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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11화 (211/609)

00211  운명은 기습처럼  =========================================================================

한서진은 직접 직원 면담에 참여했다.

주변에서 의아해하긴 했지만, 큰 수군거림은 나오지 않았다. H반도체는 그가 과거 일했던 직장, 애착을 가지고 복지 확장에 관심을 주는 거라 여긴 것이다.

그가 복지 확장을 기획한 것은 남의 눈을 끌지 않고, 자연스럽게 신효진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녀를 직접 찾아가는 건 보는 눈이 많다.

‘벌써 21명째네.’

H반도체에 이렇게 형편이 어려운 직원이 많았었나. 한서진은 가벼운 자책감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불순한 의도지만, 복지 확장을 결심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 22번 들여보내겠습니다.”

한서진은 순서를 확인하고는 심호흡을 했다.

신효진. 마침내 그녀 차례였다.

“안녕하세요. 제3설비파트 평직원 신효진입니다.”

신효진이 들어선 순간, 임시 면접관들 사이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 나왔다. 한서진도 그들의 심정에 어느 정도 공감했다.

‘저번과는 느낌이 전혀 다르네.’

저번에 스치듯이 본 것과는 달랐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본 신효진은 상당히 괜찮은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피부는 티 한 점 없이 희고 고왔고, 작고 갸름한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탄성이 나올 만큼 조화로웠다.

송하나처럼 화려하게 돋보이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청초하고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매력을 가진 미인이었다. 풀 메이크업을 하고 옷을 갖춰 입는다면, 아마 눈부시게 달라질 것이다.

싱그럽다는 느낌은 없지만 그가 상상했던, 구질구질한 피로감도 보이지 않는다.

한서진을 대신해서 면접을 주도하는 책임자가 입을 열었다.

“신효진 씨는 입사 면접도 아니고 왜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지 지금 많이 의아할 겁니다. 그렇죠?”

“네, 조금은요.”

“사실 직원 복지는 자원 배분에 한계가 있어요. 무한정으로 지원을 해줄 수는 없는 겁니다. 알고 있죠?”

신효진은 긴장한 얼굴로, 알겠다는 듯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자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개별 면담을 통해, 직원이 원하는 방향으로 지원을 해주는 방식을 채택한 겁니다. 물론 내부적인 상한 규모를 넘지 않는 한에서요.”

“저어, 그러니까…….”

“직접 돈으로 주는 건 불가능합니다. 다른 사원들과 형평성도 있고, 세금이나 회계적인 문제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상품권을 달라거나, 혹은 개별 체크카드를 발행하거나, 아니면 아픈 가족을 위한 병원비 지원 등의 형식으로는 해준다는 거예요. 이해하시겠어요?”

“정말이요?”

신효진은 눈에 띄게 기뻐했다. 주먹을 꽉 쥐며 바르르 떠는 모습이, 어지간히도 흥분한 듯하다.

‘통찰안, 왜 저 여자가 반려라는 건데?’

한서진은 낱낱이 신효진을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뜯어보아도 ‘적합’과 ‘반려’라는 판정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한서진은 입을 열었다.

“신효진 씨는 어떤 형태의 지원을 원합니까?”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병원비가 많이 들어요. 병원비 지원을 받고 싶습니다.”

“혹시 신효진 씨는 꿈이 있나요?”

“……네?”

“신효진 씨의 꿈을 이루기 위한 투자 형태로 지원을 해줄 수도 있는데, 그런 소망이나 계획은 없습니까?”

“꿈…….”

신효진이 갑자기 작게 중얼거렸다. 남들 보기에는 별 거 아닌 듯한 혼잣말, 하지만 한서진은 그 점이 몹시 신경 쓰였다.

이윽고 신효진이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나요?”

어찌 보면 당돌하다고 할 수 있는 태도에, 면담관들도 살짝 당황했다. 한서진은 그러라는 듯이 끄덕였다.

“탓할 사람 아무도 없으니,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해 봐요.”

“꿈이 없어요.”

“…….”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들어서…… 거창한 꿈같은 것은 필요 없어요. 집에 가면 자기개발 보다는 잠만 자요.”

세상에 대한 냉소나, 혹은 체념과 피로가 가득한 표정으로 저런 말을 했다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신효진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녀는 얼굴 가득 아무렇지 않은 덤덤함을 띠고 있었다.

저번에 느꼈던 첫 인상과는 조금 달랐다.

내일에 대한 희망은 없으나, 오늘에 지친 피로 또한 없다.

조금만 참으면 나아질 거란 부푼 꿈, 혹은 변하지 않는 현실에 지친 무기력감. 그녀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희망이 없는 현실에 통각이 마모된 탓일까, 아니면…….

“수고했습니다. 돌아가 보세요.”

면담 책임자가 세부 질문을 마치고, 신효진을 돌려보냈다.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옆에서 면담관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저 친구, 그래도 꽤 밝아졌네. 예전에는 음침하더니…….”

이게 무슨 소리지? 한서진은 얼른 그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 한 대표님. 그게요.”

느닷없이 한서진이 말을 걸자 면담관은 어색해서 말을 흐렸다. 한서진이 대답을 재촉하자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효진 저 친구, 부서에서는 나름 유명한 친구였거든요. 17살에 공장일 하겠다고 들어오는 여자애가 흔하지는 않잖습니까.”

“…….”

“보셔서 아시겠지만 얼굴도 굉장히 예쁜 편이구요. 입사 초기에는 왜 이런 여자애가 이런 일을 하나, 그렇게 말들이 많았습니다. 안 좋은 마음 품고 접근한 남자 직원도 꽤 있었고요. 마음고생 엄청 심했습니다.”

“……그랬군요.”

“그래서인가 늘 얼굴이 어두웠어요. 호감 품고 진지하게 다가가던 남자 직원들도 결국 발 돌렸구요. 그만큼 음침했거든요.”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끄덕였다.

자신이 처음 그녀에게 느꼈던 암울함은, 아마도 그 어두운 면의 흔적이리라.

“근데 얼마 전부터 많이 밝아졌어요. 물론 여전히 내성적이긴 합니다만, 예전에 비하면 엄청나게 변한 거죠. 그때는 눈빛에 생기도 없고 말수도 거의 없고…… 오죽하면 동료들 사이에서 얼마 못 버티다 자살하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서류를 보니 환경이 불우하긴 하더군요.”

“아무래도 그렇죠. 솔직히 생산라인 직원들 돈 제법 법니다만, 저 친구는 버는 족족 밑 빠진 독에 부었으니까요. 저라도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짐을 짊어지고 있으면, 사는 게 지옥 같았을 겁니다.”

면담관은 조금 편한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근무 태도만 좀 더 성실하면 좋을 텐데 말이죠.”

“근무 태도요?”

“요새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잔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병이 있는 건가 하고 물어봐도, 그건 아니라고 하니…….”

시도 때도 없이 잠이라.

한서진은 그 말이 왠지 마음에 걸렸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묻어두었다.

“저놈이다.”

선두에 선, 커다란 활을 쥐고 날렵한 옷차림을 한 청년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준비해.”

짧고 굵직한 기세가 담긴 지시. 일행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스칼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의 키만 한 대검을 두 손으로 굳게 쥔 채, 끓어오르는 긴장감을 달랬다.

로브를 입은 동료가 옆에서 격려했다.

“걱정하지 마, 스칼린. 넌 내가 지금까지 봤던 어떤 동료보다 최고야.”

다른 동료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 수도의 기사도 너보다 강하진 못할 거야.”

“너라면 할 수 있어.”

스칼린은 입술을 깨물며, 대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활을 조준한 리더가 뒤를 돌아보며 작게 외쳤다.

“포박진 전개! 스칼린, 준비해!”

“알았어!”

로드를 입은 이가 두 손을 모았다. 그의 손끝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맺혔다.

절벽 아래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을 자고 있는 거대한 생명체, 마룡을 내려다보며 스칼린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긴 모험의 여정이 오늘 드디어 끝을 맺는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마룡, 그 놈을 믿음직한 동료들과 힘을 합쳐 사냥한다.

여기까지 헤쳐 오느라 고생했던 나날을 떠올리며, 스칼린은 체내 깊숙한 곳에서부터 힘을 끌어올렸다. 대검이 그녀의 힘에 반응하듯 웅웅거리며 공명했다.

「Dbich Kellichcper!」

마법사가 주문을 외치자, 마룡이 웅크린 대지가 불타오르듯이 빛을 뿜었다.

심상치 않은 마력의 폭풍에 놀란 마룡이 눈을 번쩍 떴고, 스칼린은 수십 미터 절벽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검과 이미 한 몸이 된 그녀는, 모든 힘을 실은 검끝을 수직으로 꽂은 채 쇄도했다.

마룡이 날갯짓을 하며 입을 쩌억 벌렸다. 순간 입안에서 스파크를 머금은 바람이 쏟아져 나오며, 그녀를 향해 수직으로 솟구쳐 올랐다.

‘마력 숨결쯤이야!’

스칼린은 이를 악물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검과 하나가 된 몸이 눈부신 광채에 휩싸였다.

빛의 덩어리는 마룡의 숨결을 뚫으며, 그대로 입을 찔러 들어갔다. 식도와 내장을 찢고, 거대한 뱃가죽을 뚫고 나왔다.

하늘을 향해 숨결을 뿜어내는 자세 그대로 서 있던 마룡은 이윽고 옆으로 천천히 쓰러졌다.

쿠웅!

몸길이 150미터가 넘어가는 거체가 쓰러지자, 대지가 온통 뒤흔들렸다.

동료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절벽을 타고 내려왔다.

“스칼린! 대단해, 정말 대단해!”

“마룡을 단 한 방에 사냥할 줄이야! 근위단장도 너한테는 상대가 되지 않을 거야!”

작은 섬 하나쯤은 호흡 한 번으로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다는 마룡. 그러나 스칼린에게는 온힘을 다하면 충분히 처치할 수 있는 사냥감에 지나지 않았다.

“우린 이제 부자다! 하하하!”

기뻐하는 동료들을 보며, 스칼린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미처 감기지 않은 마룡의 눈동자 앞에 섰다.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거대한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늘씬한 몸매와 하얗고 작은 얼굴. 단단하게 몸을 감싸고 있는 은색 갑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길 수 없는 유려한 각선미.

외모는 ‘본래의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선홍빛 불꽃처럼 타오르는 듯한 색깔의 풍성한 머리카락은, ‘현실’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이다. 거대한 마룡을 손쉽게 처치하는 강력한 힘과 그에 기반한 자신감 또한 마찬가지다.

“스칼린. 여전사 스칼린…….”

그녀는 고개를 돌려 지평선을 바라봤다.

비옥한 대지가 펼쳐진 광경을 보고 있으니, 세상 무엇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스마트폰 알람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신효진은 눈을 떴다.

잠이 덜 깬 눈으로 더듬더듬 손을 내민 그녀는 알람을 껐다.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묻은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 오늘은 벌써 끝이야?”

그녀는 거울을 들여다봤다.

화장기 없는 작고 흰 얼굴은, 마룡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똑같다. 평범한 머리카락에, 평범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

“그냥 확 출근하지 말고 잠이나 잘까?”

그녀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진짜 생생한 꿈이야. 이런 자각몽도 있을까?’

그녀가 꿈을 꾼 것은 꽤 오래 되었다.

처음에 꿈을 꾸었을 때는 당황했다. 어느 바위에 쓰러지듯이 자고 있다가 깨어났기 때문이다.

자신이 납치된 줄 알았던 그녀는 물속에 비친 모습을 보고 이게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부르르 떨었다.

분명한 꿈, 하지만 현실보다 더 생생한 꿈.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생동감 속에서, 그녀는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곳의 모든 것은 현실인 것처럼 선명하고, 위화감이 없었다. 만약 조그만 자취방에서 잠들었던 기억이 없다면, 이곳이 현실이라고 믿어버렸을지도 몰랐다.

꿈에서 그녀는 강인한 여기사였다.

곰보다 큰 괴물을 손가락 하나만으로 쓰러뜨리고, 검을 휘두르면 땅이 쩌저적 갈라졌다. 수십 미터 높이의 절벽도 간단히 뛰어넘었으며, 떨어지는 바위에 맞아도 다치지 않았다.

그런 꿈이 매일 밤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마치 웅장한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짜릿함에, 그녀는 꿈을 마음껏 즐겼다.

“꿈 깼으니…… 이제 출근 준비나 해야겠다.”

이불을 정리한 그녀는 욕실로 향했다.

강력한 힘과 아름다운 미모로 동료들의 흠모와 찬양을 받는 여전사 스칼린에서, 아픈 모친을 위해 쉴 새 없이 일하는 스무 살의 근로자 신효진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힘들고, 어깨가 무겁지 않았다.

오늘의 초라한 현실이 끝나면, 내일의 화려한 꿈이 다시 찾아와 줄 테니.

============================ 작품 후기 ============================

“혹시 신효진 씨는 꿈이 있나요?”

“출근 안 하고 계속 꿈꾸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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