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8 H그룹, 연말 행사 =========================================================================
한국대에서 500억 달러의 잭팟이 터졌을 때, 재계는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머리 좋은 대학생 하나가 기술로 대박을 냈네, 이렇게 가벼이 보고 있었다.
500억 달러는 대단한 힘이지만, 그것을 쥔 주인은 어수룩한 어린 청년 아닌가.
만약 그가 ‘그들만의 리그’에 편입하고자 한다면, 기꺼이 유리천장을 열어줄 마음도 있었다.
외부 수혈은 반기지 않지만, 그게 500억 달러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는가.
그러나 그가 진성그룹을 상대로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하면서, 만만하게 보던 시선은 싹 사라졌다.
재계는 그동안 두 가지 착각을 품었다.
그는 ‘리그의 규칙’을 지킬 의사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500억 달러는 주인이 어수룩한 청년이라도 냉혈한 기업가로 탈바꿈시키는 무기였다.
“한서진 회장, 반가워요. 나는 신지호라고 합니다.”
잠시 송하나가 사라진 사이,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나이는 50 정도 되었을까. 처음 보는 남자였다.
「호텔라테 부회장 신지호」
명함을 보고 한서진은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국내 유통 및 서비스업의 최강자, 라테그룹 사람이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방금 저를 뭐라고 부르신 건지…….”
“허허, 평소 한 회장이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걸 보고 내심 응원하고 있었어요. 이렇게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돼서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신지호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한서진은 ‘회장’이라는 칭호에 가볍게 닭살이 돋았다.
“제가 회장 직함은 없습니다. 그냥 대표 정도라 불러주시면 족합니다.”
“하하하, 그래요. 한 대표.”
신지호를 출발점으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인사를 하러 왔다. 대부분 차기 그룹 후계자거나, 혹은 회장 다음 가는 그룹의 2인자들이었다.
“델지전자 구허원 사장입니다.”
“SKK통신의 최민식 사장입니다.”
이름만 대도 누구나 알아볼 그룹의 실권자들이 앞을 다투어 인사를 청했다. 최대한 점잔을 떤다지만, 스물여섯 청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였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걱정했는데, 이렇게 먼저 말도 걸어주시고 감사합니다.”
한서진은 담담하게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들 앞에서 기가 죽거나, 긴장하지도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들 중에서 백철중, 이서나보다 급이 높은 이는 없다. 긴장을 해야 할 이유 자체가 없는 셈이다.
“오늘은 자리가 마땅치 않군요. 언제 한 번 찾아뵙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SKK통신의 최민식 사장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H통신 때문인가.’
짐작 가는 것은 그거 밖에는 없다.
한서진은 어떡할까 하다가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했다.
“그러시지요. 학교나 사무소에 찾아오시면 저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재계 상위 서열은 대강 인사를 나눴다. 30위 밖의 그룹 인사들은 멀리서 머뭇거리기만 했다. 쉽게 다가올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한 대표님 좀 잠깐 빌려갈게요.”
어느새 다가온 송하나가 웃는 얼굴로 양해를 구하며, 한서진의 팔을 가볍게 잡아끌었다. 팔꿈치를 스치는 손길에 가슴이 조금 뛴다. 지금 팔짱 낀 거, 맞지?
“오빠, 완전히 인기 스타네요.”
“그러게. 나도 조금 당황했다. 이런 건 익숙하질 않아서.”
“거짓말, 아주 자연스러우시던데요.”
“그래 보였어? 속으로는 얼마나 떨었는데.”
“전혀 안 그래 보였어요. 오빠도 이제 정말 엄연한 기업인이네요.”
“기업인이라…….”
한서진은 가볍게 쓴웃음을 지었다.
선망과 질시, 수퍼카, 사치, 명품, 파티, 그리고 재력.
통찰안을 얻고 겨우 2년이 지났는데, 어느덧 저런 것들이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앞으로 2년이 더 지나면 과연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하지만 그 꿈에 비하면…….’
모두 위에 홀로 고고하게 선 왕을 떠올리며, 한서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에테르를 자유로이 다루는 문명. 그 신비함에 비하면 지금 자신이 이룩한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리라.
이곳 현실에서는 이미 모든 것을 이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곳 꿈에 관해서는, 아직도 제자리걸음 수준이다.
‘알고 싶다.’
통찰안, 에테르, 미스릴, 오리할콘, 그리고 미지의 왕국. 그 신비로운 세계관을 낱낱이 알고 싶었다.
계좌에 쌓인 몇 백 억 달러의 현금 따위는, 그 환상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가치일 테니.
“근데 지혜 언니는 왜 안 부르셨어요?”
“걔가 여기 와서 뭐해.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덧붙였다.
“뉴월드그룹이랑 마주치면 어색하기만 할 테고.”
그렇지 않아도 뉴월드그룹 회장 이재희는 먼발치에서 자신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한서진은 그 시선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가볍게 조소했다.
‘뉴월드그룹이 진성그룹 방계라 했었지, 아마.’
이재희는 자신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을 것이다. 직계의 계열사도 뺏은 사람이 방계를 못 건드리란 법은 없을 테니.
“그래도 다음부터는 이런 자리에 언니도 같이 나와요. 언니, 오빠가 데려가주지 않을까 엄청 기대하셨는데.”
“그랬어? 근데 나한텐 말 안 하던데.”
“쑥스러워서 그런 거죠.”
“그럼 지금이라도 부를까?”
“오늘은 너무 늦었어요. 진성그룹 행사 때나 같이 데려가줘요.”
둘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이지 않는 벽이 쳐진 듯, 주변에 사람이 전혀 없다. 다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물러서 있다. 배려일까, 아니면 경외심일까.
오늘 송하나는 짙은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시선을 잡아끄는 경이로운 라인을, 두꺼운 털이 달린 숄로 길게 덮어 살짝 가렸다.
시상식을 맡아도 이상하지 않은 화려한 차림, 그러나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녀에게는 저런 화려함이 어울렸다.
“아, 맞다. 성적 오늘 나오지 않았어?”
“치, 이제야 물어보시는구나. 1등급이에요. 최저 등급은 달성했어요.”
“오, 그럼 합격 확정이야? 축하해.”
“고마워요.”
송하나는 배시시 웃으며 덧붙였다.
“이제 오빠랑 동문 후배예요.”
“우리 과, 군기가 제법 쎄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벌써부터 내년 캠퍼스 생활이 기대된다.
H그룹 연말 파티에 참석한 재계 인사들은 파티를 즐기면서도, 신경은 온통 한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정확히는 두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파티장 한곳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며 웃고 떠드는 젊은 남녀. 마치 시간이 온통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한서진과 송하나, 둘을 보며 재계 인사들은 확신했다.
“맞나 본데.”
“분위기 보면, 거의 확실해. 약혼한 사이라더니 역시…….”
“그러니까 백 회장과 그렇게 끈끈하지.”
근래 재계에 은밀히 감도는 소문. 다름 아닌 한서진이 백철중의 사위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H그룹은 송하나 양한테 준다고 했는데,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한 대표가 실권을 휘두르지 않을까? 백 회장이 5년 뒤에 은퇴한다 해도, 송하나 양은 아직 24, 25살이야. 그룹을 맡기에는 너무 일러.”
“5년도 사실 너무 늦지. 지금 백 회장 나이를 생각해 봐.”
500억 불의 청년 재벌과 재계 2위 그룹의 결합.
이는 기존 재계 구도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진성그룹은 곧 1위 자리를 내줘야할지도 모른다. 더 무서운 것은 이서나 회장 또한 한서진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년 국내 사업…… 아무래도 순탄하진 않겠는데.”
한서진은 꿈을 꾸었다.
광활한 들판이 눈앞에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푸른 초목의 냄새가 폐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며 싱그러움을 남긴다.
‘아, 드디어…….’
그는 기뻤다.
드디어 다시 꿈속으로 직접 들어온 것이다. 타르타로스를 통해 엿보는 것이 아닌, 직접적인 진입이었다.
‘정말 생생하구나.’
꿈속임을 인지하고 있지만, 꿈같지 않게 생동감이 넘친다. 단순히 자각몽을 넘어선 또렷함이다.
이곳이 진짜 꿈속 세상이기는 한 걸까, 순간 그런 의문까지 생겨날 정도다.
그러나 이곳이 꿈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었다. 바로 제대로 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사방이 웅얼거리듯이, 인식이 불가능한 소음의 파동만이 느껴질 뿐이다. 고장 난 스피커로 영화를 보는 듯한 감각이다.
한서진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창과 칼을 든 군병이 끝도 없이 도열해 있었던 것이다.
몇 만? 아니면 몇 십 만?
군마를 타고 육중한 갑옷을 입은 그들이, 오로지 자신의 얼굴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용맹한 군세, 한서진은 가슴이 떨렸다.
바로 그때, 한서진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한서진은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누군가의 몸에 들어와 있음을.
그 사람의 시선을 통해 이곳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고, 인식하고 있는 것임을.
“……!”
알아들을 수 없는 함성이 웅웅거리며 사방을 뒤흔든다. 찢어진 북에서 나는 소리가 이러할까.
순간 한서진은 쏜살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지평선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온다.
수퍼카로 대교도로를 마음껏 누빌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속도감에, 한서진은 숨이 턱턱 막혔다.
‘안 돼! 절벽이야!’
한서진은 기겁했다. 땅이 끊어지며 나타난 절벽, 그 위로 자신이 뛰어들었던 것이다.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건?’
틀림없다. 도시 상공을 자유롭게 유영하던, 용을 닮은 그 신비한 생물이었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일단 압도적으로 컸다. 대체 크기가 몇 배나 차이가 나는 걸까.
녀석은 황홀한 황금 비늘로 온몸이 뒤덮여 있었다. 한 번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빼앗길 정도로 아름답고, 위용이 넘친다.
한서진은 빠르게 낙하하며, 용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
순간 용이 굉음과도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온몸을 뒤틀었다. 한서진, 아니 한서진이 빙의한 인물은 사정없이 용의 비늘을 잡아 비틀었다.
턱 밑에 존재하는 유일한 붉은 비늘을 향해, 한서진은 손을 뻗었다.
용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빠르게 수직으로 상승했다. 아찔한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대지는 시리도록 푸른 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광경에 취할 새도 없이, 한서진은 용과 끊임없는 사투를 벌였다.
치열하게 이어진 사투, 마침내 용은 한서진에게 굴복했다.
어느새 얌전해진 용을 타고, 한서진은 당당하게 군병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군병들은 창을 높이 치켜 올린 채, 그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
그 순간, 어느새 나타났는지 로브를 입은 노인이 공손히 다가왔다. 신기하게도 그는 허공에 살짝 떠 있었다.
귓가를 감싼, 웅얼거리는 잡음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노신하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하게 변한다.
처음 듣는 언어지만, 한서진은 신기하게도 그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초룡을 취하신 것을 축하드리옵니다, 폐하.”
한서진이 빙의한 인물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신하를 지나쳤다.
‘아…… 뭐지?’
순간 한서진은 기묘한 두근거림에 휩싸였다. 발자국 하나하나에서 떨림이 전달된다.
그가 향한 곳은 군진의 외곽이었다.
그곳에는 한 인물이 홀로 조용히 서 있었다. 늘씬하고 가녀린 체형을 보면, 아마도 여자가 틀림없으리라.
타오르는 듯이 붉은 머리카락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착각마저 준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에 가려진 것도 아니다.
그저 인식의 범위를 벗어난 것처럼, 여자의 얼굴만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침내 초룡을 얻으셨군요. 이름은 무어라고 지으실 생각이신가요, 폐하?”
“타르온, 타르온이라 하겠소.”
“멋진 이름입니다, 폐하.”
여자의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목소리와 분위기만 보아도, 무척 아름다운 여자일 듯하다.
왕이 손을 뻗어 여자를 품으로 당겼다. 여자는 왕의 목을 끌어안으며 품에 얼굴을 묻었다.
기분 좋은 체향이 폐부에 깊이 스며든다. 그 달콤한 황홀감에 취해 있을 때, 문득 여자가 속삭였다.
“어찌하여 이곳에 다시 오셨습니까.”
한서진의 의식은 순간 흠칫했다.
왕은 그 말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그것은 ‘왕’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의 왕이시여. 이곳의 모든 것은 꿈이자 거짓이며, 그곳만이 진실입니다.”
여자의 속삭임을 전혀 듣지 못하는 것처럼, 왕은 다정히 그녀의 어깨를 보듬기만 했다.
“모두가 그대를 속이더라도, 그것을 잊지 마세요.”
============================ 작품 후기 ============================
결국 한서진이 타르온을 봐버리고 말았습니다.
트, 트레이드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