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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27화 (227/609)

00227  그저 꿈일 뿐  =========================================================================

핸드폰이 진동했다.

쪽잠이 들었던 한서진은 무심결에 손을 더듬어 뻗었다. 핸드폰이 잡히자 그는 귀에 대며, 잠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말씀하세요.”

「…….」

“여보세요?”

「저어, 담당관님?」

어딘가 주눅이 들어 있는 여자 목소리였다. 누구지, 하고 잠에 취한 채로 생각하던 한서진은 순간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 혹시 신효진 씨인가요?”

「……예, 그래요.」

“이렇게 전화를 주셨네요. 반갑습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를 했죠? 무례한 건 알아요, 하지만…….」

잔뜩 기가 죽은 목소리다. 한서진은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11시, 일반적으로 통화하기에는 무례한 시간이다.

물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확실히 늦은 시간이긴 한데,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겼나요? 신효진 씨가 아무 일도 없이 이 시간에 전화할 분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저도 결례인 건 아는데, 저번에 힘든 일이 생기면 전화하라던 말씀이 생각나서요.」

“전화는 잘 하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얼마든지 도와드리죠.”

「실은 제가 내일 도저히 출근을 못할 거 같아요. 자신이 없어요.」

한서진은 순간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의아했다.

그러나 신효진의 설명을 들으며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갔다. 이야기를 마칠 때쯤 신효진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울음기마저 배어 있었다.

“무슨 상황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제가 인사팀에 건의를 해서 신효진 씨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저 그만둘 거예요.」

“네?”

청천벽력이라도 들은 듯 한서진은 당황해서 반문했다. 신효진은 더 이상 울먹이지 않았다.

「어차피 그렇게 뛰쳐나와서 이제 동료들 눈총 때문에 정상적으로 회사 못 다녀요. 사정 조치 해주신다 해도 솔직히 경고 한 번 듣고 말 거구요. 누구도 제 편을 들어주지 않을 거예요.」

“신효진 씨.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마시고요.”

「그래서 그냥 그만 두려고요. 담당관님한테 이런 말씀드린 건…… 저 사표 수리 좀 부탁 드리려구요. 저 내일부터 그냥 안 나가면 안 되나요?」

심정은 이해가 된다. 회식자리에서 그렇게 뛰쳐나왔으니 성희롱을 당한 것과 별개로, 동료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씹혔을 것이다. 성희롱을 한 과장이 자기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그녀를 더욱 싸가지 없는 부하 직원으로 만들었을 테니.

「이렇게 관두는 게 경우가 아닌 건 아는데, 제가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그래요.」

“신효진 씨가 그만두면 어머니 병원비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퇴사자까지 복지 혜택을 적용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

신효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도 앞으로 더욱 힘들어질 미래가 막막한 것이리라.

「고등학교 문턱도 못 밟아보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어요. 그런데 이젠 지쳤어요.」

“신효진 씨.”

「저도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잠시 쉬고 싶어요. 지금으로서는 회사고 뭐고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아요. 집에서 잠이나 자고 싶어요.」

한서진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이대로 가면 신효진과의 접점이 끊어진다. 물론 훗날 억지로 인연을 이을 수는 있겠지만, 남들이 보기에 부자연스럽다.

베스트는 지금 그녀를 놓아 보내지 않는 것이다. 통찰안이 그녀를 반려라고 판정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계속 인연을 유지해야 하므로.

“신효진 씨, 그럼 제가 다른 직장을 소개해드릴까요?”

「다른 직장이요?」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변한 것도 모른 채, 한서진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상사의 희롱 문제로 H반도체에 다니기 곤란해 하시니 다른 직장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물론 사내 풍기 문제도 확실하게 바로잡을 거고요. 그러니…….”

「담당관님이 그 정도로 힘이 있으신 거예요?」

순간 한서진은 아차 싶었다. 신효진과 인연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발언을 조금 경솔하게 했다.

“그게…….”

「저어, 근데요. 담당관님, 혹시 한서진 박사님 맞나요?」

신효진이 덤덤하게 묻는 순간 한서진은 살짝 굳었다.

이 짧지만 어색한 침묵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까. 그는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인정했다.

“예, 맞습니다. 알아차리셨군요.”

「선글라스 때문에 헷갈렸는데 UCC 인터뷰 영상 보고 알았어요. 목소리가 똑같으시더라고요. 얼굴도 거의 비슷했고, 그래서 알았어요.」

“그렇군요.”

「왜 H반도체 오너가 복지 담당부서 직원 노릇을 하고 계신 거예요?」

한서진은 언젠가 그녀에게 들킬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생각해놓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소유주로서 사내 분위기를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보고서에는 보이지 않는 불합리나 잘못된 사내 문화 등을 관찰하기 위해서죠. 그러다가 신효진 씨 같은 직원들이 꽤 있다는 걸 알게 돼서, 이번에 복지 확장을 생각한 겁니다.”

한서진은 에스코너를 통해 H반도체의 지분 51%를 갖고 있고, SJ인더스트리를 통해 의결권을 행사한다. H반도체의 실질적인 오너라고 할 수 있었다.

명예시민권을 받으면서 SJ인더스트리의 오너라는 게 널리 알려진 덕분에, H반도체 직원들은 이제 한서진이 자기들 오너라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

「제가 봤던 상사 중에서 최고이신 거 같아요. 전부 다 가진 인생을 사시면서 저 같은 밑바닥 인생들까지 꾸준히 신경 써주실 줄은 몰랐어요.」

“저도 한때는 밑바닥 인생이었으니까요. 그걸 절대로 잊지 않을 생각입니다.”

「…….」

신효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 침묵이 담고 있는 의미는 뭘까. 한서진은 초조했으나 내색을 숨긴 채 다시 말했다.

“신효진 씨가 겪은 피해는 제가 사내 풍기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서 생긴 일입니다. 고용주로서 정중히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다른 직장 구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작게 한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신효진이 다시 말했다.

「그럼 염치없지만 부탁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회사 주인 되시는 분이 저 같은 말단 직원한테까지 신경 써주실 줄은 몰랐어요. 저, 그런데…….」

신효진은 조금 망설이는 눈치였다. 한서진은 재촉했다.

“편히 말씀하세요.”

「만약…… 또 힘든 일이 있으면 전화해도 돼요?」

이쪽이 바라던 바다. 한서진은 곧장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의논하세요.”

통화를 마치며, 신효진은 크게 심호흡을 뱉었다.

손끝이 아직도 덜덜 떨렸다. 세상에, 내가 지금 정말 사주랑 통화를 한 거야?

“진짜였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스마트폰 액정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눈만 연신 껌벅거렸다.

힘든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한 말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전화했다. 그런데 친절하게 이야기를 들어준 것으로도 모자라, 상사한테도 적절한 조치를 취해준다니. 그리고 다른 직장까지 알아봐주겠다니.

“인품이 정말 좋으신 분이구나.”

미국 명예시민, 그런 명예를 누리는 사람은 역시 인성부터가 다른가 보다. 신효진은 그가 부러우면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약하지만 동경심도 조금 생겼다.

‘쉬려고 했는데…….’

일을 그만두겠다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어린 나이에 너무 힘든 인생을 살았고, 지쳤다. 그래서 한두 달만이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쉬고 싶었다.

고단한 현실을 잊고, 아름답고 멋진 꿈에서 낭만과 모험을 즐기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좋은 기회가 생길 줄이야.

‘진짜 닮았는데…….’

꿈속에서 자신과 일행을 구해준 멋진 금발의 기사가 생각나자, 신효진은 가만히 몸을 웅크렸다.

수만 개체가 넘는 마수 클로비 떼를 검격 한 번으로 단숨에 날려버린 강자. 그 사람은 대관절 왜 한서진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건 그저 꿈일 뿐인데…….’

신효진은 문득 자신이 없어졌다. 정말 그건 그냥 단순에 꿈에 불과한 걸까?

혹시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생각하지 말자.’

그녀는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이 이상은 미친 망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것은 자기 세뇌에 가까운 다짐이었다.

「예, 박사님. 장윤택 사장입니다.」

늦은 시간임에도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상대는 바로 SJ인더스트리에서 임명한 H반도체 신임 사장이었다.

취임 당시, 장윤택은 한서진이 H반도체의 사주라는 사실을 몰랐다. SJ인더스트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주주로서의 권리를 대리행사 하는 것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경영진 중에서 한서진이 진정한 사주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라서요.”

「아닙니다. 저도 아직 회사에서 업무를 보던 중이었습니다.」

“야근이신가요. 고생이 많으시군요.”

「직원은 몰라도, 경영진이 야근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장윤택이 사장이 된 이후, H반도체는 일반 직원을 대상으로 일절 야근을 금지시켰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야근을 시키지 않았다.

야근을 해야 할 정도로 일이 많으면 사람을 추가로 고용해서 썼고, 일시적으로 업무가 폭증할 경우에는 프리랜서 인력을 보강해서 처리하는 식으로 했다.

가장 호평을 받은 일은 급여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일 근무시간을 1시간 줄인 것이다. 딱 1시간을 줄여준 것뿐이지만, 직원들은 하루 삶의 질이 훨씬 나아졌다며 좋아했다.

그 전에도 근무 환경이 좋다는 평이 자자했던 H반도체는 이제 근로자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직장이 되었다.

“다름이 아니고 제가 직장 내 희롱에 관한 제보를 받았습니다. 제3설비파트 세척팀이던가 그랬습니다.”

「희롱, 말씀이십니까?」

장윤택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미국파인 그는 비합리적이고 권위적인 국내 직장 분위기를 싫어했다. 그래서 SJ인더스트리가 H반도체 지분을 인수해서 사장에 앉힌 것이기도 했다.

“제가 복지 담당관 노릇을 하면서 맡고 있는 여직원이 한 명 있잖습니까.”

「예, 기억납니다.」

“그 여직원이 제보를 했는데 오늘 저녁 회식에서 성희롱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적절한 처분이 있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다른 직장이었으면 ‘적절한 처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H반도체에서 적절한 처분이라 하면 법률적인 의미까지 포함한 원리원칙을 의미한다.

희롱을 한 과장은 해고를 피할 수 없으리라. 장윤택은 물을 흐리는 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아직 많은 직원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

“그리고 앞으로 우리 회사에서 회식은 일절 안 됩니다. 동기간의 자발적인 술자리는 예외로 할 수도 있지만, 상사와 부하 간의 회식은 무조건 금지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분명하게 직원들한테 각인시키겠습니다.」

몇 가지 지시를 마치고, 한서진은 통화를 끊었다.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언제부터 이렇게 지시를 내리는 게 자연스러워졌을까.

‘내가 참 변하긴 많이 변했네.’

이 모든 것은 통찰안 덕분. 그리고 그 통찰안이 요즘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고 있다.

신효진을 떠올리며 한서진은 가볍게 고민했다.

“근데 무슨 일자리를 소개해주지?”

============================ 작품 후기 ============================

어제의 제가 무척이나 원망스럽습니다.

3연참이나 했으면서, 한편 정도는 오늘의 나에게 양보해줄 수도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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