리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죄송해요. 저는 잠깐 들린 거라 빨리 가봐야 해요.”

신효진은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송하나가 어떤 눈으로 자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지, 차마 상상하기도 싫었다.

차라리 날 보는 눈빛에 조롱이 섞여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그녀의 환한 빛을 애써 폄하하려는 자기 자신이 너무 싫었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그녀는 주저앉으며 숨을 골랐다.

힐을 신은 발이 몹시 아파왔다.

“왜 표정이 그리 수척하오?”

리온이 부드럽게 물었다.

어깨를 웅크리고 있던 스칼린은 고개를 들어, 초점이 약한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초라한 현실이 떠올랐다. 송하나의 환한 빛에 주눅이 든 채, 그것을 질시하고 부러워한 자신. 그녀는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인데 대관절 왜 그랬을까.

“저는 가난해요, 리온.”

“…….”

“가난이 지긋지긋하고 싫었어요. 가난만 아니면 내가 행복해질 줄 알았어요. 근데 알고 보니 더 큰 문제는 가난보다는, 가난한 제 마음이었던 거예요.”

“귀하의 마음은 가난하지 않소. 오히려 대륙의 그 누구보다 부유하오.”

“그렇지 않아요! 당신, 당신은 몰라요! 제 진짜 모습을! 아마 알면 절 혐오하게 될 거예요! 이렇게, 이렇게 구질구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안 그런 척, 멋있는 척 하는 이중성이…….”

스칼린은 그만 말을 멈췄다. 별안간 그가 와락 끌어안은 것이다.

코앞에서 느껴지는 그의 호흡소리, 체온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만다. 구질구질함과 자기혐오에 찌들어 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편안해진다.

“나는 사람의 진실한 내면을 볼 수 있소. 귀하의 마음은 대륙 그 누구보다 넓고, 부유하오. 나는 알 수 있소.”

“……거짓말. 내가 그럴 리가 없어요.”

신효진은 리온에게 안긴 채 저도 모르게 울먹였고, 그럴수록 그는 더욱 부드럽게 보듬어주었다.

“지난 시간 동안 귀하와 여행을 하면서…… 몇 번이고 거듭 확인했소. 귀하는 대륙의 그 누구보다 강인하고 고운 마음씨를 가졌소. 날 믿으시오.”

“……정말인가요?”

울먹임은 어느새 잦아들었다.

리온은 가만히 얼굴을 뗐다.

그의 품을 벗어난 것은 아쉽지만, 그의 두 팔은 여전히 스칼린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귀하에게 청이 있소.”

“……청? 부탁이요?”

“귀하는 나의 반려로서 적합한 유일한 여성이오. 그러니 나와 결혼해주시오.”

============================ 작품 후기 ============================

“여기서 끊으면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어쩔 수 없어. 다음 화 대본이 아직 안 나왔는걸.ㅠㅠ”

실탄프로덕션은 오늘도 쪽대본 촬영에 허덕이고 있습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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