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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31화 (231/609)

00231  꿈과 현실  =========================================================================

“홍보 모델 해볼 생각 없나요?”

송하나는 친절한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고 권했다. 신효진은 살짝 혼란에 빠졌다. 전혀 뜻밖이었던 것이다.

“백화점 모델이요? 제가 그런 걸 어떻게…….”

“제가 보기에는 신효진 씨 이미지가 딱인데요. 재미삼아 한 번 해볼 생각 없나요?”

신효진은 머릿속이 살짝 패닉이 된 채 굳어 있었다.

홍보 모델이라니, 자신한테 그런 게 어울린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송하나가 자신을 놀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무명 신인이라 아마 일당은 백만 원 정도로 책정될 거 같은데, 여가 시간에 하기에는 괜찮은 부업일 거예요. 어때요, 생각이 있나요?”

“저기, 잠깐만요. 일당이 얼마라고요? 백만 원이요?”

신효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자신을 놀리는 건가, 그런 게 나한테 어울리기는 하나, 하던 생각이 깡그리 지워졌다.

일당 백만 원이라니. 비현실적인 금액에 그녀는 마음이 거세게 흔들렸다.

“근데 홍보 모델이면 중요한 자리 아닌가요?”

“중요하죠. 백화점의 간판이자 얼굴인데.”

“그런 자리를 마음대로 저한테 맡기실 수 있나요?”

“백화점이 저희 어머니 건데, 당연히 가능하죠. 제가 말 한 마디만 하면 돼요.”

“…….”

“며칠 지켜봤는데 신효진 씨 이미지가 딱인 거 같아서요. 어때요, 해볼래요?”

신효진은 잠시 대답을 주저했다.

‘백화점이 어머니 거라고?’

잠시 잊고 있었다. 송하나는 H그룹의 재벌 딸이었다. 소위 말하는 재벌 2세.

원래라면 이렇게 자신과 나란히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눌 신분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왕녀와 평민의 신분 아닌가.

송하나가 빙긋 웃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연락 주세요.”

H통신의 유레카 통신 서비스는 가입자 수 국내 2위의 고지를 달성했다. 단순한 2위가 아니라 1위를 바짝 뒤에서 추격하는 모양새였다.

변화를 꺼려하는 중장년층 이상의 고정 고객층이 아니었다면 벌써 1위를 내줬을 거라는 말이 있었다. 실제로 30대 이하의 젊은 층은 80% 이상이 유레카 통신으로 갈아탔다.

요금도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속도도 비교할 수 없이 빠르다. 품질과 가격에 민감한 젊은 층은 지속적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이 기세라면 올해 하반기에는 최다 가입자 수 달성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단말기를 와이파이 핫스팟이나 테더링 대용으로 사용하는 문제는, 그 경우 통신 속도를 다른 회사 수준까지 떨어뜨리는 것으로 해결했다.

“1차 목표는 모바일 통신 시장의 1인자가 되는 겁니다. 인터넷과 TV 시장은 차근차근 점령하려 합니다. 굳이 서두르지는 않으려 합니다.”

정상용의 자세한 보고에 백철중은 흡족히 끄덕였다.

“지금도 충분해. 너무 욕을 먹어가면서 사업을 할 필요는 없지, 암.”

“가정 인터넷은 TV와 동시에 출시를 해야 하는데, TV쪽은 충분한 컨텐츠 확보가 될 때까지 미루려고 합니다.”

“그래야지. TV라는 게 통신 기술만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은 아니니. 잘 생각했네.”

백철중이 너그럽게 넘어가자 정상용은 마음을 놓았다.

문득 백철중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칼라 통신망, 미국 시장 진출은 어찌 된다던가?”

“아직까지 SJ인더스트리의 주도로 조율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올해 안으로는 사업을 개시할 수 있을 것 같나?”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봅니다만, SJ인더스트리가 얼마나 큰 의지를 가졌느냐에 달렸습니다.”

“너무 큰 기업이라 나도 걱정되는군. 덩치가 크면 움직임도 둔해지는 법인데.”

세계 반도체 시장을 재패한 SJ인더스트리는 명실공히 가장 큰 단일 기업이다. 미국 통신 시장이 거대한 금광이긴 하나, SJ인더스트리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사업 추진 의욕이 떨어질 수도 있다. 백철중은 그 점을 염려했다.

“어차피 우리 소관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 됐으면 좋겠군.”

H통신은 어디까지나 국내 칼라 통신망 서비스만 담당한다.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다.

대형 미국 통신업체들의 로비를 당해낼 수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연방 정부와 주정부가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미국 법인이자 미국에 모든 사업의 기반을 두고 있는 SJ인더스트리는 다르다. 심지어 그 오너는 캘리포니아 대지진으로 미국 영웅이 된 한서진이다.

샌프란시스코 지진 당시, 존 캐롤 상원의원과 기적적으로 통화가 이뤄진 점 때문에 칼라폰은 현재 미국인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사업 진출은 시간 문제였고, 서비스를 개시하는 데로 돈을 쓸어 담을 것이다.

“통신업체들의 방해가 만만치 않은 듯합니다. 그들에게도 밥줄이 걸린 문제니까요.”

“뛰어난 기술이 널리 보급되면, 자리를 잃은 기술은 역사 뒤로 사장되는 법이지. 늘 그랬듯이.”

백철중은 냉정히 말했다.

석유가 보급되고 석탄업자들이 도산한 것처럼, 기술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참 기대된단 말이야. 어디까지 올라갈지.”

그는 흐뭇하게 웃고는, 테이블에 놓인 책자에 눈을 돌렸다. H백화점에서 발행한 백화점 소개 정식 간행물이었다.

간행물을 집어 들려다 말고 그는 멈칫 했다.

“모델이 바뀌었나?”

H백화점 홍보 모델은 30대 중반의 국내 톱스타 여배우가 5년째 독식하다시피 해왔다. 그런데 간행물 표지에는 낯선 여자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비서실장이 얼른 설명했다.

“이해란 배우가 이번 달을 기해 계약이 만료되는데, 이번에는 갱신을 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흐음, 이해란이가 그래도 괜찮았는데. 고급스러운 이미지에 관록도 있고, 우리 백화점 이미지하고도 잘 어울리고. 왜 갑자기 바꿨지?”

어차피 사업체는 처인 송지현의 것, 백철중은 다만 궁금했을 뿐이었다.

잡지를 들고 가까이 살핀 백철중은 가볍게 탄성을 냈다.

“호오, 예쁜데?”

“예, 그룹 홍보실에서도 모델을 기가 막히게 선정했다고 감탄하고 있습니다.”

“신인인가?”

“아마 그런 것으로 압니다. 활동 프로필이 전혀 없습니다.”

표지를 넘기자 몇 장의 화보가 추가로 나왔다. 백철중은 그것들도 자세히 살피며 감탄했다.

“정말 예쁘군. 이해란이와 계약 갱신하지 않을 만해. 훨씬 나아. 어디서 이런 모델을 구했지?”

“기가 막히게 잘 나왔어요. 최고입니다.”

사진작가가 엄지를 척 올리며 연신 칭찬했다. 신효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짧은 원피스를 본능적으로 이리저리 잡아당겼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맨살을 드러내고 있으니, 뭔가 부끄러운 기분이다.

화보 촬영은 어렵지 않았다. 사진작가는 내내 웃음을 지우지 않았고, 몹시 친절했다.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 하나 그녀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마치 공주님을 떠받들어주듯이 공손하고, 상냥했다.

신효진에게는 낯설기만 한 과잉 대우였다. 사람들한테서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수고했어요.”

송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녀는 웃음을 가득 머금고 칭찬했다.

“정말 예쁘시네요. 옷도 몹시 잘 어울리고, 분위기도 살아 있어요. 초심자 같지 않아요.”

“그렇지요? 저도 촬영 작업하면서 내내 감탄했습니다. 송하나 양의 안목은 역시 대단합니다.”

“작가님, 오늘 더 촬영이 있나요?”

“이제 끝입니다.”

“그럼 우리 효진 씨, 제가 이만 데려가도 되죠?”

“어이고, 그럼요.”

사진작가는 송하나 앞에서 연신 굽실거렸다. 이 자리에서 그녀가 백화점 사장 송지현의 딸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저, 저는 옷 갈아입고 올게요.”

신효진은 부끄러워하며 후다닥 탈의실로 향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그녀는 거울을 바라봤다.

몇 시간을 공들여 화려하게 꾸몄는데, 정작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감상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아.”

그녀는 거울을 보자마자 얼빠진 소리를 냈다.

거울 속에는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저것은 신효진도, 스칼린도 아니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신효진이었다.

은은한 웨이브를 넣어 볼륨감을 살린 머릿결, 적당한 노출을 곁들이며 슬림한 라인을 살려내는 원피스, 그리고 자신의 조악한 화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완벽한 메이크업.

내가 이렇게나 예뻤던가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전혀 다른 모습의 자신이 거울 속에 서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게 나라니.

이런 모습이 나에게 있을 줄이야. 그녀는 눈을 깜박거리며 멍하니 거울만을 들여다봤다.

“효진 씨, 제가 도와드릴게요.”

스튜디오 코디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신효진은 깜짝 놀라 거울에서 손을 떼며, 어색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효진 씨 덕분에 백화점 이미지가 많이 좋아졌어요. 다들 효진 씨 보고 신선하고 예쁘다고 감탄 많이 해요.”

우측에 앉은 송하나가 상냥하게 말했다. 평복으로 갈아입은 신효진은 어딘지 불편한 듯이 꼼지락거렸다.

“왜요, 자리가 불편한가요?”

“아니에요. 그냥 저, 이런 차는 처음 타봐서요.”

고급 세단 뒷좌석의 푹신한 안락감은 신효진에게 무척 낯선 것이었다. 송하나에게는 자연스러운 호흡 같은 것이, 그녀에게는 하나하나가 낯설고 다른 세상 이야기 같은 존재였다.

좁디좁은 만원버스나 지하철만 타고 다니다가 처음으로 타본 고급 세단. 좌석감은 편안했지만, 그녀는 맞지 않는 옷을 훔쳐 입은 듯이 불편했다.

그녀는 주눅이 든 시선으로 송하나를 훔쳐봤다. 고운 옆얼굴에서는 자신과 전혀 다른 당당함이 흐른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눈앞의 이 사람이, 자신과 동갑이라는 것이.

‘세상엔 정말 이런 사람도 있구나.’

마음이 복잡했다. 부럽고, 동경하게 되고, 약간은 샘이 나기도 한다. 샘을 냈다가도 그런 자신한테 소스라치게 놀라며 질시하는 마음을 떨쳐낸다.

작은 질투를 머금는 것조차 죄를 짓는 것 같은 격차. 신효진은 송하나의 상냥함과 친절에 감동하면서도, 그 앞에서 또 위축되기도 했다.

“저어, 그런데 사장님.”

“저 사장 아닌데. 그냥 하나 씨라고 불러요.”

“……하나 씨는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시는 거예요?”

“그냥 신효진 씨를 보고 홍보 모델로 쓰면 딱이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

“그게 전부인데, 이상한가요?”

신효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냥 왜 저 같은 거한테 잘해주시나 하고, 괜히 제가 주눅이 들어서…….”

“왜 그래요. 신효진 씨는 충분히 예쁜데. 연예인을 해도 되겠어요.”

“연예인이라니요! 저,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저한테 그런 건…….”

신효진은 얼마나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송하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혹시라도 그런 쪽 생각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제가 한 번 알아봐줄게요.”

“…….”

새삼 그녀의 ‘급’을 느낀 신효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촬영장에서 모든 이들이 친절한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뒤에 있는 송하나 때문이라는 것을.

대형 백화점 홍보 모델로 아무렇지 않게 꽂아 넣는 힘, 촬영 스튜디오의 분위기과 서열을 휘어잡는 권위, 그녀의 몸을 감싼 수많은 명품 의류와 수억을 호가하는 고급 자동차.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녀와 자신의 차이는 아득했다.

당연했다. 그녀는 H그룹의 외동딸이었으니까.

‘만약 스칼린이라면 당당하겠지?’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한 신효진은 깜짝 놀랐다. 스스로가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스칼린이라면 송하나 앞에서도 당당할 거라니. 그것은 꿈속의 자신일 뿐이지 않은가.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한 것이 부끄러웠던 신효진은 가만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한참 후 그녀는 슬그머니 눈을 들었다.

“사장님.”

“하나 씨라고 불러줘요.”

“……하나 씨.”

신효진은 모기소리 만하게, 하지만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맙습니다.”

송하나는 옅은 웃음을 띠고, 조용히 대답했다.

“천만에요.”

============================ 작품 후기 ============================

“이봐요, 피디님. 어떻게 이번 편에 제가 한 번도 안 나올 수 있습니까?”

“너만 나오면 제작비가 엄청 들어! 이번 편은 협찬과 PPL로 겨우겨우 땜빵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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