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2 운명은 기습처럼 =========================================================================
서지철은 재산관리팀장이다.
한서진의 개인재산을 관리하는 팀을 이끌고 있으며, 줄여서 재무팀이라 부르기도 한다.
재무팀은 한서진의 국내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하며, 크게 H반도체와 H통신 지분, 영원그룹, 설계 사무소, 국내에 반입한 5nm공정 로열티 등이 있다. 추가로 저택과 자동차 등의 현물 재산의 재산세 납부 등의 관리도 겸한다.
물론 북유럽 L국에 있는 에스코너, 500억 달러가 예치된 계좌는 한서진이 따로 직접 관리한다.
처음에는 비교적 한가했으나 H반도체와 H통신, 영원그룹 설립 때문에 재무팀은 근래 무척 바빠졌다.
“진성전자는 메인보드 제조업으로 완전히 방향타를 잡았습니다. PC형 제품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고, 이제는 스마트폰형 제품 개발에도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은 각각 최고의 성능을 가진 TPU와 메모리이지만, 주변 부품들이 제대로 성능을 받쳐주지 못한다. 그나마 칼라 칩은 슈나우저와 직접 연결하는 방식이기에 다른 부품의 영향을 덜 받는 편이다.
그래서 보드 제조사들은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의 성능을 최대로 끌어낼 수 있는 제품 개발 경쟁에 한창이었다.
“심지어 IBM도 얼마 전 슈나우저 전용 보드 제품을 내놓았습니다.”
“IBM까지요?”
한서진은 시장 상황이 참 재밌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SJ인더스트리가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로 메인 부품 시장을 꽉 쥐고 있고, 그 아래에서는 보드 시장을 놓고 수많은 회사들이 아비규환의 다툼을 벌이고 있다.
‘누가 살아남든 SJ인더스트리는 상관없지.’
천상계에서 고고하게 구름 아래 펼쳐지는 지옥도를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너무 사악한 감상인가?
“요즘에는 자주 출근하시는군요. 로펌 쪽 일이 좀 한가해졌나 봅니다.”
“로펌 쪽은 그만뒀습니다.”
“예?”
“재무팀 업무에 충실하고 싶어서요. 그쪽 오너가 오랜 지기라서 양해는 어렵지 않게 구했습니다.”
서지철의 대답에 얼떨떨하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안 그래도 서지철이 비서실장 역할을 잘 해주고 있어 말을 꺼내볼까 생각 중이었는데, 먼저 이쪽에 전념을 해주다니.
“윈텔은 현재 많이 위태롭습니다. CPU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된 게 타격이 컸습니다. SJ인더스트리에서 사업체 인수를 검토하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서지철은 SJ인더스트리가 한서진 소유라는 것을 모른다. SJ인더스트리 최고 경영자 정지원과 매우 친하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아마 올 상반기 안에 빅딜이 이뤄질 겁니다. 사실 SJ인더스트리는 지금도 반도체 수요 물량을 제대로 맞추질 못하고 있거든요.”
진성전자와 H반도체에 파운더리를 맡긴 이후, 반도체 공급이 정상화가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공급이 안정화되자 억눌려 있던 잠재적 수요가 크게 터져 나온 것이다.
개인 PC와 모바일 단말기는 물론이고, 전문가용 워크스테이션과 수퍼컴퓨터 등 대형 컴퓨터 시장, 통신 서버와 위성 부품까지, 그야말로 반도체를 필요로 하는 모든 부문에서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을 원하고 있었다.
미국의 어느 투자전문평가기관은 SJ인더스트리의 기업 가치를 1조 달러 이상으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어차피 상장도 하지 않았고, 거래되는 주식도 없기에 주가는 의미가 없지만.
“그리고 저번에 지시하신 공장 인수도 알아봤습니다. 쓸 만한 공장이 몇 개 매물로 나온 게 있습니다. 최고가액이 1,560억 원입니다. 이 물건이 제일 쓸 만합니다.”
“설계 사무소가 운용하기에 적당해야 합니다. 가급적 경기도권이면 좋겠는데요.”
“그래서 경기도권으로만 알아봤습니다. 위치나 설비로 보면 이만한 매물이 없더군요.”
원활한 설계 업무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실험실이 필요한 터라, 한서진은 아예 국내 공장 인수를 결심했다.
판매할 제품을 생산하려는 게 아니기에, 아마 연구소 느낌으로 운영하지 않을까 싶다.
보고서에 올라온 목록을 훑어보고 한서진은 결정을 내렸다.
“이걸로 하죠.”
“실사는 가지 않으셔도 괜찮겠습니까?”
“이천 억도 안 하는데요. 그냥 이걸로 하겠습니다.”
비교적 가깝고, 연식도 가장 최근의 것이다. 단가가 제일 비싸긴 하지만 그만한 메리트가 있었다.
1,500억 원대의 매물 구입을 즉석에서 결정할 수 있다니, 새삼 인생 편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소 직원들이 좋아하겠네.’
그동안 제대로 된 시제품 생산 설비가 없어 대학이나 기업 연구소에 자리를 빌려서 제작에 임했다고 들었다. 서러운 타집살이는 이제 안녕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10시 30분에 입학식이라 이제 가봐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한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9시 30분이 조금 넘었다. 바로 출발하면 입학식에는 늦지 않을 것 같다.
사무소를 나선 그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문득 휘파람이 나올 만큼 매력적인 미인이 눈앞을 지나쳤다. 생긴 것만 보면 나무랄 데를 찾기 힘들 만큼 넘치는 미모를 지닌 사람이었다.
「부적합.」
그러나 통찰안은 냉정하게 부적합 판정을 내렸다.
처음과 달리 판정이 즉각적으로 이뤄지는 점은 좋은데, 시도 때도 없이 보여주니까 가끔 어지럽기도 했다.
‘숙달돼서 그런가. 이제는 너무 시도 때도 없이 발동하네.’
처음에는 통찰안을 발동시키기 위해 정신집중 하느라 고생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사소한 영역에서는 자연스럽게 발동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왜 여자들은 죄다 부적합이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통찰안이 지금까지 적합 판정을 내린 여성은 단 두 명이다.
그 많은 여자들 중에서 자신의 여자친구 감이 그렇게나 없단 말인가? 아니면 통찰안의 기준점이 독특한 것일까?
‘하나는 충분히 적합일 만해.’
통찰안이 아니더라도 송하나에게 마음을 뺏겼을 것이다. 그녀는 모든 면에서 넘치는, 그야말로 완벽한 여성이니까.
‘그런데 그 여자는 왜 적합이라는 거야?’
심지어 적합을 넘어선 반려다.
통찰안은 대체 그녀의 어떤 점 때문에 인생의 반려라는 판정을 준 것일까.
신효진.
그녀의 이름이 가슴을 복잡하게 헝클어뜨렸다. 그는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쳐 내고는, 엑셀을 밟았다.
입학식장에 도착한 한서진은 송하나를 어렵지 않게 찾았다. 백철중 회장 부부도 함께였다.
한서진을 보고 백철중이 반가워했다.
“어, 자네 왔나.”
“예, 회장님. 하나야, 입학 축하해.”
“고마워요.”
“아직 입학식 시작 안 했지?”
“네. 조금 있다가 모여야 한대요. 그동안 사진 좀 찍고 있으려구요.”
“우리 하나가 벌써 대학생이라니.”
송지현은 감격한 얼굴이었고, 송하나가 가볍게 핀잔했다.
“며칠 전 졸업할 때도 그 말 했다, 뭐.”
“그땐 졸업이고, 이건 입학이잖니. 기분이 다른 거야.”
“그래그래, 하나도 이제 어른이 된 거 아니냐. 이 애비도 참 흐뭇하구나. 한 대표, 우리 하나 좀 잘 봐주게. 나쁜 길로 안 빠지게 감시도 해주고.”
“걱정 마십시오.”
“아빤, 내가 그럴 애로 보여?”
좋은 날에 어울리게, 분위기는 밝고 화기애애했다.
그녀는 깔끔한 청바지에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클래식한 스타일은 신입생다운 상큼한 느낌을 가득 발산한다.
풍성한 코트자락이 사정없는 볼륨감을 감추고 있지만, 오히려 그런 느낌이 더 잘 어울렸다.
주변에서는 백철중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경호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평상복 차림으로 위장 경호를 하는 모양이었다.
“의전도 적당히 해야지, 경사스러운 입학식을 소란스럽게 할 수는 없잖나. 다른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민폐일세.”
송지현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아까는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서운하다더니. 이 양반,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는 거 봐.”
“어허, 한 대표 듣는데 그 무슨.”
백철중은 민망해했고, 한서진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설마 H그룹 회장님이 경호원도 없이 여기 왔을 거라고 생각을 못해서일 겁니다. 회장님이 얼마나 유명하신데요.”
백철중은 조금 못마땅한 듯했다.
“그래도 창용이네는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죄다 알아 본다더만…….”
“여보, 원래 세상은 1등만 기억해요.”
어느덧 입학식 준비가 끝나, 송하나는 다른 신입생들 사이에 끼여서 강당으로 향했다.
“회장님과 사모님도 가시죠.”
한서진은 직접 백철중 부부를 안내했다.
나름 신경 써서 좋은 자리를 잡고, 입학식이 시작되는 장면을 지켜봤다.
“이거 영 시야가 불편하구만. 우리 하나가 어디 있는지 잘 보이지가 않아.”
“그럼 학교 측에 말하지 그랬어요. VIP석을 내줬을 텐데. 저 위쪽에 있는.”
“에잉, 이것도 다 재미지. 그리고 입학식 주인공은 신입생들이지 우리가 아니잖아.”
백철중은 맨손으로 모든 것을 일군 사람이라 그런지, 의외로 사고방식이 트여 있었다.
백철중이 작게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근데 여보, 아까부터 주변에서 우리를 흘끔거리는 거 같지 않소? 아무래도 내가 누군지 알아본 모양인데……. 한 대표, 그렇지 않나?”
“아마 저 때문인 거 같은데요. 제가 학교에서 나름 유명하다 보니…….”
“그, 그런가?”
백철중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송지현이 그것 보라는 듯이 쿡쿡 웃었다.
입학식이 끝났다.
병아리 떼처럼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표지판을 든 과 선배들이 여기저기서 목청을 높이며 신입생들을 인솔했다.
“국문학과 이쪽으로 붙습니다!”
“정치외교학과 여기입니다!”
“수학과 여기로 오세요!”
“기계공학과 여기입니다!”
북새통을 방불케 하는 현장에 백철중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한서진은 그것을 보고 쿡쿡 웃었다.
“두 분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제부터는 학과 행사 위주라서요.”
“그럴까?”
“이만 돌아가요. 이제 젊은애들 타임이라잖아요.”
송지현은 백철중을 잡아끌며, 한서진에게 살짝 눈웃음을 보냈다.
“한 대표, 우리 하나 잘 부탁합니다.”
“네, 걱정 마십시오.”
백철중 부부를 배웅한 뒤, 한서진은 곧장 과 일행을 찾았다.
과 학생회가 표지판을 들고 앞뒤에서 신입생들을 인솔하고 있었다. 송하나도 그 중에 있었다.
수강 신청을 하고, 행사장에서 교수 및 선배들과 처음 만나는 대면식을 가졌다.
“올해 신입생들 대박이던데요. 예쁜 애들이 왜 이렇게 많아?”
“저 봉황 하나 발견했습니다. 아주 죽이던데요. 키 크고 늘씬하고, 얼굴도 그냥 연예인인 줄 알았네요. 와, 그런 애랑 사귀면 어떤 기분일까.”
“누군데?”
“이름은 아직 못 물어봤는데, 아 저기. 쟤요.”
옆에서 2학년 남자 후배들이 대화하는 것을 듣던 한서진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남자애가 가리킨 방향에 송하나가 있었던 것이다.
‘사내놈들 단속하려면 골치 깨나 아프겠군.’
한서진은 굳게 결심했다. 앞으로 학과에 자주 들러야겠다. 그리고 등하교도 매일 시켜줘야지.
대면식과 학장 연설도 끝나고, 뒤풀이 시간이 되었다.
자기소개 타임 중 송하나가 일어섰을 때, 약속이라도 한 듯 우렁찬 환호가 들렸다. 특히 남자들은 단단히 기합이 들어간 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XX학번 송하나입니다. 패션 좋아하구요, 운동도 즐겨 해요.”
“후배님은 남자친구 있습니까?”
짓궂은 질문이 날아왔지만, 송하나는 눈 하나 꿈쩍 않고 대답했다.
“연애는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에이, 거짓말. 그 얼굴로?”
“남자들 대시 엄청 받아봤을 거 같은데, 설마 진짜로?”
여기저기서 짓궂은 질문이 날아들었다. 송하나는 작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전 제가 쟁취하는 게 좋아요. 저한테 대시하는 남자한테서는 매력을 전혀 못 느껴요.”
“우와, 쎄다.”
“감사합니다. 이만 앉아도 되죠?”
시선과 짓궂은 질문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았다.
한서진은 물끄러미 그녀를 주시했다. 이쪽의 시선을 느끼고, 그녀도 생긋 웃으며 바라본다.
「적합.」
통찰안은 여전히 그 이상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한서진은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상관없어.”
============================ 작품 후기 ============================
리미트리스 드림을 완결냈습니다. 그리고 뿌듯한 마음으로 완결 기념 여행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편집자님한테서 톡이 왔습니다.
―작가님, 원고 안 주세요?
―네? 저 완결냈잖아요.
―무슨 말씀? 최신화가 211화인데요?
―이상하다. 완결냈는데…….
―하하하, 작가님도 참. 어제 명절이라고 술 엄청 드시더니 개꿈 꾸셨네. 빨랑 원고나 내놔요.
저도 리미트리스 드림의 저주에 잠깐 걸렸었나 봅니다......
대체 왜 원고가 쓰러지지 않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