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5 그저 꿈일 뿐 =========================================================================
니트론이 왔다.
“잘 부탁합니다, 한 박사.”
“…….”
그는 오긴 했으되, 혼자 온 게 아니었다. 20여 명의 박사들을 함께 대동했다. 한 명 한 명이 교수급 이상의 뛰어난 석학들이었다.
스탠포드 출신만 있는 게 아니라 칼텍, 하버드, MIT 등 내로라하는 대학 출신들의 집단이었다.
“내가 이끌고 있는 스코브리아늄 연구팀이오. 세계 최고의 드림팀이지. 인사하시오.”
“……혼자 오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몇 년이 걸릴지 모를 대형 프로젝트 아닙니까? 당연히 연구팀을 모두 데리고 와야지요. 미국 연구실은 완전히 정리했고, 연구 설비들도 지금쯤 바다를 건너고 있을 겁니다.”
“…….”
그때 정리한다는 말이 이런 의미였나? 잠깐 한국에 들어오겠다는 게 아니라, 아예 들어오겠다는 뜻이었단 말인가?
“단언컨대 스코브리아늄, 아니 미스릴 연구에 있어서 한 박사와 최고의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거요.”
니트론은 한국에 연구실을 통째로 옮겨온 게 어지간히 기쁜 듯 감정의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내가 한 박사와 같이 연구하는 날이 올 줄이야. 내가 이 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한 박사는 모를 거요.”
니트론과 박사들.
그들이 서울에 왔다.
니트론은 미국 생활은 제대로 정리하고 왔다. 문제는 서울 생활을 위한 준비는 하나도 하지 않은 것이다. 20여 명이 당장 잠잘 곳도 없어서 호텔부터 잡아야 했다.
“괜찮습니다. 자주 있는 일이거든요.”
“교수님이 그러시는 거야 어디 한두 번입니까.”
의외로 다른 석학들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태평했다. 하지만 한서진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들은 비록 젊지만 한 명 한 명이 세계적인 석학들이다. 게다가 미스릴 연구에 큰 도움이 되어줄 사람들, 대접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재무팀은 일단 급히 서울에 그들이 머무를 곳부터 구해야 했다. 한서진의 사비에 관련된 일을 도맡아 하다 보니 이런 자잘한 일까지 맡게 되었다.
“한 달 정도면 설비가 모두 도착할 거요.”
그 안에 연구 설비를 갖춰놓을 빈 연구실도 구해야 했다.
연구실 문제는 한국대에 마침 빈 연구실이 나와서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적당한 발전기금 기부와 더불어 정중히 부탁을 하자 총장은 흔쾌히 승낙했다.
“얼마든지 쓰세요. 한 박사라면 그래도 됩니다.”
이제는 박사 아니라고 말하기도 지친다. 이제 겨우 학부생 3학년일 뿐인데…….
미국 명예시민권 부여 때, 미국 대통령이 한 박사라고 호칭해버린 바람에 전 세계가 자신을 박사로 알고 있었다.
진지하게 오류 정정을 해줘도 상대는 ‘근데 어차피 곧 박사 되지 않나요?’라고 나오는 식이다.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반쯤 체념한 듯 살고 있다.
“우리 모두 한 박사의 논문이 공표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소. 대체 언제쯤 완성되는 겁니까?”
“금방 완성 됩니다. 니트론 교수님이 거들어주시면 더 빨리 나올 수도 있을 텐데요.”
니트론은 욕심이 나는 듯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야 내가 한 박사의 권위에 반쯤 걸친 채로 묻어가는 모양새가 되지 않습니까. 그건 내키지 않아요.”
그 반대가 아니라?
“한 박사가 발표하는 첫 논문이니 이번만큼은 저도 그냥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겠습니다. 그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연구에 들어갑시다.”
“근데 미스릴 연구팀이면 미국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과학 인재 아닙니까? 이렇게 외국으로 함부로 유출해도 되는 건가요?”
“연방 정부에서도 승인했소. 그들도 아는 거지요. 한 박사 곁이야말로 미스릴 연구를 위한 최고의 장소라는 걸.”
니트론은 자신만만하게 덧붙였다.
“두고 보시오. 머지않아 한 박사 곁으로 온 세계 석학들이 몰려들 테니. 난 시발점에 지나지 않아요.”
“신효진 씨, 요즘 얼굴이 매우 밝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거야?”
교대를 하고 자리를 잡기 전, 같은 세척팀에서 일하는 남직원이 함께 걸으며 슬쩍 물었다. 신효진은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해줬다.
“요즘 영화 보거든요.”
“영화? 무슨 영화?”
“블록버스터 영화요. 엄청 장편인데, 매일 그거 보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다 보고 나면 너무 기분 좋아지고, 또 다음 편이 기대되고, 그래서 그런가 봐요.”
“무슨 영화인지 궁금한데, 나도 보여주면 안 돼?”
얼버무리기 애매한 말에 순간 신효진은 당황했지만, 다행히 곧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며 대화가 끊겼다.
헬멧을 비롯하여 보호 장비로 풀 무장을 한 채, 그들은 세척라인에 섰다. 독한 화학 약품을 이용해 작업을 마친 반도체 설비를 모조리 씻어냈다.
힘들고, 지루하고, 고되기만 한 작업.
예전 같았으면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몰두했을 일이다. 내일에 대한 기약 없이 지금의 노동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퇴근 후 지친 몸을 좁은 원룸에 쉬게 하고, 다음 날 다시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러나 요즘은 달랐다.
‘어서 끝났으면.’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신효진은 부쩍 힘이 났다. 얼굴도 더욱 빛을 띠었다.
일을 마치면 집에 갈 수 있다. 잠에 들 수 있고, 꿈속의 광활한 세상을 누빌 수 있다. 그 멋진 세상 속에서 자신은 괴물도 두렵지 않은 용맹한 여전사가 된다.
꿈, 하지만 현실보다 더욱 생생한 꿈.
“퇴근 후에 다들 뭐해요? 오늘 간단하게 삼겹살에 소주라도 하고 들어가는 게 어때요?”
“좋죠!”
“과장님이 쏘시는 거예요?”
퇴근을 위해 기자재를 정리하는 신효진의 손길이 빨라졌다. 삼겹살이니 술자리니, 그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꿈.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차라리 그 꿈이 현실이었으면 좋겠다.’
어서 집에 돌아가서 광활한 마법의 대륙을 누비는 여전사 스칼린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다.
“신효진 씨? 신효진 씨는 같이 안 가나?”
막 나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물었다. 멈칫한 신효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과장님도 아시잖아요. 저 술 마시면 안 되는 거…….”
“신효진 씨 이제 스무 살이잖아? 그럼 마셔도 되지.”
“……아.”
순간 신효진은 가볍게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스무 살인 건 알고 있었고, 스무 살은 술을 마셔도 됨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런 당연한 것이, 자신에게도 다가왔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을 뿐.
그녀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술은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어서요. 죄송해요. 저는 그냥 집에 갈게요.”
“그럼 이참에 배워야지. 원래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겁니다. 그거 몰라?”
한참 삼촌뻘인 과장이 거듭 권했다. 신효진은 당혹스러웠다.
“저, 저는…….”
익숙하지 않은 일에 그녀는 말을 더듬거렸다. 과장은 사람 좋게 웃으며 계속 주도권을 잡았다.
“그동안 술 마시면 안 된대서 회식 많이 빼줬는데, 이제는 좀 참가하고 그래야지. 신년회에도 안 왔으면서. 자, 어서 가자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싫은 술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자리는 하필 과장의 옆자리였다. 그는 자꾸만 신효진에게 술을 권했다.
“원래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거야. 자, 어서 마셔.”
이따금씩 그의 손이 어깨를 스칠 때마다 신효진은 흠칫흠칫 놀랐다. 그는 어느새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취한 채 신효진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자, 우리 효진 씨가 따라주는 술도 한 번 마셔보자고.”
“저, 저는…….”
“어른 잔이 비었으면 바로바로 채워줘야지. 어른한테 술을 안 배워서 효진 씨가 그걸 모르는 거야.”
신효진은 떨리는 손으로 소주병을 들었다. 술잔에 고이는 액체가 마치 자신의 눈물처럼 보였다.
간신히 술을 따르고 병을 내려놓는데, 과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자자, 건배 한 번 합시다!”
그러면서 그의 왼팔이 은근슬쩍 신효진의 어깨를 감쌌다. 마치 더러운 것이 묻은 듯한 기분 나쁜 촉감에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내가, 내가 스칼린이라면……!’
그게 꿈이 아니고 현실이라면, 이런 끔찍한 일은 안 당할 텐데. 얼마든지 뜻대로 이 더러운 상사를 짓밟아줄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녀는 가난하고, 힘도 없고, 인사고과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봐 항의 한 마디도 못하는 소심한 스무 살 처녀였다.
무엇보다 가장 싫은 것은 얼어붙은 듯이 아무 항변도 못하는 자기 자신이었다.
꿈에서는 그렇게 당당하고 거침없었으면서, 현실에서는 왜 이따위인 건데?
“이봐, 동료들과 같이 술 마시니 얼마나 좋아? 신효진 씨도 앞으로 이런 자리 빼지 말고 자주 나와.”
과장이 벌겋게 취한 얼굴로 말했다.
입에서 쏟아지는 술 냄새가 그녀의 얼굴에 확 끼얹어졌다. 왼쪽 어깨를 감싼 그의 손이 마치 주무르듯이 천천히 팔을 쓰다듬자, 그녀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그대로 도망치듯 나와 버렸다. 술자리 분위기는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시, 신효진 씨? 어디 가는 거야!”
“효진 씨? 지금 어디 가요?”
“효진아!”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이 안 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둡고 조그만 원룸에 쪼그리고 앉은 채 훌쩍이고 있었다.
“어, 어떡해…….”
어깨를 주무르는 손길이 끔찍해서 본능적으로 그 자리를 뛰쳐나왔는데, 막상 정신을 차리니 무서웠다. 전화기에는 이미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수십 통씩 와 있었다. 아마 동료 직원들이 보낸 것이리라.
“내일 어떻게 출근하지……?”
확인은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흐느끼면서, 어둠 속에서 그저 웅크리고만 있었다.
전화기가 다시 울렸다. 이십 번 가까이 진동이 멎질 않는다.
혹시나 해서 확인을 해보니 부친이었다. 신효진은 눈을 질끈 감은 뒤 전화를 받았다.
「뭐 하는데 전화를 이렇게 안 받아? 엉?」
“……아빠.”
수화기에서 쏟아지는 목소리는 술에 잔뜩 절어 있었다. 아까 얼굴에 끼얹어지던 과장의 술 냄새와 겹쳐진다. 그때의 끔찍한 기분이 되살아나며,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됐고, 이십만 원만 좀 부쳐 봐.」
“……돈 없어요, 저.”
「라면 떨어져서 그래. 그러니까 지금 바로 이십만 원만…….」
“돈 없다니까요! 술 마시려고 그러는 거잖아!”
신효진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곧바로 부친한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받을 때까지 전화하겠다는 듯 끈질긴 진동, 그녀는 아예 전화기를 꺼버렸다.
근래 가벼워졌던 기분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부친의 이런 전화가 한두 번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익숙한 내용이었으니.
그러나 하필 오늘 같은 날 이런 전화를 받자, 안 그래도 최악이었던 기분이 바닥까지 붕괴해버렸다.
작은 탁자에는 고지서가 잔뜩 쌓여 있었다. 공과금 청구서, 모친의 병원비 청구서, 그밖에 이름을 외우기도 버거운 다양한 청구서가 뒤섞여 있었다.
쌓인 청구서 더미가 마친 자신의 구질구질한 운명을 상기해주는 것 같아, 그녀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녀는 웅크린 무릎 사이에 얼굴을 깊이 묻었다. 피곤했다. 이제 그만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빨리…… 잠이 들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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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멋진 꿈을 매일 꿀 수 있다면, 아무리 힘든 하루도 그럭저럭 견딜 수 있지 않을까요?
언젠가 문득 해본 그런 상상에 지금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기도합니다. 오늘은 부디 완결 낸 꿈을 꾸게 해달라고.
대저택도 스포츠카도 미녀도 다 필요 없으니 제발 꿈에서만이라도 마감이 끝났으면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