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9 희망의 충격파 =========================================================================
한서진은 정지원을 선택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어.」
도청 보안이 확실한 칼라폰으로 둘은 통화를 나눴다. 한서진이 설명을 마치자 정지원은 시급한 와중에도 의문을 드러냈다.
한서진도 이해했다. 자신이 그의 입장이었어도 미친 소리를 들은 기분이었을 테니.
「미스릴을 소재로 써서 이 반도체를 찍어낸 다음 샌프란시스코에 던져두라고?」
“예.”
「그리고 이게 지진 피해 감소에 도움이 될 거라고?」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손톱만한 반도체 칩을 찍어내서 그냥 던져두는 게, 어째서 지진 억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인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미친 소리라 생각할 것이다.
‘반대 입장이었어도 내가 못 믿었을 거야.’
아무리 정지원이 자신을 철썩 같이 믿는다 하나, 반도체 칩을 던져 넣는 게 지진 억제에 도움이 된다는 말까지 믿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미쳤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이다.
한서진은 적당히 둘러대는 대신, 차라리 있는 그대로 털어놓기로 했다. 시급을 요하는 일에, 어설픈 거짓말을 첨가할 수는 없었다.
“저는 니트론 박사님이 발견한 제5의 힘을 꽤 오래 전부터 연구해왔습니다.”
「…….」
보이지 않아도, 숨소리만으로 정지원이 바짝 긴장해서 듣고 있는 게 느껴진다.
“전 그 힘이 단순히 자연계 5번째 힘이 아니라, 자연계의 모든 힘의 작용을 구성하는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그 힘을 다룰 수도 있고요.”
「증거는?」
“제가 설계한 모든 반도체들이죠.”
「…….」
“제가 설계한 반도체들은 전기와 전자의 힘만으로 작동하는 게 아닙니다. 그 미지의 힘을 미시적인 영역에서 조절하여 뛰어난 성능을 내는 원리입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제가 그린 설계도에는 더미나 마찬가지인 회로가 반드시 들어가죠.”
「그 회로도가 네가 말한 미지의 힘을 움직인다고?」
정지원의 목소리는 오히려 아까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에테르 반도체의 비밀 한 조각을 엿본 그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인가.
“전 그 힘을 에테르라고 부릅니다.”
「에테르…….」
“미시적 영역에서 에테르를 조절하는 건 이미 수차례 성공했습니다. 이번에는 거시적 영역에서의 에테르 조절에 도전하려 합니다.”
「하지만 실패하면…….」
“이미 한 번 성공했습니다. 저번 강원도 산불을 기억하시지요?”
「…….」
“그 산불이 진압되지 않은 것은, 에테르 에너지 그 자체가 발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테르 연소 자체를 막지 않으면 꺼지지 않는 불이었죠.”
「그걸 네가 막았다는 거냐?」
“방금 이 마력 칩셋으로 막았습니다.”
하나하나가 말도 안 되고, 미친 소리에 가까운 내용이다.
그러나 정지원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그가 내심 품어온 의문에 부합하는 설명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서진의 반도체는 설계 이론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성능을 낸다. 그래서 수많은 전자공학자들이 의문과 의심을 품고 분석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실패했다.
에테르 반도체의 회로, 그것이 어떤 물리적 의미를 가지는지 조금도 알아내지 못했다.
어린아이가 핵물리공식을 본다 해서 그것이 뭔지 알아볼 수 없는 것처럼, 에테르 회로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미지의 지식이었던 것이다.
“모든 에너지는 에테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진파 역시 마찬가지죠.”
「이 반도체가 에테르 자체에 직접 작용하는 회로칩 역할을 한다는 거군.」
“거대한 중장비를 움직이는 것도 결국 조그만 컴퓨터 부속칩이니까요. 저도 지진파라는 거대한 에너지를 컴퓨터 칩으로 제어해보려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납득이 되는구나.」
정지원은 이제야 온전히 받아들인 듯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성공 가능성은?」
“22% 정도입니다.”
한서진은 있는 그대로 솔직히 말했다.
정지원의 목소리는 오히려 밝았다.
「성공 가능성이 22%나 된다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네. 그나저나 정확히 어떤 식으로 막는다는 거지?」
“시간이 없으니 일단 칩부터 제작하시고…….”
「네가 처음 말했을 때부터 이미 공정을 시작했어.」
일단 작업부터 시작하고 물어봤구나.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지진 에너지를 구성한 에테르에 간섭하여, 힘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리는 겁니다. 큰 힘에 직접 부딪치지 않고 방향만 살짝 바꾼다는 개념이죠.”
「그럼 어떻게 되는 거냐? 지진 에너지가 바다로 방향을 튼다거나, 뭐 그렇게 되는 거냐?」
“아마 비슷하게 될 겁니다.”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하네.」
어차피 대지진이 휩쓸고 가면 모든 것이 파괴되고, 죽는다.
정지원은 결심을 굳혔다.
지각의 용트림이 발생하기 불과 몇 시간 전 일이었다.
쿠우웅!
지하 깊숙한 곳에서 전해지는 커다란 울림이 감지된 순간, 미국의 재난기관은 바짝 긴장했다.
“와, 왔습니다!”
미친 듯이 요동치는 지진 바늘을 보며 직원이 비명을 질렀다.
디스플레이에는 하나의 붉은 동심원만이 잡혔다가 사라졌다.
겨우 딱 하나, 하지만 그 크기는 캘리포니아 절반을 덮을 정도로 엄청났다.
“진도는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MMI 4.6!”
진도 4.6, 거의 모든 사람들이 느끼며, 불안정한 물체가 넘어질 정도의 수준.
방금 전진으로 실질적인 피해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재난책임자는 대형 상황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게…… 말이 돼?’
진원이 그리는 동심원은 겨우 하나였다. 그 하나의 구체 파동은 실질적인 피해를 낳지는 않았으나, 캘리포니아 절반에 달하는 지역을 뒤덮었다.
생각보다 진도가 약하다고 마음을 놓을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 닥쳐올 본격적인 지진이 얼마나 큰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오, 옵니다!”
굳이 외치지 않아도, 책임자는 이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수십km 넘게 떨어진 이곳까지도, 그 파동이 생생히 전해지고 있었으니까.
“으아아악!”
“살려줘!”
“대디! 대디!”
두 차례에 걸친 대지의 경고가 끝나고, 지면을 밟고 있는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초점을 제대로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흔들림이었다.
지진을 여럿 겪어본 성인들은 깨달았다. 이것은 자신들이 여태껏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대규모라는 것을.
어느 가장은 어린 아이들을 두 팔로 와락 껴안았다.
신혼부부는 서로를 굳게 안은 채 울먹였고, 노부부는 체념한 듯이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잡았다.
어린아이들의 비명, 소년소녀들의 울음소리, 임신한 아내를 두고 발만 동동 구르는 어느 남성의 발악. 캘리포니아는 통곡과 비명만이 가득했다.
땅은 쉬지 않고 흔들렸다. 시야가 확연하게 뒤틀릴 정도로 격렬한 떨림이었다.
과연 이 지진이 끝난 뒤 온전한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맘! 무서워요!”
차안에 갇힌 어느 모자. 모친은 어린 아들을 꼭 껴안아주며 신에게 기도했다.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지만, 그녀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흔들림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질끈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
그녀의 눈이 순간 가늘게 변했다. 기묘한 위화감이 그녀의 각막에 똑바로 맺혔다.
시선이 차창 유리 아래, 대쉬보드 상단에 놓인 조그만 구슬 세 개에 꽂혔다.
어린 아들이 아무 생각 없이 올려놓은 세 개의 구슬.
이런 격렬한 지진이라면 진작 이리저리 요동치다가 바닥을 굴러야 했다.
하지만 구슬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구슬 역시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차체와 똑같이, 움직임을 정교하게 맞춘 것처럼. 그래서 마치 움직이지 않는 듯이 느껴졌던 것이다.
‘……!’
어느 순간, 구슬 하나가 미약하게 구르기 시작했다.
진동의 공명을 혼자 벗어난 듯이. 그러나 구슬은 조금 구르다 말고 다시 멈춘 채, 얌전히 공명의 흐름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모든 것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작은 물건 하나하나까지도 흐트러지거나 부서지지 않는다.
태풍이 저항하는 거목은 부러진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는 갈대들은 다치지 않고 살아남는다.
그녀는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이, 부드럽고 연약한 갈대처럼 보였다.
“이, 이 정도면 규모 9.9 이상의 대지진입니다!”
백악관 상황실은 초비상이 걸렸다.
거대한 상황판을 보며 대통령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마치 자신의 책임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상황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전역을 뒤덮고 있는, 고작 하나의 붉은 동심원.
그것은 1초에도 수십 번씩 깜빡이며 널리 지진파를 퍼트리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백악관 건물조차 떨리고 있었다.
“전미에서 진동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멕시코에서도 아마 느끼고 있을 겁니다.”
과연 멕시코뿐일까. 어쩌면 지구 반대편에서도 이 진동을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
진앙인 캘리포니아는 지금쯤 지옥이 강림했으리라. 대통령은 눈을 감고 성호를 그었다.
신은 결국 그들을 구원하지 않았다.
지진 지속 시간은 고작 9분.
영원과도 같았던 9분이 끝나고, 상황판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침묵이 찾아왔다.
“…….”
아무도 쉽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 캘리포니아가 어떻게 변했을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으니까.
‘젠장!’
한서진은 테이블을 내리쳤다. 최소 9.8 이상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해외 속보가 나온 것이다.
‘왜? 왜?’
정지원이 시간을 맞추지 못했나. 아니면 뭔가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도 아니면, 22%의 가능성은 결코 상황을 뒤집기에 미약했던 것이었나.
“타르타로스. 아직 부족하구나. 너나, 나나.”
그는 씁쓸히 중얼거렸다.
개조한 마력 칩셋은 그 자체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해당 지역에 세팅을 하고, 타르타로스가 원격으로 기능을 제어하는 식이다.
에테르망에 연결된 타르타로스는 그가 생각하는 이론상으로 지구상의 어떤 물체에도 접속이 가능하다. 아직 그가 제대로 다루지 못할 뿐이다.
비극을 막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간 것에 우울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신호음이 울렸다.
주모니터에 결과가 출력되었다.
―에테르 충격파, 대기권 밖으로 방출 성공.
―우주 방출량 99.999978%, 지표면 잔류량 0.000022%. 다소의 피해 발생 예상.
―추가 에테르 충격파 발생 없음.
―모든 작업을 종료합니다.
한서진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이게…… 대체 뭐야?”
이상하다.
탄식과 우울로 뒤덮여 있던 전미 곳곳이 침묵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헬기를 타고 캘리포니아 상공을 촬영하는 아나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에 떨림과 경악이 가득했다.
「시청자 여러분, 보십시오. 저 아래 풍경이 과연 규모 10의 지진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보이십니까? 지표면이 갈라지기는커녕 무너진 건물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속속들이 보도되는 영상을 통해, 백악관과 미국 시민, 그리고 전 세계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믿을 수 없는 현상에 경악했다.
그 엄청난 지진이 캘리포니아 전역을 뒤흔들었음에도, 무너진 건물이나 죽은 사람 하나 없다. 흔들리는 장식물 등에 맞아서 다친 사람 정도가 전부였다.
정작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살아남은 것에 환호하기보다는 얼떨떨했다.
“우리가…… 어떻게 산 거야?”
“말도 안 돼.”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 결과였으면, 살아남은 이가 살아남은 것을 두고 말도 안 된다는 말을 내뱉었을까.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현상.
이론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
「이것은…… 기적인가요? 신이 미국을 구원하신 걸까요?」
사람들은 그걸 기적이라 부른다.
============================ 작품 후기 ============================
“하수는 공격에 맞서고, 중수는 공격을 다른 방향으로 튕겨낸다.”
“그럼 고수는?”
“물처럼 뒤로 흘려버리지. 에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