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8 그저 꿈일 뿐 =========================================================================
장윤택 사장은 가차 없이 칼을 휘둘렀다.
사정팀을 동원해 신효진이 희롱을 당한 정황을 구체적으로 확인했다. 동료 직원들의 증언을 종합해 상황 파악이 끝난 뒤, 인사부에서 징계를 내렸다.
“해, 해고라고요?”
“그렇습니다. 지금 바로 짐을 정리해서 퇴사하시면 됩니다.”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제가 실수를 한 건 인정하지만, 겨우 한 번으로 이렇게…….”
“정상적인 사람은 그 한 번의 ‘잘못’도 평생 저지르지 않고 살아갑니다. 우리 회사는 비정상적인 직원은 필요 없습니다.”
사측은 강경했다. 소송을 걸 거면 어디 해보라는 식이었다.
그는 결국 쓸쓸히 퇴사했고, H반도체는 전체적으로 바짝 얼어붙었다.
원래는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을 희롱해도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회사 이미지를 생각해서 불문에 부치거나, 혹은 기껏해야 경고나 감봉 처분이 다였다.
경영진은 그런 관행적인 분위기를 완전히 깨버린 것이다.
“앞으로 회사에서 공적으로 허용하지 않은 회식은 일절 금지합니다. 또한 모든 직원들은 나이와 직급에 상관없이 서로 존댓말을 써야 합니다.”
사주인 한서진조차 경영진과 직원들에게 존대를 해주는데, 나이와 직급을 내세워 부하 직원에게 반말을 하는 것은 사내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였다.
그런 변화들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일부 생각이 굳은 이들은 내심 반발하기도 했지만, 사장의 지시는 곧 법이었다.
“신효진 씨는 출근 왜 안 했대?”
“그만뒀대요. 박 과장 찌르고 바로 관뒀나 봐요.”
“개인적으로 좀 안 되긴 했어. 사실 신효진 씨는 피해자인데…….”
“맞아요. 솔직히 박 과장이 쓰레기인데. 어디 딸 같은 부하 직원을 옆에 앉히고 어깨 껴안고……. 나 같아도 역겨워서 뛰쳐나갔어요.”
“효진 씨는 이쁘니까 어디 가서도 잘 살 거야.”
“글쎄요. 효진 씨가 엄청 예쁘긴 한데, 자기가 예쁜 걸 모르는 예쁜 애들은 이리저리 손해만 보며 살더라고요. 그래서 미인박명이라고도 하는 거 같던데.”
“에이, 설마 자기 예쁜 걸 모르겠어? 그 얼굴에?”
신효진 퇴사 직후, 제3설비파트의 미혼 남자 직원들의 우울함이 짙어졌다고 한다.
“혹시 부근에서 초룡을 보지 못했소?”
잿빛 망토를 두른 금발 기사의 이름은 리온이라고 했다. 흔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이름이었다.
일행은 리온이 신분을 숨긴 귀한 가문의 자제임을 알아차렸으나, 굳이 캐묻지 않았다. 신분을 숨기려고 하는 은인에게 그것은 실례다.
“초룡은 보지 못했습니다, 기사님.”
“난 아직 기사가 아니오. 그냥 리온이라 불러 주시오.”
“네, 리온님.”
스칼린은 마수 클로비가 초룡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라는 것을 오늘 리온한테 듣고 처음 알았다.
그녀는 정신없이 리온을 바라봤다.
‘진짜 닮았어. 아니, 그냥 똑같아.’
현실에서 사진, 동영상 등을 통해 자신이 확인하고 오니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리온은 한서진과 정말 똑 닮았다. 머리카락 색만 달랐을 뿐.
‘왜 내 꿈에 한서진 씨가 나오는 거지?’
현실을 넘어서는 생생함,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과 똑같은 사람의 등장.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리온은 초룡을 찾아 수행 중이라고 했다. 스칼린은 이 세상에는 용이라는 강력한 생물이 있으며, 그 선한 기질 때문에 강한 기사들이 길들여서 탈것으로 쓴다는 것을 알았다.
초룡은 용 중에서 특별히 몸집도 크고 전투력도 매우 강력한 종으로, 기사라면 누구나 선망하고 탐내는 전장의 반려자라고 했다.
그렇게 일시적이지만 리온이 일행에 합류하게 되었다.
스칼린은 그의 합류가 괜히 두근거리고, 설렜다. 그런 감정을 감추느라 애를 써야 했다.
“스칼린, 그대는 강대한 마력을 지니고 있지만 백분지일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군.”
리온은 여행 도중 틈틈이 스칼린에게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스칼린은 그에게 따로 개인 교습을 받는 순간이 가장 즐거웠다.
홀로 고고히 빛이 나는 사람, 모든 것을 쓸어버릴 힘을 지닌 듯한 사람. 심지어 외모조차 훈훈하고 매력적이다.
그런 젊고 강한 남자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 있을까. 스칼린은 백마 탄 기사와 은밀한 데이트를 하는 듯한 분위기가 그저 즐거웠다.
“앞으로 신효진 씨가 일하게 될 곳입니다.”
신효진의 새 직장상사는 이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날씬한 여자였다. 박수진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상사는 초면에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꿀직장에 온 걸 환영해요.”
“……네? 꿀직장이요?”
“그럼요. 단언컨대 우리 회사만큼 달콤한 직장은 대한민국에서 찾아보기 힘들 거예요.”
박수진은 물론이고 다른 동료들도 신효진이 재무팀장 인맥을 통해서 채용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서진이 그렇게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통합설계팀 분들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우리 사무행정직도 정말 괜찮은 조건이거든요.”
신효진은 단순한 사무행정직의 월급이 350만 원이라는 말에 놀랐고, 평균 하루 6시간 근무라는 점에 또 놀랐으며, 일주일에 4일 출근이라는 말에는 기절할 뻔했다.
이렇게 좋은 직장이 세상에 존재한단 말이야?
“물론 통합설계팀 분들 연장 근무할 때는 우리도 같이 움직여야 하지만, 그 경우에는 또 추가 수당이 나오니까. 정말 괜찮은 거죠.”
“세상에…… 박사님은, 아니 이 회사는 왜 이렇게 많이 주는 거예요?”
한서진을 언급하려다가 회사에서 아는 체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해낸 신효진은 얼른 말을 바꿨다. 한서진이 시킨 것은 아니지만, 빽으로 들어왔으면서 대표와 안면이 있다는 이야기는 굳이 해서 좋을 게 없다.
박수진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냥 대표님 방침이에요. 자기가 데리고 있는 직원들 월급 많이 챙겨주는 게 진정한 자선사업이라나요?”
“……아.”
“대표님도 젊은 시절에는, 아 물론 지금도 젊으시지만, 하여튼 옛날에 되게 가난했었대요. 그래서 직원들이 삶에 찌드는 게 싫다고 우리 같은 사무행정직까지 월급을 많이 주시는 거예요. 어차피 대표님 재산에 비하면 티도 안 나요.”
9,000억 달러 이상의 재력가인데 몇 명 안 되는 사무행정직원들 350씩 챙겨줘 봤자, 바닷물을 바가지로 퍼는 격이다. 퍼낸 흔적도 남지 않는다.
그렇게 신효진은 바로 업무를 시작했다.
그녀는 업무에 금방 적응했다. 결국은 사무소의 자잘한 살림을 챙기는 일이었다. 반도체 설비 세척 작업에 비하면 하품이 나올 만큼 쉽고, 안전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독한 화학 약품을 더 이상 취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기뻤다.
‘이런 직장이라면 매일 일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천국의 직장이라 그런지 사내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직원들끼리 서로 헐뜯고 그러는 일도 드물었다.
“아참, 우리 회사는 회식 없어요. 회식하려면 부장님한테 허락받아야 해요.”
“그래요?”
“허락 없이 회식했다가는 부장님한테 혼나요. 힘없는 사원들은 말도 못하고 강제로 회식 끌려갈 수 있다고, 아예 회식을 허가제로 바꿨대요.”
첫 회식에서 끔찍한 기억만 남았던 신효진으로서는 꿈만 같은 방침이었다.
회사에 출근하고 며칠이 지났다. 한가한 시간에 그녀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전화를 하는 게 왠지 부담스럽고, 눈치가 보인다.
아무리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지만, 그런 대단한 사람한테 섣불리 연락을 해도 될까? 귀찮아하지 않을까?
‘아니야. 감사 표시를 안 하면 오히려 더 기분 나빠하실 수도 있어. 은혜도 모르는 애라고.’
그녀는 결심을 굳히고, 스마트폰을 열었다. 그녀가 택한 것은 통화가 아니라 톡 어플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드디어 타이핑을 했다.
―박사님, 이렇게 좋은 회사에 취직시켜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 태어나서 이렇게 큰 은혜는 처음 받아봐요. 박사님이 베푸신 은혜 잊지 않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보, 보냈어!”
전송 버튼을 누르고 신효진은 부르르 떨었다. 어떡해, 결국 보내고 말았어!
‘내 메시지 보고 어이 없어하시진 않겠지? 그래도 엄청 정중하게 쓴 건데, 이상하게 생각하시진 않겠지?’
그렇게 혼자 안절부절 못하며 온갖 상상을 쓰고 있는데, 핸드폰이 지이잉 진동했다. 그녀는 튕겨지듯이 톡 메시지를 확인했다.
―열심히 하세요. 그럼 좋은 날이 올 겁니다.
그녀는 고대했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기뻐서 방방 뛰었다.
들뜬 마음으로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사무실 입구가 열리며 한서진이 들어섰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을 멈추고, 자세를 낮춘 채 그를 훔쳐봤다.
‘진짜 닮았다…….’
그를 몰래 보고 있으니, 불현듯 꿈속에서 기사 리온으로부터 개인 교습을 받은 기억이 났다.
손가락 하나로 마력을 뿜어 바위를 산산조각 내던 그의 듬직한 모습이, 한서진의 얼굴 위로 똑같이 겹쳤다.
마치 그가 지닌 큰 비밀을 세상에서 혼자만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묘한 우월의식에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실실거리며 웃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겠지?’
신효진을 사무소 사무행정직원으로 채용할 때, 한서진은 나름 고민을 했다. 남들 눈에, 특히 송하나 눈에 이상하게 비쳐서는 곤란했다.
어쨌거나 신효진은 남자라면 한 번쯤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할 미인이었으니까. 본인은 정작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이 없는 듯하지만.
그래서 재무팀장을 통해서 채용했다. 신효진의 뒤를 봐준 게 자신이라는 것은 사무소에서 재무팀장 밖에 알지 못한다. 그 역시 회사에서는 신효진을 모른 체 직원으로만 대했다.
채용하고 나서 열흘 정도가 지났고, 신효진은 지금 직장에 만족한 듯이 보였다.
낮은 업무 강도와 적은 근로 시간, 그리고 높은 연봉. 반도체 설비 세척을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환경일 테니.
직원들에게 너무 많은 연봉을 줘서 ‘시장가’를 해친다는 동종업계의 불만이 가끔 들리긴 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중동 재벌들은 자기 애견 관리인에게 연봉으로 몇 억씩 턱턱 안겨준다는데, 이 정도는 별 것도 아니다.
‘저축도 하고, 문화생활도 하고, 결혼도 준비하고, 사람답게 살게 해주려면 아무래도 최소 월 3, 400은 줘야지.’
어려운 시절을 보낸 경험 때문에, 한서진은 내 회사 직원들에게만큼 ‘재정적으로’ 너그러운 고용주가 되자는 결심을 했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데 송하나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 하나야.”
「오빠, 지금도 바빠요? 진짜 얼굴 보기 힘드네요.」
“이제 얼추 정리될 거 같아. 논문 쓰던 거 거의 다 완성하고, 마지막 검토만 하고 있거든.”
「정말요? 축하드려요.」
“아마 일주일 안으로 게재할 거 같아.”
「저도 꼭 읽어볼게요.」
“쉽게 썼으니까 읽기 어렵진 않을 거야.”
「어디에 게재하세요?」
“응, 일단 우리 학교 학술회에서 발표하고 학교 이과지에 게재하기로 했어.”
「네? 사이언스나 네이처, 셀, 그런 곳이 아니고요?」
한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거기는 심사받는데 시간 꽤 걸리잖아. 나중에 논문 읽어보고 마음에 들면 알아서 게재해달라고 부탁하겠지.”
「그래도 아쉬워요.」
“바빠 죽겠는데 거기까지 신경 쓸 틈 없어서 그래.”
============================ 작품 후기 ============================
“월 3,400만원이면 사람답게 살 수 있다니. 서민들의 삶은 참으로 굉장하군.”
“저, 왕자님……. 3,400만 원이 아니고 300만원 내지 400만원이란 뜻입니다. 쉼표를 잘못 읽으셨습니다;;;;;;”
“……뭐라?”
한서진 의문의 1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