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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10화 (210/609)

00210  운명은 기습처럼  =========================================================================

반려.

인생의 짝을 일컫는 말.

통찰안이 보여준 그녀의 진실은 적합을 넘어선 그 이상의 것을 뜻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한서진은 우두커니 굳은 채로 움직일 줄을 몰랐다.

복장을 보니 세척 작업을 하는 생산직원이다. 특별한 자격증도 필요 없고,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아마 지금도 한 라인 세척을 끝내고 나오는 길이리라.

‘저 여자가…… 내 반려라고? 어째서?’

멀어서인지 키는 가늠하기 어렵다. 언뜻 보기에는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어깨도 좁고, 전체적으로 가냘픈 느낌이 강했다.

“저어, 대표님?”

옆에서 조심스럽게 불렀다. 한서진은 그제야 현실로 되돌아오며, 조그맣게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어서 가지요.”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그는 걸음을 재개했다.

생산직원들과 엇갈렸다. 그들은 옆으로 비키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나가며, 한서진은 고개를 숙인 그 여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가까이에서 본 얼굴은 화장기가 전혀 없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예뻤다. 그러나 보는 순간 심장이 쿵쾅거리는 그런 설렘 따위는 없었다.

표정 가득 드리운 수척한 피로감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일상에 지쳐 있는 사람의 표정, 몇 년 전 그에게도 익숙한 그 낯빛이 가슴에 저릿한 감각을 남겼다.

그 여자의 명찰에 적힌 소속과 이름을 똑똑히 확인했다.

「신효진.」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 별 거 아닌 세 글자가 이상하게 긴 메아리를 가슴에 남겼다.

공정 개선안 검수 작업을 어떻게 마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ADSC측과 실무진이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보면 그럭저럭 잘 설명을 한 모양이다.

정작 한서진의 머릿속은 다른 고민으로 꽉 차 있어,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회장님께서는 반도체 사업 진출의 첫 성공을 무척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언제 한 번 같이 식사나 하자고 말씀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터번을 두른 ADSC측 인사가 능숙한 한국어로 말하자, 한서진도 기분 좋게 수락했다.

“저야 초대해주시면 감사할 뿐입니다.”

“조만간 자리를 마련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부디 사양치 마시고 즐겨 주십시오.”

어찌어찌 일정은 끝났다. 그러나 한서진은 여전히 고민으로 머리가 터질 듯했다.

‘적합을 넘어선, 반려라고?’

신입생 시절, 무수히 많은 여자들과 소개팅을 하면서도 연애는 하지 않았다. 통찰안이 연애 대상으로서 부적합하다는 결과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통찰안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절대적인 힘이다.

엘릭서 제조법으로 말기암을 낫게 하고, 에테르를 적용한 반도체를 다루는 법을 알려주었다. 국내 최고 명문대에 붙을 수 있게 해주었으며, SJ인더스트리와 50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부를 쥘 수 있게 해주었다.

신앙까진 아니지만, 절대적으로 믿는 힘이자 무기였다. 인생의 바이블이었다.

송하나에게 끌리게 된 건 통찰안의 영향도 조금 있다. 쟤는 정말 괜찮은 여자야, 라고 말해 주었으니까. 적합이라는 판정의 형태를 빌려서.

그래서 마음을 주기 시작했고, 지금은 다른 여자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빠져 버렸다.

‘왜 하필이면 지금…….’

운명이 이렇게 얄궂을 수 있을까.

이제 내일이면 졸업식이고, 그때를 위한 선물을 준비했다. 헌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반려? 그 여자가 내 반려라고? 그럼 난 그 여자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거야?’

통찰안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또한 자신을 농락한 적도 없다.

언제나 올바른 진실만을 알려 주었다. 속임수 같은 것은 일절 없었다.

통찰안을 믿고 움직였기에, 초라하고 가난한 청년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청년 재벌 기업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을 만든 것은 통찰안이다.

그런 힘이 ‘반려’라는 유일한 판정을 주었다. 이것을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

한서진은 주먹을 꾹 쥐었다.

졸업식을 마친 학생들의 표정은 저마다 밝았다. 학사모를 쓰고, 졸업가운을 입은 학생들은 가족과 친구들끼리 모여 기념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송하나는 그 중에서도 단독 발군이었다. 멀리서 보아도 눈에 띄는 미모와 매력을 자랑했다.

백철중과 송지현도 졸업을 축하해주기 위해 직접 왔다.

“우리 하나가 벌써 대학생이라니. 꼬물꼬물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 양반도 참, 아직 입학식 안 했어요.”

“고교 졸업했으면 이제 대학생이지. 안 그런가?”

백철중은 즐거운 듯이 껄껄 웃었다.

졸업식 분위기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경호원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복장도 딱딱한 정장에서 평상복을 입게 했다. 다른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다른 이들은 H그룹 회장 일가가 학교에 왔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한서진도 미소를 짓고 송하나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졸업 축하해. 이제 어른이구나.”

“고마워요, 오빠.”

배시시 웃으며 꽃을 받아든 송하나는 정말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학이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간다는 두려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어, 저번의 그 포르쉐 오빠다. 안녕하세요.”

“하나 남자친구 맞죠?”

그때였다. 송하나의 친구로 보이는 여자애 둘이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송하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질겁했다.

“아니거든! 그냥 친한 오빠야!”

“얘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지도 아는 걸 지 입만 아니라고 하네.”

“좋으시겠어요. 하나 이제 어른 됐으니까.”

짓궂은 놀림에 한서진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하나는 좋겠다. 능력 있는 남자친구도 있고.”

“오빠는 금수저예요, 아니면 자수성가예요?”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당돌하지, 하고 한서진은 당황했다. 송하나는 민망한지 친구들을 닦달해서 쫓아냈다. 친구들은 깔깔거리며 도망쳤다.

“죄송해요. 애들이 좀 짓궂죠.”

“아냐, 친한 것 같아서 보기 좋은데.”

어느새 둘만 남았다. 백철중 부부는 학교 구경을 간 건지, 보이지 않는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흑백 영화의 배경처럼 그들로부터 단절되었다. 어느 순간 둘 다 말이 없어졌다.

한서진은 미리 준비했던 선물을 꺼내 건넸다. 송하나는 좋아하며 그것을 받아 풀었다.

선물은 금색으로 반짝이는 팔찌였다. 이십대 초반 여성에게 어울릴 듯이 얇고 세련된 디자인에, 송하나는 몹시 만족스러워했다.

“예뻐요.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응.”

“오빠, 근데 저한테 하실 말 있으시다면서.”

“…….”

한서진은 잠시 망설였다. 그 침묵에 섞인 번뇌를 읽은 것인가. 송하나의 낯빛도 살짝 가라앉았다.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

“…….”

“근데 그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어.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줄래?”

“조금만 기다리면 되는 건가요?”

송하나는 차분히 반문했다. 한서진은 그렇다는 듯이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조금만.”

“뭘 확인해야 한다는 건진 모르지만…… 그걸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후회가 남겠죠?”

“……아마도.”

“그럼 지금 하지 마세요.”

어느새 송하나는 다시 웃는 얼굴을 한 채 말했다.

“후회 한 점 없을 것 같을 때, 그때 말해주세요.”

“……어.”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2년을 기다렸는데 몇 달 더 못 기다리겠어요.”

마음을 찌르는 울리는 말에 한서진은 그만 흠칫 했다. 방글거리며 바라보던 송하나가 후다닥 등을 돌렸다.

“저 친구들이랑 사진 좀 찍고 올게요!”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살짝 무겁다.

‘반려’를 보았다고 해서 송하나를 향한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신효진, 그녀는 첫눈에 모든 것을 빼앗길 만큼 대단하지도 않았다.

그저 통찰안의 계시를 무시할 수 없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모든 것은 통찰안 덕분에 얻은 것이며, 거기에는 송하나와의 인연도 포함된다.

만약 통찰안을 무시한다면, 지금까지 얻은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런 두려움 때문에라도, 반드시 실체를 확인해야 했다.

‘왜 그 여자가…… 내 반려라는 건데?’

당연하게도 통찰안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올해 20세라……. 하나와 나이가 같잖아.”

참 공교로운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생각보다 앳된 얼굴이긴 했지만, 그래도 스물 하나둘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송하나와 동갑이라니.

“17살에 입사해서 생산직원으로 일했다니…….”

신효진.

그녀는 중학교를 자퇴한 뒤 중등 검정과 고등 검정을 치른 뒤 17세에 바로 H반도체에 입사했다.

한서진이 당시 그녀와 마주치지 않은 것은 공장 규모가 큰 탓도 있고, 직종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재직 기간도 짧은 편이었고.

우연찮게도 그녀와 자신은 H반도체 입사년도가 같았다. 대단할 것도 없는 우연이다.

“……가난하구나.”

보고서를 읽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며, 종이가 꾸깃 구겨졌다.

신효진은 가난했다. 그것도 무척 가난했다.

지병을 앓고 있는 모친은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로, 정부가 지원하는 수급금은 병원비로 깨져 나갔다. 그녀가 버는 돈의 절반 이상은 모친의 생활비와 병원비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부친은 일용직 노동자로, 술에 빠져 일을 하는 나날도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희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환경이다.

한때 한서진도 그와 같은 처지였기에, 내용을 읽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다.

‘뭐야, 나와 같은 처지였으니까 반려라는 거냐?’

아니면 그녀도 자신처럼 특별한 능력을 얻어서 환경을 극복한다는, 뭐 그런 진부한 반전이라도 있단 말인가?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망상이다.

희망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삶.

그 안에서 신효진은 어떤 마음으로 회사를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며, 잠이 들까. 어떤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리며, 미래를 설계할까.

조금만 더 참으면 모든 게 달라질 거란 부푼 꿈?

아니면 변하지 않는 현실에 무기력해진 좌절감?

‘나이 빼고는, 모든 게 달라.’

송하나와 동갑이다. 그러나 공통점은 그것뿐이다.

태어난 환경도, 앞으로 누리게 될 미래도, 어느 것 하나도 겹치지 않는다.

가정, 재산, 미래, 미모 등 송하나는 모든 것을 가졌다. 그에 비해 신효진은 조금 봐줄 만한 얼굴과 스무 살이라는 어린 나이만이 가진 무기의 전부다.

‘직접 부딪쳐 보자.’

한서진은 결심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효진 씨 또 지각이래요?”

“참나. 이번엔 이유가 뭐래요?”

“뻔하죠 뭐. 늦잠 잔 거겠죠. 저번에도 점심시간에 낮잠 자다가 오후 업무에 늦게 왔잖아요.”

“아니, 성실하던 아가씨가 갑자기 왜 그렇게 게을러졌나 몰라. 밤에 대체 뭐 한대? 남자라도 생긴 거 아니야?”

복도 구석에는 여직원들이 서넛 모여 동료 직원 험담을 나누고 있었다. 회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신효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꾸짖는 과장의 노호성이 따랐다.

“신효진 씨, 성실하던 사람이 자꾸 왜 이래? 오늘도 점심시간에 늦잠 잤다며? 그리고 화장실 가서 또 졸았다고? 이게 말이 되는 거야? 대체 밤에 잠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까지만 봐주겠어. 자꾸 이런 식이면 시말서 써야 될 줄 알아. 각오해.”

“네, 죄송합니다.”

“가서 얼굴 좀 씻고, 화장이라도 간단하게 좀 하고 나와. 꼴이 그게 뭐야.”

“……예?”

신효진은 당황했다. 갑자기 웬 화장?

과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신효진 씨, 가정 형편 어렵잖아.”

“……네.”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의 어려운 집안 형편은 이미 사내 동료들 사이에서 속속들이 소문이 나 있었다.

“회사에서 형편 어려운 직원들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복지 정책 추진 중이래. 효진 씨도 1차 선발 대상이니까 지금 가서 면담해야 해. 기왕이면 보기 좋게 꾸미고 가면 더 좋잖아. 그런 뜻이니 오해는 말고.”

“아, 감사합니다!”

신효진은 꾸벅 목례를 했다.

============================ 작품 후기 ============================

“통찰안, 주인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 이제 썸 끝내고 연애 좀 해보려니까 뭐하는 짓?”

“백철중한테 반려 띄우려다가 각도기 바꾼 건데, 지금 따지는 겁니까?”

“……잘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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