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4 그저 꿈일 뿐 =========================================================================
“오랜만에 오신 거면서 아빠랑만 너무 이야기하시네요. 저도 엄청 기다렸는데.”
술자리가 길어지면서, 취한 백철중은 먼저 잠들었다.
송하나와 발코니에 나온 한서진은 피식거리면서 캔맥주를 내밀었다. 그녀는 툴툴거리는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캔을 가볍게 부딪쳤다.
“술은 이제 잘 마셔?”
“못 마셔요. 이렇게 쓴 걸 어떻게 먹어요?”
“완전히 못 마시는 거야, 그럼?”
“맥주 한두 캔 정도는…….”
“에이, 첫날 보니까 다섯 캔은 거뜬할 것 같던데.”
“아니거든요?”
송하나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발끈했다.
“저, 신입생 환영회 말구 밖에서는 술 한 번도 안 먹었어요.”
“한 번도?”
“오빠 없는 데선 술 안 먹었어요.”
참 기분 좋게 들리는 말이다. 한서진은 송하나를 슬쩍 곁눈질하면서, 맥주캔을 입에 댔다.
허벅지가 살짝 드러나는 반바지에 보라색 민소매 티. 다리가 길어서인지 핫팬츠도 아닌데 노출도가 높게 느껴진다. 얇은 팔은 가느다란 손가락까지 길게 뻗어 있다.
“하여간 축하해요. 미국 명예시민 되신 거.”
“고마워.”
“그거 알아보니까 엄청 영광스러운 거라면서요. 오빠 전에 살아서 받은 분은 처칠 수상과 테레사 수녀님 밖에 없다던데.”
“그렇대. 아참, 미국 대통령이랑 셀카 찍었는데, 보여줄까?”
“보여주세요. 보고 싶어요.”
한서진은 미국 여행에서 찍은 여러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송하나는 바짝 붙어서 사진을 감상하며 즐거워했다.
맞닿은 팔뚝, 이따금씩 스치는 손가락, 코앞에서 느껴지는 가냘픈 숨결. 한서진은 문득 말을 잊은 채, 사진을 보며 까르르 웃는 그녀를 물끄러미 주시했다.
이대로 손만 뻗으면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갈증, 그리고 충동. 이곳이 백철중 회장 저택이 아니었다면, 통찰안이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면, 과연 자신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오빠?”
불현듯 조심스럽게 송하나가 물었다.
조금 낮은 높이에서, 짙은 쌍꺼풀 아래 커다란 눈동자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갈증이 밀려왔고, 한서진은 필사적으로 그것을 억눌렀다.
“전에 저한테 하실 말씀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아직은 못 하시겠다고.”
송하나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저, 아직 더 기다려야 하겠죠?”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어렵사리 대답한 한서진은 낮으면서도 확실한 음색으로 덧붙였다.
“반드시 확인할 게 있거든.”
“…….”
“내 인생, 아니 내 모든 게 걸린 문제야. 그래서…….”
“알겠어요.”
송하나는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그대로 모든 충동을 던져버리고 싶을 만큼 예쁘고, 사람을 잡아끄는 눈웃음이다.
“맥주, 더 가져올까요?”
“논문 준비는 잘 돼 가냐?”
지나가던 박효산 교수가 넌지시 물었다. 한서진은 수염을 깎지 않은 덥수룩한 몰골로 힘없이 돌아봤다.
“네, 그럭저럭요. 양식 맞추는 게 더 힘드네요, 이거.”
“사실 재작년 너 B코스 할 때 양식은 엉망이었어.”
“근데 용케 A+을 주셨네요.”
“양식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아무튼 논문 작성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부담도 클 텐데.”
SJ인더스트리의 사주이자 미국 명예시민, 그리고 지진 예측 전문가. 그렇게 국제적인 명성을 떨친 한서진이 발표하는 첫 논문은 당연히 엄청난 관심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한서진은 그 어느 때보다 꼼꼼하게 논문 저술에 매달리고 있었다. 부담감도 당연히 컸다.
다시 논문 작업에 매달리고 있는데, 한지혜로부터 톡 메시지가 왔다.
―오빠, 입국할 때 계란 던진 놈 찾았어.
그는 기계적으로 답 메시지를 보냈다.
―뭐하는 놈인데?
―28살 무직 남자라던데. 평소 오빠를 질투해서 그랬대. 어떻게 할까?
―그냥 법대로 하라고 해.
―응, 알았어. 인생은 실전이라는 걸 보여줄게.
그렇게 인파가 많았는데 범인을 찾아낸 게 용하다고 생각하며, 한서진은 다시 논문에 몰두했다.
어느덧 오후가 순식간에 흘러갔다.
‘오늘은 그만할까.’
한서진은 노트북을 끄고 일어섰다. 짐을 챙기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총장이 들어섰다. 총장의 뒤에는 고급 정장을 빼입은 노인과 수행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따르고 있었다.
“아, 한 박사.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총장의 변한 태도는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한서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잘못된 점을 고쳐 주었다.
“전 박사가 아닙니다, 교수님.”
“이미 박사 이상의 실력을 지녔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아참, 여기 내가 소개해줄 분이 있어요.”
총장의 안내를 받은 노인이 성큼 앞으로 나오면서 정중히 목례를 해보였다.
“오두식이라고 합니다. 외교부 장관을 맡고 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한서진은 아무렇지 않게 반응했다.
예전이라면 어땠을지 모르나, 미국을 다녀와서 그런지 장관직이 별로 대단하지 않게 느껴졌다. 이래봬도 미 대통령과 셀카까지 찍은 몸이시다, 이거야.
“갑작스레 찾아봬서 외람되지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결례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는지요?”
“죄송한데 제가 지금 몹시 바빠서요. 메일로 먼저 용건을 말씀해주시면 제가 나중에 읽어보고 연락을 따로 드리겠습니다. 여기 제 메일 주소입니다.”
한서진은 메일 주소만 적힌 명함을 내밀었다. 빈말이 아니라 지금 서둘러 집에 가서 작업을 마무리해야 했다.
오 장관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변했다. 총장이 그걸 보고 쩔쩔매며 중재에 나섰다.
“한 박사, 그래도 장관님이 이렇게 직접 찾아오셨는데 잠깐만이라도 시간을 내드리는 게…….”
“장관씩이나 되는 분이 직접 오신 거면 못 해도 30분이 넘어갈 텐데요. 미리 연락을 하고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제가 괜히 빼는 게 아니라, 진짜 몹시 바빠요. 어제도 두 시간 밖에 못 잤습니다.”
“단 20분이면 됩니다. 부탁드립니다.”
“곤란합니다.”
한서진은 오 장관의 부탁을 확실하게 자르고, 서둘러 연구소를 나섰다. 머릿속에는 서둘러 타르타로스로 달려가 시뮬레이션을 돌릴 생각으로 가득했다.
경호 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그는 대학을 나섰다.
운전은 경호원 한 명에게 대신 시킨 채, 그는 뒷좌석에서 논문 구상에 몰두했다.
그때 스마트폰에서 띵 하고 메일 도착 알람이 울렸다.
‘응? 벌써?’
오 장관이 보낸 메일이었다.
정중한 인사말로 시작하는 메일은 제법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상 및 지진 관측 통합 재해 예보 시스템 구축?’
매년 누적되는 태풍 피해, 그리고 올해 들어 빈번해지는 동부 지진을 대비해, 통합 재해 예보 시스템 구축에 힘을 보태달라는 내용이었다.
‘안 그래도 이거 때문에 엄청 시달리는 중인데.’
요즘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 심지어 중국 등 여러 나라에서 재해 예보 시스템을 만들어달라고 요청이 쇄도하고 있었다. 태풍 메기와 캘리포니아 대지진을 예측한 것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요구를 일일이 들어주는 것은 곤란했다. 자신이 24시간 재해 예보에만 매달릴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타르타로스를 줄 수도 없지 않은가.
한서진은 메일 하단에 적힌 오 장관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네, 오두식 장관입니다.」
“접니다, 한서진입니다.”
「아, 한 박사님. 혹시 메일을 보시고 전화주신 겁니까?」
“일단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요즘 시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종합 재해 예측 시스템을 따로 구축해야겠다는 구상은 어느 정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갖고 계신 걸 저희에게 주신다면…….」
“안 됩니다. 그런 시스템이나 툴 같은 건 없어요. 두 번 모두 제가 주먹구구식으로 관측 데이터를 일일이 분석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려서 종합적으로 계산한 결과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기상청에 취직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요?”
「…….」
“저 역시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재해 예측 시스템을 별도로 구축하는 것은 찬성합니다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군요. 그러니 나중에 다시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정말 엄청 바쁘신 모양이군요. 이해합니다. 나중에 꼭 연락 주시길 바랍니다.」
“이해해주시니 고맙습니다.”
한서진은 전화를 끊다 말고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근데 왜 외교부 장관이 이런 말을 하지?”
집에 돌아온 한서진은 타르타로스를 가동시키고, 니트론이 발표한 해외 논문을 훑었다.
중간에 잠깐 송하나와 짧은 통화를 하고, 재무팀 서진혁 변호사가 보낸 보고를 확인했다. 정지원이 보낸 경영 업무 보고, 정상용이 보낸 유레카 통신 사업 진행 보고, H반도체 지시 이행 보고를 차례차례 확인했다.
“아. 과제가 있었지, 참.”
출석을 빼주는 대신 받은 과제 몇 개를 연이어 하고 나니 어느덧 밤이 깊었다.
“이거라도 먹어가면서 해. 두고 갈게.”
“어, 고마워.”
한지혜가 간단한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었고, 그걸로 늦은 저녁을 대신 때웠다. 마지막으로 내일 참석하는 강연 원고를 확인한 뒤에야 하루 일정이 끝났다.
“맞다, 니트론 교수님.”
기지개를 켜던 한서진은 깜빡했던 일을 떠올리고 허둥지둥 스마트폰을 찾았다. 오늘 니트론 교수와 통화하기로 했는데.
신호가 몇 번 울리기도 전에 그는 전화를 받았다. 어지간히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 박사, 왜 이렇게 전화가 늦었어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압니까?」
“죄송합니다, 교수님. 제가 너무 바빠서 그만.”
「이해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일 테니까요. 한 박사가 저번에 준 자료들은 잘 읽어봤습니다. 흥미로운 관점이었고, 제 연구와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아니, 거시적인 밑그림은 한 박사가 오히려 더 낫습니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검수를 위해 니트론에게 부탁을 했는데, 꽤 호의적인 반응이 돌아오자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니트론이 기분 좋게 웃더니 말했다.
「내가 한 박사가 매우 바쁘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 아나요?」
“어떻게요? 사실 지금 몸이 세 개였으면 할 정도로 바쁩니다.”
「내가 오리할콘 관련 메일을 세 시간 전에 보냈는데 아직 읽어보지도 않았잖습니까.」
“정말입니까?”
한서진은 얼른 스마트폰을 뺨에서 떼고 알람 목록을 확인했다. 정말로 니트론으로부터 온 메일이 있었다. 일에 몰두하느라 알람 메시지를 미처 듣지 못했나 보다.
컴퓨터로 첨부 파일 내용을 확인해보니 그의 말대로 오리할콘 관련 연구 자료였다.
그는 기쁜 한편 의아해서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저를 주셔도 되는 건가요? 전에는 분명 곤란하시다고…….”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죠. 한 박사는 당당한 미국 명예시민 아닙니까.」
“…….”
「사실 나는 과학에는 국경도, 국익도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중요한 과학 연구에는 때때로 위협이 따르죠. 오리할콘 연구를 정부의 허락 없이 ‘외국인’과 했다가는 그가 위험해질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주지 못했던 겁니다.」
짐작하고 있었지만, ‘외국인’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뭔가 기분이 묘하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정부에서도 한 박사와 함께라면 어떤 연구도 마음껏 공동으로 해도 괜찮다고 공인을 해주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하하, 그렇군요.”
조금 씁쓸한 기분으로 웃는데, 니트론이 조심스럽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제가 한국에 가도 되겠습니까?」
“한국에요? 그럼요. 얼마든지 오셔도 됩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내 조만간 ‘정리해서’ 한국에 가리다.」
“제가 꼭 마중을 나가지요.”
한서진은 ‘정리한다’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 작품 후기 ============================
“키스각, 고백각이었는데…….”
“…….”
“그걸, 거기서 그렇게 끊어요?”
“……창이 필요하다.”
“뭐요? 피디님, 뭐라고요?”
“죽창, 죽창이 필요하다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