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9 그저 꿈일 뿐 =========================================================================
한서진이 약속한 복지는 이직한 설계사무소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덕분에 신효진은 처음에 살짝 오해를 했다. 젊은 사주가 자신한테 딴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착각과 두근거림은 잠시였다. 모든 직원에게 공평히 적용되는 복지라는 것을 알고 그녀는 화장실에서 혼자 부끄러움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주제를 알아야지, 신효진.’
아무튼 새 직장 생활은 즐거웠다.
옴짝달싹도 못하고 숨이 막힐 것 같았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 생활은 천국이었다. 어머니 부양 문제에서 금전적으로 해방된 것만으로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다들 이런 기분이었구나.’
가족을 부양할 걱정 없이 자기가 벌어서 자기 몸만 챙기면 된다는 게, 이렇게나 마음 편안한 인생일 줄이야.
아직 부친이 걸림돌로 남아 있긴 했지만, 그래도 요즘처럼 행복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녀는 퇴근을 하면 곧바로 집으로 향한다.
보람찬 하루를 마치고 잠에 들면, 광활한 마법의 대륙이 그녀를 환영한다. 그 안에서 그녀는 누구도 부럽지 않은 강인한 여전사가 된다.
최근에는 멋진 귀공자 기사도 일행에 합류해서 더욱 꿈속의 세상이 즐거워졌다.
‘바뀐 신효진의 삶’도 괜찮은 편이었지만, ‘스칼린’의 화려한 인생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예전처럼 현실을 피해 꿈속으로 도망치는 건 아니라는 점이 좋았다. 바뀐 현실도 나름대로 흡족했으니까.
“놓쳤군.”
높은 고산지대에 초룡이 머문 흔적을 발견한 리온은 안타까움을 터트렸다. 보는 사람이 미안해질 정도로 그는 놓친 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세상에, 진짜 똑같아.’
스칼린은 그를 보면서 한서진을 떠올렸다. 문득 묘한 부끄러움이 치밀어 오른다.
한서진은 누구나 인정하는 한국 최고의 남자다. 학벌, 재산, 나이, 인품 등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심지어 그 모든 게 겨우 2, 3년 만에 혼자 힘으로 이뤄낸, 진정한 자수성가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대단한 남자와 똑같이 생긴 이가 자신의 꿈속에 매번 등장한다. 달러도 반도체도 없는 세상이지만, 대신 상상을 초월하는 강한 힘을 가졌다.
리더는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분명 명문가문의 후손이야. 저 막대한 마력…… 어쩌면 순수한 기사가 아니라 마법사, 혹은 마검사일지도 몰라.”
“강한 거야?”
“엄청나게 강하지. 지방 영주님들도 리온한테는 상대가 되지 않을 거야. 아, 물론 스칼린 너도 엄청나게 강해. 난 지금까지 너와 리온, 둘보다 더 강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강한 여전사인 자신, 그리고 마찬가지로 강대한 힘을 지닌 리온.
이런 자신들이 만난 것은 어떤 커다란 운명이 아닐까? 스칼린은 남몰래 그런 수줍은 상상을 했다가 부끄러움에 몸을 떨곤 했다.
‘한서진 박사님은 꿈에서까지도 정말 멋지고, 강하신 분이구나.’
비록 자신만의 꿈이지만 어떤가. 오히려 ‘리온’의 모습을 자신만이 알고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신효진이 가진 수줍은 욕구를 채워주었다.
마치 남들은 알지 못하는 한서진의 비밀스러운 모습을, 자신 혼자만 독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스칼린, 귀하가 어느 지역 출신인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는군. 그런 방대한 마력을 지닌 여후계자를 배출한 가문이라면 분명 수도권에도 소문이 났을 텐데.”
그날 밤, 둘은 까마득한 절벽에 나란히 걸터앉은 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는 광활한 숲을 한 눈에 담는 자리에서, 동화 속 기사님처럼 강하고 멋진 남자와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제가 그렇게 강한가요?”
“그렇소. 단일 마력 보유량으로 치면, 왕족을 제외한 누구도 귀하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거요.”
“그럼 제가 리온보다 강하다는 말이에요?”
“……그렇소.”
조금 머뭇거리긴 했지만 분명한 긍정에, 스칼린은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넓은 지평선이 시야에 가득 담긴다.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마력이, 이제는 분명히 느껴지고 있다. 리온이 마력 사용법을 꾸준히 가르쳐준 덕분이다.
“귀하는 대륙에서 가장 강한 마검사가 될 수 있을 거요.”
“왕족을 제외하고, 말이죠?”
스칼린은 깔깔거리며 즐겁게 웃었다.
현실보다 생생하고, 즐거운 꿈.
하지만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이제 없다.
꿈에 만족을 못해서가 아니다. 신효진의 현실은 비록 초라하지만, 그곳에서는 리온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신효진의 눈으로는 한서진을 보고, 스칼린의 눈으로는 기사 리온을 본다. 꿈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그의 모습을 독점하고, 현실에서는 그런 부끄러운 충족감을 재확인한다.
현실과 꿈, 모두가 즐거운 나날이었다.
「아쉬워요. 3대 과학 저널에 오빠 논문이 실리는 걸 기대했는데.」
“내가 아직 그 정도 급은 아니라서.”
「그거, 진심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죠?」
“음…… 겸손이라고 해두자.”
수화기 너머로 킥 하고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듣는 것만으로 마음이 싱그러워지는 웃음소리였다.
「점심은 드셨어요?」
“아니, 이제 먹으려고. 직원들이랑 같이 먹을 거야.”
「그러지 말고 저랑 같이 먹어요.」
“너 지금 학교일 텐데…….”
「지금 엘리베이터 탔어요.」
뭐? 이게 무슨 말이야? 한서진은 퍼뜩 놀라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
「30초 뒤에 봐요.」
학교에 있는 줄 알았는데, 회사 앞이었단 말이야? 한서진은 부리나케 재킷을 챙겨 나왔다.
사무소를 나서려는데 입구 근처에서 낑낑거리며 종이박스를 나르는 신효진과 마주쳤다. 시야 확보가 되지 않은 그녀는 그만 한서진과 살짝 부딪치고 말았다.
“앗!”
그녀는 낮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굽혔다. 종이박스가 무너지며 바닥에 흩어졌다.
한서진은 급히 몸을 낮추고 흩어진 서류 뭉치를 종이박스에 차곡차곡 주워 담았다. 그녀도 놀라서 얼른 서류 뭉치를 주웠다.
“죄, 죄송해요. 박사님. 제가 앞을 못 봐서 그만…….”
“괜찮아요. 오히려 내가 미안합니다. 내가 좀 더 잘 봤어야 했는데, 급한 마음에 그만.”
종이를 담던 중 그만 손끝이 살짝 부딪쳤다. 한서진은 대수롭지 않았지만, 신효진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움츠러들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는 이런 부끄러움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서류를 담는데 바쁜 듯 보였다.
“다들 식사하러 나갔나요? 왜 신효진 씨밖에 없지?”
“종합설계팀 분들은 모르겠구요, 사무관리팀은 지금 저 빼고 외근 나갔다가 돌아오는 중이에요. 그분들 오는 시간에 맞춰서 저도 밥 먹을 생각이었구요.”
“아, 그렇군요. 난 또 신효진 씨가 사내에서 배척받는 줄 알고 놀랐습니다.”
“안 그래요. 다들 얼마나 잘해주시는데요.”
신효진은 수줍게 배시시 웃으며 조그맣게 덧붙였다.
“전부 박사님 덕분이에요.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하필 회사에 아무도 없을 때 이렇게 딱 맞닥뜨리다니. 좀처럼 말을 걸 타이밍도 안 나고, 그럴 분위기도 아닌지라 기대도 안 했다. 그런데 이런 기회가 딱 올 줄이야.
그녀는 자신이 정말 하려고 생각해둔 말을 꺼냈다.
“제가 살면서 요즘처럼 편안하고 행복한 때가 없었어요. 박사님을 만난 게 인생의 가장 큰 복인 거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한서진은 멈칫했다.
해맑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서 낯익은 익숙함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신이었다.
그녀의 과거신상을 확인했을 때도 익숙함을 느꼈다. 자신 또한 그녀와 비슷한 인생을 살았기에.
그래서 지금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저리 해맑게 웃는지, 그 심정을 절절이 느낄 수 있었다.
“신효진 씨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언제나 용기를 잃지 마세요.”
“박사님 덕분에 용기를 찾았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식사 아직 안 했다고 했죠?”
“아, 네.”
신효진은 가슴이 철렁이듯 두근거렸다. 이 타이밍에 식사 이야기를 묻다니, 혹시……?
“내가 선약이 없으면 밥이라도 한 번 사드리는 건데 아쉽게 됐네요.”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바, 밥이라니요!”
신효진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아쉬웠다. 그와 같이 식사를 한다고 상상하자 볼이 뜨거워졌다.
“가까운 시일에 날 잡아서 사내 단합 겸 환영회라도 한 번 열어야겠네요.”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어쩜 이렇게 인품이 뛰어날까. 신효진은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콩닥거리는 가슴을 달랬다.
달빛에 물든 광활한 지평선을 함께 내려다보며 밤새 이야기를 나눈 리온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의 인자한 표정이 한서진의 얼굴 위로 겹친다. 저기에서 머리카락 색을 황금색으로 물들이고, 옷을 바꾸고 검을 쥐어주면…….
“오빠, 저 왔어요.”
“어, 하나야.”
순간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한서진이 반가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효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별 거 아닌 동작이 이상하게 힘들었다. 가슴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길게 묶어 늘어뜨린, 키가 크고 늘씬한 미인을.
숨이 막히는 압도감이 이런 것일까. 입이 채 벌어지기도 전에 굳게 만드는 미모였다.
작은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 큰 눈. 같은 여자를 그저 움츠러들게 만드는 사정없는 볼륨감이 눈길을 끈다.
남자라면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고, 여자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근사한 미모와 몸매에, 신효진은 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의 시선이 똑바로 이쪽을 향했다.
“아, 근데 이 분은 직원분이에요?”
“……어, 신입사원이야.”
한서진은 조금 머뭇거렸지만, 아무렇지 않게 표정을 꾸미며 소개시켰다.
“인사해. 이쪽은 신효진 씨.”
“안녕하세요.”
“신효진 씨, 이쪽은…….”
“송하나라고 해요. 오빠 친한 동생이에요.”
화사하게 웃는 얼굴 앞에 굳어 있던 신효진은 겨우 경직을 풀고, 억지로 미소로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효진입니다.”
즐거운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웃음이었다.
“효진 씨, 우리가 많이 늦었죠? 어서 밥 먹으러 가요.”
우르르 들어온 박수진 일행은 배가 고프며 신효진을 재촉했다.
“하루 6시간 근무지만 그래도 사람이 점심은 먹어야지. 어서 갑시다.”
“효진 씨?”
신효진은 멍하니 넋을 잃은 채 책상에 앉아 있었다. 박수진이 의아해하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그제야 신효진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예, 예?”
“내 말 안 듣고 딴 생각 하고 있었구나? 어서 일어나요. 밥 먹으러 갑시다.”
“통합설계팀 분들은 설비 보러 나가시더니, 그대로 밖에서 퇴근하시려나?”
“내가 한번 확인해볼게요. 일단 문은 간단하게만 잠가요. 통합설계팀 분들 나중에 들어올 수 있게.”
분위기가 순식간에 왁자지껄하게 변했다. 얼떨떨하게 앉아 있던 신효진도 주섬주섬 겉옷을 챙겼다.
사무소를 나서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내내 신효진은 멍하니 허공만 보고 있었다. 박수진이 그걸 보고 갸웃거렸다.
“효진 씨, 갑자기 왜 그래요? 아까 우리 나가기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아…… 별 거 아니에요.”
억지로 웃으며 얼버무리던 신효진은 문득 조심스레 물었다.
“저어, 근데 아까 대표님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젊은 여자분이시더라고요.”
“아, 송하나 양.”
젊은 여자라고만 했는데 동료 직원들이 대번에 알아듣는다. 신효진의 안색이 조금씩 굳어갔다.
“남친이랑 점심 데이트 하러 오셨나 보네.”
“나, 남친이요?”
“대표님 말하는 거예요. 예비 남친이든, 현 남친이든, 어쨌든. 효진 씨도 봤으니 알겠지만, 둘이 엄청 잘 어울리지 않아요?”
신효진은 보이지 않게 주먹을 꼭 쥐었다. 남친, 그 별거 아닌 단어가 이렇게 사정없이 가슴을 틀어막을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정말 예쁜 분이더라고요.”
“송하나양이 아마 대표님이랑 같은 대학 같은 과예요. 내가 알기로 2년 좀 넘은 사이로 알아요. 얼굴 예뻐, 몸매 좋아, 머리 똑똑해, 심지어 집안도 좋지. 내가 남자였어도 흠뻑 빠졌을 거야.”
박수진은 그리 말하고는 뭐가 즐거운지 까르르 웃었다.
신효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집안까지 좋아요?”
“그럼요. H그룹 회장님 막내딸인데.”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이, 어찌나 그렇게 길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신효진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자고 싶다.”
============================ 작품 후기 ============================
신효진의 관점에서 구상을 하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송하나는 비대칭 전략병기였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