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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09화 (209/609)

00209  운명은 기습처럼  =========================================================================

“허억!”

한서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났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주변에 낮게 내려앉은 어둠이 보인다.

이곳이 침실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아직도 손끝이 저릿하게 떨려왔다.

‘뭐지? 대체…….’

꿈속의 왕국에서, 오늘 만난 그 여자.

틀림없다. 그 여자는 분명히 왕이 아닌 ‘자신’을 인지했다.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것은 왕을 비롯하여, 그 세계의 다른 누구도 듣지 못하는 목소리였다.

‘전에도 한 번 이랬는데.’

한서진은 처음 꿈을 꾸었을 때를 떠올렸다.

왕궁의 정원에서 홀로 서 있던 그때, 노인이 와서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었던 기억을.

‘폐하. 그곳의 모든 것은 폐하를 현혹시키는 꿈이자, 거짓입니다. 그것을 결코 잊지 마소서.’

한서진은 차분히 호흡을 골랐다.

노인은 그때 분명히 말했다. 자신이 사는 이곳 세상이 꿈이자 거짓이라고.

하지만 여자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그곳이 거짓이며, 이곳이 진짜라고.

둘 중 누가 옳은 말을 하고 있는가. 누가 그른 것인가.

아니, 그들은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차분히 숨을 뱉던 한서진은 문득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송하나가 보낸 톡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아빠가 오늘 와줘서 고맙대요.

―주무시나 보네요. 내일 봐요.

그러고 보니 집에 오자마자 뻗었던 기억이 났다. 새벽까지 마신 여파가 좀 컸다.

한서진은 답을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타이핑을 했다.

―지금 잠깐 일어났어. 오늘 나도 재밌었어. 너도 잘 자.

잠시 후 스마트폰이 위잉 하고 진동했다.

―네, 푹 주무세요.

짤막한 답변이었다.

한서진은 조용히 미소 짓고는, 다시 잠을 청했다.

$2,991,782,910

미국 계좌에 찍힌 입금액이었다.

ADSC는 분기마다 회계를 정리한다. 5nm공정기술 특허 로열티도 그때마다 정산해서 지급한다.

“29억 9천만 달러?”

한서진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4/4 분기 로열티로 무려 30억 달러 가까이 되는 금액이 입금된 것이다.

그의 몫이 40%이니, 기술 하나로 벌어들인 돈이 근 74억 8천만 달러에 육박한다는 뜻이다. 겨우 3개월 동안.

“역시 로열티 장사가 최고라니까.”

미국이니까 세금도 엄청 나올 것 같다. 회계 처리를 L국에서 하는 건 어떨까, 하고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포기했다.

“귀찮으니까 그냥 투명하게 가자.”

L국은 SJ인더스트리의 소유권과 500억 달러를 관리하는데 중요한 나라다. 자잘한 로열티 세금 문제를 처리하는데 남용하는 것은 좀 그랬다. 소 잡는 칼을 닭 잡는데 쓰는 셈이니.

‘언제부터 29억 달러가 자잘한 돈이 됐는지.’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설계 사무소는 돈만 잡아먹을 뿐, 특별한 이익을 내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어도 굴러들어오는 돈 덕분에 운영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애초에 수익 사업을 위해 차린 회사도 아니고.

출근 준비를 마친 한서진은 침실을 나섰다. 1층에서 영화 감상을 하고 있던 한지혜와 마주쳤다.

“출근해?”

“어. 넌 좋겠다. 방학이라고 집에서 뒹굴뒹굴만 하고, 연애는 안 하냐?”

“쓸 만한 남자가 없어.”

그는 문득 한지혜의 학교생활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학교에서는 모르지? 너 내 동생인 거.”

“모르지. 그걸 뭐 하러 말하고 다녀. 잘 사는 집 딸내미라고만 알고 있어.”

“내년에 이제 2학년인가. 다녀보니 어때?”

“청춘이라는 느낌? 그러고 보니 오빠, 내년이면 하나하고 선후배 사이 되겠네.”

“어, 그렇게 됐네.”

한서진은 괜히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머리를 긁었다.

한지혜는 짓궂은 눈으로 빤히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애기니까 많이 좀 위해 줘. 오빠만 보고 경영학과에서 반도체공학부로 바꾼 건데.”

“어련히 알아서 잘 챙겨줄까. 그리고 애기가 뭐야, 너보다 키도 더 크구만.”

“키만?”

“닥치고 영화나 보세요.”

본채를 나선 한서진은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올랐다.

사무소에 출근한 그는 간단히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

설계와 프로그래밍은 대강 끝났다. 내년 초면 시범 제작 수퍼컴퓨터가 일차 완성될 듯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올해 마지막 날이니까 다들 이만 퇴근하세요.”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시도 안 됐는데 퇴근을 지시하자 직원들은 다들 좋아서 난리였다. 아마 이 회사보다 복지가 좋은 곳은, 국내에서는 절대 없을 것이다.

한서진은 차를 몰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근처 모퉁이를 도는데, 마침 저쪽에서 걸어오는 송하나가 보였다. 그는 얼른 속도를 줄이며 차를 가져다 댔다.

“춥겠다. 근처 아무 데나 들어가서 나 부르지 그랬어.”

“괜찮아요. 저 뭐 사주실 거예요? 배고픈데.”

“고기 어때?”

“고기 좋아요.”

고기에 신이 나서 표정부터 달라진다. 이런 걸 보면 역시 아직 소녀라는 느낌이 든다.

밝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는데, 문득 꿈속의 그 여자가 생각났다.

‘나의 왕이시여.’

얼굴이 보이지 않던, 무척 아름다웠을 것 같던 여자. 목소리가 참 맑고 고왔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한서진은 문득 보이지 않던 그녀의 얼굴에 송하나를 대입하는 자신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무의식중에 그 여자가 송하나이기라도 바라는 것일까. 그는 잡생각을 떨쳐내며 핸들을 꺾었다.

“오빠, 방금 무슨 생각했어요?”

“어, 응?”

한서진은 살짝 당황했다. 얘, 왜 이렇게 감이 좋지?

“제 얼굴 보시면서 다른 생각 한 것 같아서요. 무슨 생각하신 거예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오늘 화장 잘했구나 싶어서…….”

“거짓말 같은데. 에이, 봐드릴게요.”

한서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시 딴생각한 것을 귀신같이 캐치하다니. 여자들이란 다들 이렇게 감이 발달한 것일까.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뒤, 실내 스케이트장에 갔다. 송하나는 스케이트도 능숙하게 잘 탔다. 한두 가지 운동만 즐겨 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한서진은 버벅거리며 그녀한테 스케이트를 배웠다. 넘어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때마다 그녀 앞에서 쪽팔렸다.

“이 정도면 초보 치고는 잘 하신 거예요.”

그녀가 손을 잡고 이끌어주며 격려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언제 손을 잡았지?

‘우린 무슨 사이일까.’

한서진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친한 오빠와 동생. 그게 전부는 아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송하나는 어떨까? 정말 친한 오빠로만 자신을 보고 있을까?

“저 이제 내일이면 스물이에요. 아빠가 새해 첫날에 저, 술 주신대요.”

“좋겠네.”

“조금 있으면 저 졸업식인데, 오빠 잊지 않으셨죠? 저 졸업 선물 원하는 거 주시기로.”

“안 잊었어. 걱정하지 마.”

“엄청 비싼 거 부탁할 거예요.”

무엇을 요구할지 부담은커녕 기대만 되는 걸 보면, 자신도 어지간히 빠진 모양이다.

“나도 졸업식에 가도 되지?”

“당연히 오셔야죠. 안 오면 선물을 어떻게 주시려구요?”

“그때 내가 할 말이 있어.”

“…….”

송하나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처음으로 보는 긴장감,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일지.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 톤이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해가 바뀌었다.

한서진 남매는 백철중 회장 저택에 초대받아서 새해를 같이 맞이했다. 한지혜는 처음 대하는 백철중 회장 앞에서 싹싹하게 굴며 그의 귀여움을 샀다.

“우리 하나도 이렇게 귀여운 맛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자네는 참 좋겠어. 이런 귀여운 여동생이 있어서.”

“하나가 얼마나 귀여운데요.”

“애비 앞에서 얼마나 새침한지 자네는 모를 거야.”

“제 동생도 오빠 앞에서는 얼마나 징글징글한데요.”

한지혜는 특유의 사교성을 적극 활용해서 송지현과도 금세 친해졌다.

어떻게 재벌 2세를 꼬셨는지 조금 궁금했는데, 옆에서 차분히 지켜보니 알 것 같기도 하다. 저렇게 사근사근하게 굴면 안 넘어올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집에서랑 완전히 딴판이네.’

그는 술잔을 입에 대며, 문득 송하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당당하게 술잔을 쥐고 있었다. 이제 어른이 되었다며 백철중이 잔을 권한 것이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환청과도 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모두가 그대를 속이더라도, 그것을 잊지 마세요.’

그는 얼굴을 가볍게 찡그렸다.

순간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든 음색은, 자신이 아는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아니, 꿈속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와 일치하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자네, 얼굴이 왜 그러나?”

“아닙니다. 일적으로 절 괴롭히는 문제가 있는데, 그게 잠시 생각나서요.”

“그런 고민은 이런 날에는 잠시 접어두게. 자자, 한잔 받게나.”

“예, 회장님.”

졸업식이 벌써 내일로 성큼 다가왔다.

사무소를 퇴근하기 전 한서진은 미리 준비한 선물을 챙겼다. 내일 잊지 않기 위해서, 미리 차에 실어둘 생각이었다.

“퇴근하십니까, 대표님?”

“H반도체 공장에 잠시 들릴 거예요. 5nm공정 관련해서 잠시 기술 자문이 필요하다고 해서.”

“아, 그럼 ADSC측도 나와 있겠군요.”

“네, 그래서 제가 직접 가야 합니다. 저도 거기서 바로 퇴근할 테니, 여러분들도 시간 되면 퇴근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한서진은 H반도체 공장으로 차를 몰았다.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바뀐 곳, 아직도 이곳을 올 때면 여러 가지 만감이 교차하곤 한다.

만약 정지원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여기저기 뜯기고 다니느라 지금처럼 큰 부자는 되지 못했을 것 같다.

아마 백세완의 오른팔에 만족하며, 황금 사슬을 정성스럽게 반짝반짝 닦고 있지 않았을까?

‘하나가 이제야 겨우 졸업이라니.’

새삼 그녀를 처음 만난 기억이 떠올랐다. 백철중의 비서인 줄 알았던 첫 만남.

그러고 보니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했을까? 당시 자신은 H그룹에서 갓 독립한, 아무것도 없는 일개 설계 사무소 대표였을 뿐인데.

무엇이 그녀에게 호기심을 주었을까?

‘아무튼 하나가 드디어 대학생이 되는구나. 길었다, 진짜.’

같이 캠퍼스를 누빌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흐뭇해진다.

어느덧 그는 H반도체 공장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공장장을 비롯한 H반도체 임원들이 영접을 위해 나와 있었다. 호텔도 아닌데 주차 관리 요원이 대신 키를 받아서 주차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ADSC에서 나오신 분들은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렇게 몰려나오실 필요 없습니다. 몇 가지만 확인하고 바로 돌아갈 건데요.”

“중요한 분이신데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H반도체 부사장은 한서진 앞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사장은 지금 ADSC측 인물들을 대접하고 있다고 했다.

“정확히 무슨 문제인 거죠?”

“문제랄 것까진 아니고, 좀 더 효율적인 공정 개선안이 몇 가지 올라왔는데, ADSC는 그것을 채택하기 전에 대표님의 의견을 구하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실전 배치 전에 확실한 분한테 검수를 받는 게 안전하니까요.”

“아아, 그렇군요.”

한서진은 부사장과 공장장을 포함한 H반도체 임원들을 마치 수행원처럼 거느린 채, 생산라인을 걸었다.

작업복을 입은 직원들이 바쁘게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다.

저쪽에서는 흰 방진복으로 온몸을 무장한 십여 명의 직원들이 막 나오고 있었다. 설비 세척을 마치고 나오는 모양이었다.

한서진은 그들이 헬멧을 벗는 모습을 무심코 스쳐보았다.

그때 가장 뒤에 있는 여직원의 얼굴에 시선이 닿았고, 그는 감전된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작았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는 마치 세상에 지친 듯한 가련함을 띠고 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멀리서 보아도 미인 소리는 듣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서진이 놀란 것은, 우연히 마주친 생산직원이 생각보다 예뻤다는 시시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적합.」

송하나를 제외한, 어떤 여자한테서도 보지 못한 적합 판정.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반려.」

한서진은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굳어 버렸다.

============================ 작품 후기 ============================

여기서 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끊겠습니다.

풍성한 한가위 되세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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