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6 그저 꿈일 뿐 =========================================================================
“스칼린, 안색이 안 좋은데? 어디 아파?”
동료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멍하니 있던 ‘스칼린’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억지로 활짝 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옛날 생각이 좀 나서.”
오늘따라 꿈의 생생함이 다소 낯설다.
유독 힘든 하루를 겪어서일까. ‘신효진’의 어둠이 스칼린의 빛에 더욱 대조되는 느낌이다.
지금쯤 좁은 원룸에 웅크려 잠들어 있을 신효진을 생각하니, 가슴에 답답한 찌꺼기가 들러붙는 느낌이다.
‘내가, 지금 당장 뛰쳐나가기만 하면……!’
자신을 희롱한 그 상사를 짓밟아줄 수 있을 텐데. 그런 부질없는 상상을 품으며, 스칼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행은 지금 어느 숲을 지나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친 거목으로 울창한 나무, 삼림 전체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활력이 쏟아져 나오는 듯하다.
푸른 숲의 내음을 맡는 것만으로, 답답했던 하루를 씻어내는 듯 상쾌해졌다.
‘이 꿈이 사실 진짜 현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아쉬움이 지나가자 더욱 씁쓸해진다.
리더가 스칼린에게 조용히 말했다.
“긴장해. 여기 포렌 산악지대는 제법 위험한 곳이라고. 언제 강한 마수들이 튀어나올지 몰라.”
“그래?”
“물론 그만한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지. 포렌 산악지대 깊숙한 곳에는 사금이 가득한 강이 있대. 강바닥에 모래알 대신 그냥 사금이 가득 가라앉아 있는 거야! 우린 이제 부자라고!”
옆에서 마법사가 흥분해서 두 팔을 벌리며 외치자 리더가 핀잔을 주었다.
“사금 따위 없어도 이미 우린 부자야. 마룡을 잡고 그 심장을 채취했잖아.”
“에이, 이왕이면 좀 더 부자가 되면 좋…… 응?”
그때였다. 쾌활하게 말하던 마법사의 얼굴이 돌연 새하얗게 질렸다. 마법사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하늘 높은 곳을 가리켰다.
“저, 저길 봐!”
“뭐? 뭐야?”
“마수, 마수 클로비야!”
그 순간 리더를 비롯한 동료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스칼린은 그들의 반응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마수 클로비는 거대한 검은 박쥐였다. 날개 끝에서 끝까지 족히 20미터는 되어 보였다.
마룡보다 훨씬 약해보이는데, 왜 저렇게 겁을 먹었지? 이게 대관절 어찌 된 영문인가?
클로비가 이쪽을 발견했다. 허공에 잠시 멈춘 클로비는 크게 포효를 내지른 뒤, 곧바로 고속으로 하강했다.
“어딜!”
스칼린은 높이 점프하며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검격 한 방에 클로비의 온몸이 두 동강이 났다.
그녀는 가뿐히 착지하며 피식 웃어 보였다.
“별 거 아닌데? 마룡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녀석이잖아?”
150미터에 달하는 마룡보다 몸집도 훨씬 작고, 가죽도 훨씬 연약하다. 마룡이 뿜어내던 강력한 마력 숨결 같은 것도 없다.
이런 녀석이 뭐가 무섭다고 저리 벌벌 떠는지, 스칼린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망쳐! 어서!”
“왜 그래?”
“스칼린! 도망쳐야 해!”
리더가 뛰면서 급히 외쳤다. 스칼린은 어어 하다가 리더의 말을 따라 얼른 뛰었다.
체력이 가장 약한 마법사가 숨을 헐떡였다. 스칼린은 가볍게 그를 어깨에 들쳐 메고 물었다.
“리더가 왜 저러는 거야? 클로비, 별 거 아니던데? 마룡의 발톱만큼도…….”
그녀의 어깨에 매달린 마법사가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클로비의 단일 전투력은 물론 마룡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클로비는 대군이 아니면 상대할 수 없어. 스칼린, 네가 아무리 강한 전사라 해도 안 돼.”
“그게 무슨 말…….”
그때였다.
갑자기 태양이 가려지기라도 한 듯 주변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스칼린의 팔뚝에 돋는 소름은 결코 그런 게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뛰면서 슬그머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하늘을 새카맣게 덮은 클로비 떼가 맺혔다.
수천? 아니 수만?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숫자가 하늘을 가득 덮고 있었다. 마치 온 하늘이 클로비로 가득 뒤덮인 듯한 광경이었다.
그제야 스칼린은 깨달았다. 아까 녀석이 공격하기 전 내지른 포효는 기세를 잡기 위한 게 아니라, 동료들을 부르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젠장! 멈춰! 등을 대고 둥글게 진형을 짜! 마법사는 안쪽으로! 최대한 버텨야 해!”
질주를 멈춘 리더가 칼을 빼들었다. 다른 동료들도 등을 맞대고 진형을 잡았다. 중앙에 위치한 마법사는 주문을 중얼거리며 마법을 준비했다.
“마법사, 구조 신호는?”
“아까 클로비가 나타났을 때 바로 보냈어!”
“버텨! 근위병이 올 때까지! 두 시간, 아니 한 시간만 버티면 돼! 분명히 와줄 거야!”
―끼에에엑!
세 마리의 거대 박쥐가 빠르게 쇄도해왔다. 스칼린은 대검을 가볍게 휘둘려 녀석들을 쳐냈다.
동료가 두 동강이 나서 흩어지자 클로비들은 흥분했는지 더욱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젠장, 저기서 더 동료들을 부르면 안 되는데!”
“저기서 더 몰려온단 말이야?”
“그럴 수도 있단 거지!”
스칼린의 안색도 살짝 질렸다.
수만 마리는 족히 될 법한 숫자, 혼자라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동료들을 모두 챙기는 것은 버거웠다.
리더가 결연히 말했다.
“스칼린.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두는데, 만약 안 되겠다 싶으면 너 혼자라도 뛰어서 도망쳐.”
“그게 무슨…….”
“모두가 개죽음을 당할 필요는 없어. 살 사람은 살아야지.”
스칼린이 뭐라고 반박하려는 순간, 마법사가 날카롭게 외쳤다.
“또 온다!”
긴 전투의 잔재는 처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방에는 클로비의 사체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 중심에는 탈진한 일행이 주저앉아 있었다. 모든 기력과 마력을 소진한 그들은 손끝 하나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오직 스칼린만이 지칠 줄을 모른 채, 쇄도하는 클로비 떼를 향해 검격을 휘둘렀다.
마법사가 목소리를 쥐어짜내며 부탁했다.
“스칼린, 우린 틀렸어. 그만 달아나…….”
“안 돼!”
스칼린은 매몰차게 거절하고는, 다시금 뛰어 올라 클로비 세 마리를 동시에 베어냈다.
하늘은 여전히 클로비 떼로 가득했다. 그렇게나 무참히 도륙했음에도 전혀 티가 나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늘어난 느낌이 든다.
‘젠장!’
‘신효진’은 이를 악물었다.
현실의 자신과 달리 꿈속의 자신은 무엇이든 베어버릴 수 있을 듯한 여전사였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숫자 말고 내세울 게 없는, 저런 나약한 마수 떼도 감당하지 못하지 않는가?
강인한 육체는 아직도 지칠 줄을 모르고 끓어오르는 힘이 가득 넘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떡하면 동료들을 지킬 수 있지? 어떡하면?
―끼에에엑!
―끼르르륵!
그때였다. 모든 클로비들이 일제히 포효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 하나하나가 한데 뭉치며, 사람을 짓누르는 거대한 굉음을 만들어냈다.
모든 클로비들이 날개를 좁게 펼쳤다. 바로 적을 덮치기 직전에 취하는 자세였다.
수만 마리에 달하는 클로비가 일제공세 자세를 취했다. 일행들은 마지막을 각오한 듯 눈을 감았다.
아무리 스칼린이 용맹하다 해도, 지키는 것은 별개의 영역. 그녀는 살 수 있겠지만, 자신들은 죽을 것이다.
“안 돼!”
스칼린은 들끓는 일갈을 외치며 몸을 낮췄다. 그대로 높이 뛰어올라 모든 것을 베어버릴 참이었다. 되든 안 되든, 동료들이 죽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엄청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온몸이 짜르르 울리는, 마룡과 싸웠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막대한 크기였다.
곧이어 거대한 화염이 클로비 떼를 덮쳤다. 마치 하늘 전부를 불태우는 듯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불길이 클로비 떼를 사정없이 헤집었다.
클로비 떼는 고통스러운 단말마를 지르며 도망치려 했지만, 불길은 녀석들의 도주를 허용하지 않았다.
후둑. 후두둑. 후두두둑.
사방에는 불에 탄 클로비들의 시체가 떨어지고 있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이, 이건 대체…….”
스칼린은 더듬거렸다.
순수한 파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이었지만, 스칼린은 스스로가 초라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만큼 방금 보인 무위는 압도적인 것이었다.
“귀하, 힘을 쓰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는가?”
숲속에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명의 은인임에도 불구하고 스칼린은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생각보다 젊은.
“타고난 마력은 대단한 듯이 보이나 그 백분지 일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군. 어느 가문의 여식인지 알 수 있겠나?”
스칼린이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리더가 얼른 공손히 입을 열었다.
“구해주신 점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실례지만 마도사님의 존함을 알 수 있을지요? 나중에 꼭 찾아뵙고 따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건 마법이 아니다.”
“예? 그, 그게 마법이 아니라면 대체…….”
“마법이 아니다.”
마침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잿빛 망토로 온몸을 감싼 그는 오른손에 벌겋게 달아오른 검을 쥐고 있었다.
마법사가 하얗게 질려서 말했다.
“설마, 마력을 검에 담아 열화시켜서 그냥 뿌린 거란 말이야? 그게 그런 위력이라니…….”
“맙소사. 대단한 기사님이셨어.”
일행의 경악과 감탄을 뒤로 한 채, 스칼린은,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힘에 놀라서? 어느 정도 타당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젊고, 매력적으로 생긴 얼굴. 연륜이 넘치는 목소리 톤은 이상하게 귀에 익숙하다.
전체적인 무게감과 어울리지 않게 곱상한 귀공자풍의 분위기. 그리고 분명하게 낯이 익은 얼굴.
‘저, 저 사람은……!’
시선이 똑바로 부딪치는 순간, 거기서 기억이 끊어졌다.
“허억!”
신효진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꿈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번쩍 든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심호흡을 연달아 내뱉었다.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폐가 아프고, 숨이 가빴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등과 배, 가슴은 물론이고 손끝에까지 땀이 맺혀 있었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옷이 푹 젖어 있고, 미칠 듯이 목이 말랐다.
그녀는 간이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터질 듯한 심장의 두근거림이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우습게도 아까 회식 자리에서 도망친 것이나 내일 어떤 얼굴로 출근할지에 관한 걱정, 부친으로 인한 답답함 같은 것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기사, 분명히 닮았어.’
위기의 순간에서 기적처럼 일행을 구해준 정체모를 기사.
지금도 또렷하게 생각나는 그 얼굴은 분명히 그녀가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스마트폰을 켜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리고 기사를 찾았다.
「한서진 박사, 미국 명예시민 되다.」
「개인 자산 추정치만 약 9,000억 달러 이상.」
「한국대 최고의 두뇌, 노벨상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
「지진 예측의 새로운 장을 여나?」
「미국의 역사를 다시 쓴 인물.」
신효진은 얼굴이 큼지막하게 나온 어느 기사를 찾아내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꿈을 꾸게 된 이후로 TV나 뉴스를 잘 보지 않는다. 하지만 한서진처럼 현재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인물을 모를 수가 없었다.
기사를 접하고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었을 땐, 가난을 극복하고 그런 대성공을 거둔 사람도 있구나 하고, 가벼운 부러움으로 넘겼을 뿐이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너무 격차가 대단해서, 잠깐 말로만 부러워하고 지나치는 그런 인물.
“닮았어.”
아무리 봐도 닮았다.
다른 것은 오직 머리카락 색깔 뿐, 기사의 황금빛 머리카락과 한서진의 검은 머리카락, 그 정반대의 대치성 뿐이다.
자신과 다른 점이라면, 둘 다 각자의 세상에서 찬란하게 빛이 나고 있다는 정도일까.
‘가만, 혹시?’
그녀는 홀린 듯이 UCC에서 한서진의 인터뷰 영상을 찾았다. 검색은 어렵지 않았다.
인터뷰 동영상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를 듣던 그녀의 안색이 새파랗게 굳었다.
그제야 그 기사의 목소리가 왜 이상하게 귀에 익었는지 깨달은 것이다. 꿈에서는 억양과 분위기가 달라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 담당관……이시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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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들어온 제작비에 흥분해서 막막 내지르다 보니 전개까지 질러버렸습니다.
뭐... 내일의 제가 알아서 수습하겠죠. 오늘의 저는 더 이상 알 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