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3 악몽의 샌프란시스코 =========================================================================
입학 첫날이 무사히 지나갔다.
송하나는 첫날부터 폭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실내 호프집에서 그녀가 코트를 벗은 순간, 남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죄다 눈이 돌아갔다.
현실성이 제로에 수렴하는 사기적인 몸매였으니까.
어떤 남학생은 남몰래 이런 한탄을 하기도 했다.
“저 얼굴에, 저 몸매에, 우리랑 동기라고?”
“역시 신은 공평하지 않아.”
압도적인 미(美)는 종종 이성의 선망과 추종을 넘어서 커다란 박탈감을 불러오기도 한다. 또한 동성으로부터는 시기와 질투를 넘어서, 오히려 추종을 끌어내기도 한다.
송하나가 지금 딱 그랬다.
“그럼 수시로 들어온 거야?”
“응. 정시 봤으면 아마 합격 못했을 거야.”
“무슨 소리니. 수시나 정시나 다 똑같지, 뭐. 그런 게 세상에 어딨어.”
“맞아, 맞아.”
“이거 옷 예쁜데 어디서 샀어? 엄청 비쌀 거 같다.”
“로고가 안 보이는데…… 혹시 동대문? 나도 좀 알려주면 안 돼? 이거 진짜 마음에 든다.”
송하나 주변에는 학생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입학 첫날부터 그녀는 단숨에 학과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이성보다 오히려 동성들 사이에서 더 인기가 많은 모습을 보고 한서진은 내심 흐뭇했다. 저 애들이 훌륭한 바리케이드가 되어주겠지.
아까부터 송하나를 뚫어져라 관찰하던 학생회장 조현석이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근데 쟤,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어디서?”
“분명히 어디서 봤단 말이야. 저 사기적인 몸매가 어딘지 눈에 익어. 어디서 봤더라…….”
기억을 하고 있나 보네. 한서진은 피식 웃으며 말을 꺼냈다.
“아마 작년에 봤을 거야. 나 만나러 한 번 학교에 왔었거든.”
“네? 송하나, 쟤가요?”
“아! 그럼 그때 학교 왔었던 형 여자친구가 쟤에요?”
“잠깐, 형 그때 분명히 안 지 2년이라고 했는데, 그럼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던 말씀?”
한서진 측 테이블에서 난리가 났다. 조현석은 물론이고 다른 남자들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 부러운 경우가 어딨습니까!”
“여고생을 어떻게!”
“야야,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우리 사귀는 거 아니라고. 내가 그때 분명히 말했을 텐데.”
“세상에, 세상에. 그러니까 남자들 대시는 관심 없다고 당당하게 말을 하지. 한국에서 제일 잘난 남자친구가 옆에 있는데 우리 같은 쩌리들이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어?”
“질투조차 안 나네요. 형, 이런 게 압살이라는 거죠?”
“형, 진짜 전생에 나라 구하신 거 아니에요?”
“무슨 나라를 구해.”
한서진은 부러워서 미치려는 남동생들의 야유를 피식 웃음으로 넘겼다.
어느새 슬금슬금 사내놈들이 송하나 주변에 모이고 있었다. 신입생, 재학생 가리지 않고 자신감 좀 있다 싶은 놈들이 존재감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굳이 끼어들 필요까진 없겠네.’
한서진은 여유만만하게 지켜보았다. 송하나는 사교적인 미소를 띤 채 그들을 대했다.
사교적인 미소, 이게 포인트다. 헌데 사내놈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한 채 좋다며 꽁지깃을 뽐내기 바쁘다. 공작은커녕 장닭, 아니 수평아리 밖에 되지 못하는 것들이.
이 중에서 송하나가 차기 H그룹 회장이라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할까.
“오티에 오지 그랬어. 되게 재밌었는데.”
“죄송해요, 선배님. 그때 집안 일이 있어서요.”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어느새 신입생 환영회 뒤풀이가 얼추 끝났다.
송하나도 적당히 취했다. 최대한 술을 자제했지만, 워낙 사방에서 권하다 보니 어느 정도 취한 것이다. 그래도 강권하는 분위기는 사라져서 보기 좋았다.
그제야 한서진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송하나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하나야, 이만 집에 가야지.”
“아, 오빠.”
송하나는 살짝 취한 눈으로 보며 그를 불렀다. 그를 알지 못하는 남자 신입생들이 의아한 눈으로 돌아봤다. 마치 ‘이건 또 누구야?’라는 표정이었다.
백공작을 알아보지 못한 신입생 수평아리 한 마리가 취한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하나야, 이 분은 누구야? 너도 아는 사람?”
“친한 오빠야. 얘들아, 나 이만 갈게.”
“송하나, 벌써 집에 가게?”
“아직 술 많이 남았는데.”
몇 몇 미련이 남은 수평아리들이 만류했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어느새 여자들은 없고 남자들뿐이다.
한서진은 부드럽게 말했다.
“얘들아, 하나는 이만 집에 가야 돼. 집에서 걱정 많이 하셔.”
“형은 누구신데 하나를…….”
“일어나자, 하나야.”
한서진은 송하나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그녀는 실실 웃으며 그의 부축을 따랐다. 다리를 가볍게 비틀거리는 걸 보니 분명 취한 게 맞다.
꽤 취한 수평아리 한 마리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는 것을, 한서진은 부드럽게 밀어냈다.
‘고놈들, 귀엽네.’
별로 불쾌한 감정도 들지 않는다.
공작새 암컷한테 수평아리들이 짹짹거리며 달려든다고, 공작새 수컷이 기분 나쁘지는 않은 것처럼.
다른 테이블은 이미 잔뜩 취한 녀석들이 자기들끼리 떠들고 논답시고 이쪽에 관심도 없었다. 한서진은 송하나를 부축해서 가게를 빠져 나왔다.
술은 한 방울도 입에 안 댔기에, 대리운전을 부를 필요는 없었다. 조수석에 송하나를 앉히고, 그는 시동을 걸었다.
“오빠.”
자는 줄 알았던 송하나가 조용히 불렀다. 한서진은 흘끔 돌아보며 대답했다.
“어, 왜?”
“이제 저도 대학생 됐어요.”
“그래, 축하해.”
“오빠랑 같은 공간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게 기뻐요. 그동안은 샘이 많이 났거든요. 대학생 언니들이요.”
의미심장한 분위기에 한서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나도 기뻐. 너와 같은 학교, 같은 학과인 게.”
“다행이에요. 저는 저만 기쁜 거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었거든요.”
송하나는 배시시 웃으며 말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술을 많이 마신 건 아니지만, 아직 익숙하지 않은지 잠이 쏟아지는 모양이다.
잠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한서진은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왜…… 하나가 아니고 그 여자가 반려라는 거냐.’
어쩌면 꿈속의 왕은 그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SKK통신의 최민식 사장은 그를 보자마자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40 중반의 나이임에도 조카뻘인 한서진을 대함에 있어 정중하기 그지없다.
SKK그룹 회장의 방계 친척이라 들었는데, 몸에 밴 태도는 무척 공손했다.
“무슨 일로 저를 만나자고 하신 거죠?”
한서진은 덤덤히 물었다.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레카 통신 때문입니다.”
최민식은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유레카 통신 때문에 우리 SKK통신을 포함한, 기존 3대 이통사의 가입자 이탈이 급속도로 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어차피 독과점 문제 때문에라도, H통신이 무선통신 시장 전체를 독식할 순 없습니다. 믿음직한 파트너 하나 정도는 만들어두는 게 미래를 위해서라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경영 문제라면 제가 아니라 정상용 사장님을 찾아뵙는 게 맞을 텐데요. 저는 경영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고, 크게 아는 바도 없습니다.”
“하지만 유레카 통신의 핵심기술 특허권자이시고, 또한 51%의 지분을 가진 대주주이시지 않습니까.”
“…….”
“저는 대표님의 양해를 얻는 게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유레카 통신은 우후죽순처럼 가입자 수를 늘려가고 있다.
통신가입자 파이는 한정되어 있다. 가입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다른 경쟁사의 가입자가 줄어듦을 의미한다.
따라서 손해를 보게 된 이통사들이 어떤 식으로든 견제가 들어올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백철중과 정상용도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헌데 시장 점유율 60%가 넘는 SKK통신에서, 그것도 자신을 직접 찾아올 줄이야. 2위나 3위 통신사에서 먼저 움직일 거라고 예측했는데.
“양해라, 저에게 뭘 원하시는 거죠?”
“저희도 칼라 통신망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우리 회사의 주요 무기를 경쟁사에 군소리 없이 넘겨야 할 이유가 있다고 보시나요?”
“행정부에서 곧 어떤 식으로든 제재가 들어올 겁니다.”
“…….”
“전파를 쓰지 않는 통신망은 정부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세수가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행정적인 손해를 야기하죠. 다른 이통사들도 그 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행정부를 움직일 계획입니다.”
“SKK통신은 H통신 편을 들어줄 것이다, 라는 건가요?”
“적당한 파이를 나눠주신다면 최전방에서 총대를 메고 싸우는 우군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최민식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한서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경영에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정상용 사장도 조율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가볍게 한 말씀만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최민식은 거듭 간청을 하고 나서야 겨우 돌아갔다.
그가 나간 뒤 한서진은 정상용에게 확인차 전화를 걸었다.
「행정부가 유레카 통신을 언짢게 여기는 것은 사실입니다. 해서 다양한 돌파책을 찾고 있습니다.」
“SKK통신 사장이 절 찾아왔더군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 겁니다. 사실 저희로서도 통신 시장 전체를 집어삼키는 것은 부담스럽긴 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경영에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최민식 사장이 간곡히 부탁하던 표정을 떠올리며, 한서진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사장님의 소신껏 하세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SKK통신에 무기를 나눠주어 우군으로 만들든, 혼자서 모든 적을 상대로 싸우든, 한서진은 관여치 않을 생각이었다.
한국 시장은 칼라 통신망을 테스트하기 위한 무대에 지나지 않으니까.
“네? 그게 정말이에요?”
“그렇다니까요. 복지지원 프로그램 대상자로 선정됐으니까 지금 어서 가 봐요. 겨우 이십 명 뽑혔대요.”
신효진은 기뻐하며 면담실로 향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다른 선정자들도 표정이 무척 밝았다.
공장 사무 건물에 마련된 면담실을 찾은 신효진은 곧 익숙한 청년을 볼 수 있었다. 선글라스를 보니 기억이 났다.
‘아, 그때 그 사람?’
면담관이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특이하다 생각해서 기억에 남았는데, 이렇게 다시 볼 줄이야. 신효진은 반가웠다.
다른 선정자들도 개별 담당자를 만나러 뿔뿔이 흩어졌고, 신효진은 그와 이야기하게 되었다.
“신효진 씨, 사내 복지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된 걸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제가 될 줄 몰랐어요.”
한서진은 신효진을 차분히 주시했다.
그녀는 자신을 실무 담당자로만 알고 있었다. 임원들도 한서진이 제대로 된 복지지원을 하기 위해 정체를 숨기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오너가 청소부로 위장하고 사내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의 연장으로 여긴 것이다.
정지원이 임명한 H반도체 신임 사장이 그를 회사의 대주주처럼 대우한다는 점 덕분에, 그는 회사에서 사장에 버금가는 독특한 포지션을 갖고 있었다.
“이 면담은 신효진 씨가 필요로 하는 구체적인 지원 내역을 확정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한서진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면담이 생각보다 길어질 수도 있으니, 마음 편히 가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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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건다고 오해하면 안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