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7 H그룹, 연말 행사 =========================================================================
가을은 화살을 날린 듯이 빠르게 지나갔다.
사무소 수퍼컴퓨터 프로젝트도 성과가 있었다. 한 달 전 타르타로스는 OS 업데이트를 했다. 이전 버전보다 최적화도 이뤘고, 성능도 조금 나아졌다.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보면 내년쯤에는 첫 작품이 나올 것 같습니다.”
하정태는 그렇게 보고했다. 요즘은 그가 존대를 사용하는 비중이 부쩍 늘었다. 사적인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한다는 뜻이다.
한서진은 수퍼컴퓨터 개발 과정 덕분에 타르타로스 커스터마이징에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수퍼컴퓨터 개발 사업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붓는다고 우려하고 있지만, 그에게는 투자 목적에 따라 충실한 성과를 내는 프로젝트였다.
“단기적인 이익을 바라고 회사를 운영하는 게 아닙니다. 10년 이상의 장기적인 비전을 품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둘러대면 다들 끄덕이며 납득하곤 했다.
500억 불의 현금 자산은 뜬구름 잡는 듯한 그의 이상에 단단한 신빙성을 부여한다.
송하나는 거의 만나지 못했다. 한 달에 한 번 겨우 얼굴을 볼까 말까 할 정도였다.
대신 톡은 조금씩이라도 거의 매일 나눴다.
―내일 수능이지? 떨지 말고 쉬엄쉬엄 해.
―저 무지 떨려요.
―내가 쳐봐서 아는데 별 거 없어. 네 모의고사 성적이면 충분해.
그녀는 이미 수시 모집을 통과했기에, 정시에서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최저 등급만 달성하면 된다. 1등급 커트라인만 넘기면 그대로 합격이다.
―일찍 자. 그래야 내일 최상의 컨디션으로 수능 치르지.
―알겠어요.
톡을 마치고, 한서진은 기지개를 켰다.
타르타로스와 연결된 주모니터에는 복잡한 3차원 설계도 일부분을 확대한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은색 선이 수도 없이 얽혀 있고, 빼곡하게 매달린 빈틈에 푸른 빛의 덩어리가 잔뜩 고여 있는 모습이다.
은색 선은 물질의 입자 구조를, 그리고 푸른 빛은 에테르 에너지가 고인 것을 나타낸다.
입자 설계도는 다름 아닌 오리할콘의 입자 구조도를 3차원 그래픽 값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제야 끝났다.”
그는 한 달이 넘는 지난 시간 동안, 오리할콘을 분석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실물이 손에 없다 보니 생각보다 작업 속도는 더뎠다. 그나마 통찰안으로 오리할콘을 꿰뚫어보지 않았으면, 아예 성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스릴은 에테르의 흐름을 제어하고, 오리할콘은 에테르 그 자체를 저장할 수 있구나.”
미스릴, 오리할콘.
아마도 그 꿈속 세상에서 사용하는 용어일 것이다.
“난 겨우 미스릴을 응용해 겨우 케르베로스 정도나 만들었을 뿐인데…….”
에테르에 통달한 그쪽 문명은 얼마나 무궁무진한 발전을 이루었을까?
한서진은 손을 놓고, 한숨을 쉬며 물끄러미 오리할콘의 입자 구조도를 주시했다.
“분석은 다 끝났는데…… 실물을 어떻게 제조해야 할지 이거 좀 곤란한데.”
오리할콘 제조에는 최종적으로 강력한 에테르의 압력이 필요하다. 그런 극한의 환경을 견뎌낸 미스릴이 마침내 오리할콘으로 변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쉽게 제조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그런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난관에 부딪쳤다.
타르타로스는 에테르를 조절할 줄 안다. 따라서 에테르 과부하 환경 조성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남의 눈을 완전히 피해서 그런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그리고 주변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은 장담할 수 없다.
“그래도 미국보다는 내가 훨씬 유리하지.”
오리할콘에 담긴 에테르 에너지를 올바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에테르를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 에테르 언어를 모르는 니트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한서진은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통찰안이 만들어준, 결코 좁힐 수 없는 격차였다.
수능을 마친 송하나의 얼굴은 무척 밝았다.
종료 시간에 맞춰 시험장으로 마중을 나간 한서진은, 저 멀리 친구들과 즐겁게 걸어오는 그녀를 보고 마음이 포근해졌다.
차를 발견한 송하나가 잠시 멈칫했다. 주변 친구들이 깔깔거리며 뭐라고 장난을 쳤다. 그녀는 잠시 티격태격하더니, 친구들을 놓고 서둘러 차로 뛰어왔다.
“수능 잘 봤나 보네. 얼굴 보니.”
“네, 커트라인은 맞출 거 같아요. 살았죠, 뭐.”
“저녁 먹으러 갈래?”
“근데 저 아빠가 바로 들어 오랬는데. 아, 오빠도 같이요.”
“회장님이?”
한서진은 의아했다. 무슨 일이기에 자신에게 직접 말 않고, 송하나를 통해 전달한 것일까.
“별 건 아니고 수능 끝났으니 식사나 같이 하시자는 모양인가 봐요. 오빠, 시간 되세요?”
“시간 되지. 알았어, 가자.”
“제가 말해놓을게요.”
한서진은 한남동 저택으로 방향을 돌렸다.
백철중은 일찍 퇴근해서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둘이 들어오자 그는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게. 참, 하나 너는 수능 잘 봤니?”
“네, 잘 봤어요. 어차피 수시에 필요한 최저 등급만 충족하면 돼요.”
“다행이구나.”
자리에 앉는 사이, 송하나는 교복을 갈아입으러 갔다.
백철중은 그에게 미리 준비한 위스키를 한 잔 권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음…… 다름이 아니고 조만간 그룹 차원에서 연말 기념행사를 할 예정인데 말이야.”
“아, 네.”
“이번에는 좀 대대적으로 할 생각일세.”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하나도 곧 성인이지 않나. 이참에 재계에도 공개적으로 내보이고, 내 다음 후계자라는 것을 못 박을 생각이야. 지금까지는 대외적으로 내 혼외자였지, H그룹 일족은 아니었으니까.”
아예 쐐기를 박겠다는 것인가. 한서진도 찬성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참고로 얼마 전에 하나 엄마와 혼인신고도 했네.”
이혼 후, 당시 송지현과 재혼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유산 문제로 자녀들이 결사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혼으로만 남았다.
하지만 이제 자녀들 중 그의 뜻을 꺾을 이는 없었다. 유언장에도 모든 보유 지분을 송하나에게 주겠다고 명시를 했고. 혼인신고를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나가 좋아하겠네요.”
“그래도 성은 바꾸지 않겠다고 우기더군.”
“회장님께는 죄송한 말인데, 백하나보다는 송하나가 훨씬 예쁜 이름이긴 합니다.”
“혹시 하나 앞에서 그런 말 한 적 있었나?”
“아마 한두 번 정도는 그랬던 것 같기도…….”
백철중은 잠시 얼굴을 찡그렸고, 한서진은 괜히 미안해졌다.
“아무튼 연말 행사에 자네도 와줬으면 좋겠어.”
“제가요?”
“자네는 H통신의 대주주 아닌가. 얼마든지 참석 자격이 있다네. 자네도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줬으면 좋겠군.”
그룹 파티를 대대적으로 할 모양이었다. 한서진은 잠시 얼마 전 백철중의 생일 파티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했지만, 나름 유익했던 시간이었다. 그는 어렵지 않게 승낙했다.
“초대해주시니 저야 감사할 뿐입니다.”
“하하, 따로 초대장은 필요 없으니 몸만 오게. 자네 얼굴이 곧 초대장이니까. 시간과 장소는 하나한테 듣고.”
“알겠습니다.”
통통한 두 손이 어울리지 않게 날렵한 움직임으로 옷매무새를 다듬어 나간다. 미스터 얀은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하나 쏭이나, 고객님 같은 분들은 특별히 거창한 스타일이 필요 없어요. 옷걸이 자체가 이미 명품인 걸.”
“……아, 네. 감사합니다.”
“그냥 세세한 디테일만 살려줘도 충분해요. 내 옷은 두 분의 품격을 그저 거들고, 돋보여주는 역할에 지나지 않아. 바로 지금처럼 말이죠.”
마무리 작업을 마치고, 한서진은 대형 거울 앞에 섰다.
은은한 품격이 묻어나는 말쑥한 고급 정장, 거울 속에는 누가 봐도 감탄이 나올 만큼 멋진 청년 기업가가 서 있었다.
아직 이런 모습은 봐도, 봐도 낯설기만 하다.
미스터 얀은 두어 걸음 물러서서 팔짱을 끼며 만족스러운 감정을 나타냈다.
“내 작품이지만 정말 근사해. 누가 보면 레드 카펫 밟으러 가는 줄 알겠어요. 그렇지, 하나 쏭?”
“고맙습니다, 얀 선생님.”
“하나 쏭의 코디 부탁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나 자신도 너무 즐겁거든. 이런 최고급 옷걸이들은 흔치 않아.”
통통한 체격, 그리고 살짝 간드러진 듯한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 이제는 제법 정이 간다.
“자, 오빠. 이제 메이크업 하러 가요.”
“메, 메이크업?”
“우리 하나 쏭, 눈이 여간 높은 게 아니니까 좀 시달릴 수 있어요. 건승을 빌어요, 젠틀맨.”
미스터 얀은 나른한 표정과 작은 박수 동작으로 배웅했다.
한서진은 두어 시간에 걸친 풀 메이크업을 끝내고서야 겨우 해방될 수 있었다. 무슨 남자가 화장이야, 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거울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오빠도 맘에 들죠?”
송하나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화장했다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는 자연스러운 스타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피부톤을 정교하게 정돈하고, 미묘한 음영 처리로 분위기를 살려냈다.
“자, 이제 가요.”
그룹 연말 행사는 영화 시상식을 방불케 할 정도로 성대했다. H그룹은 오늘 행사에서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 아예 호텔을 통째로 빌렸다.
수많은 고급차들이 줄을 지어 호텔을 방문했다. H그룹의 주요 인사는 물론이고, 50대 그룹 오너들 일족에도 모두 초대장을 돌린 덕분이다.
둘이 탄 맥라렌도 호텔 정문에서 정지했다. 매니저가 급히 달려와서 정중히 인사하고, 키를 받았다.
초대장 확인은 필요 없었다. 지배인이 얼른 나와서 둘을 파티장으로 안내했다.
파티에 참석한 인사들의 위용은 대단했다. 국내 재계를 이끌어나가는 대주주들이 모두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장급 미만의 인사들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 사장급 인사들 또한 대부분이 오너의 직계거나 방계였다.
국내의 모든 재벌 일족이 한 곳에 모인 자리. 만약 이 자리에서 테러라도 일어난다면, 재계에 마비가 일어날 것이다.
“어서 와요, 한 대표.”
제일 먼저 이서나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녀는 반쯤 회장 자리를 공고히 굳힌 상태였다.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요즘 일이 잘 풀린다고 들었습니다.”
“모두 한 대표 덕분이죠.”
잠시 후 이용무도 다가와서 악수를 청했다.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관계지만, 그는 웃는 얼굴 아래 감정을 숨겼다.
송하나와 함께 천천히 자기 자리를 향하는데,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이 한서진? 진성그룹 계열사를 대놓고 뺏었다는?”
“그런데 이서나 회장하고 사이 좋아 보이지 않았어?”
“이서나 회장도 어쩔 수 없는 거지. 운용 가능한 현금만 500억 달러인데. 그 돈이면 진성그룹이라 해도…… 으휴.”
남자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지 몸서리를 쳤다.
한서진은 태연히 자리에 앉았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 전에 백철중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을 때와는 180도 다른 의미가 실린 눈빛들이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과 경외감이었다.
예전에는 없던, 그 두 가지 감정이 실린 시선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기업 사냥 본격적으로 시작할 모양이던데. 진성그룹에 들이박은 거 보면.”
“외국 업체 대상으로 설계도 장사나 할 줄 알았더니…….”
“H통신에도 저 사람 지분이 상당하대잖아. 진성그룹 계열사도 여러 개 뺏었고. 긴장해야 돼. 자칫 새로운 10대 그룹이 탄생할 수도 있어.”
예전이라면 그를 ‘기특하게’ 봤을, 나이 든 재벌 총수들은 마른 침을 삼키고 긴장해서 훔쳐봤다.
“백 회장 아들딸들 죄다 쓸려나간 것도, 저 사람 눈밖에 벗어나서 쳐낸 거라던데.”
500억 불의 재력가가 마침내 재계 구도를 재편하기 위해 칼을 뽑아들고, 뛰어들었다.
재계 1위인 진성그룹조차 항복을 선언하고, 2위인 H그룹과 든든한 우호관계를 맺은 청년.
그는 이제 한시도 눈을 떼선 안 되는, 재계의 핵심 인물이 된 것이다.
============================ 작품 후기 ============================
“새로운 초고경도 다이아수저가 출몰했다. 기존 다이아수저들은 모두 긴장하라. 이상.”
“계측기가 이상하다. 다이아가 아니라 반물질이 감지되고 있…… 으아악! 계측기가 터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