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4 산불, 전대미문 =========================================================================
엄청난 폭우였다.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어떤 소화 물질에도 반응하지 않던 불꽃이, 눈에 띄게 그 기세를 잃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산불 현장 최전방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던 이들은 기진맥진해서 늘어졌다. 그들은 이 기적에 기뻐할 체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고작 비 하나로 이렇게 꺼질 거면서……. 왜! 왜!”
누군가가 분노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지옥불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만큼 무시무시했던 산불. 절대 꺼지지 않을 것 같았던 위용.
그것이 무색하게, 겨우 세찬 소나기 한 방에 이렇게 쉽게 꺼질 줄이야.
불길을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것을 하늘이 비웃는 것 같아, 화재 진압의 기쁨보다는 분노가 앞섰던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비교적 후방에 있던 이들은 인과관계가 어찌 되었든 간에, 그저 불이 꺼졌다는 것에 기뻐했다.
“하늘이 도왔다!”
“비야! 시원하게 쏟아져라! 아주 그냥 잔불까지 모두 다 잡아버려!”
아무리 세찬 소나기라 하나, 어떤 소화 물질에도 끄떡하지 않던 불길이 꺼진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아닌가.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의문을 품기보다는, 시원하게 쏟아지며 불길을 꺼뜨리는 빗방울에 환호했다.
제아무리 악을 써도 잡히지 않던 불길은, 소나기가 쏟아지고 겨우 20여 분만에 완전히 잡혔다.
그러나 그 피해는 처참했다.
태백산 일대는 물론, 소백산 국립공원과 청량산 도립공원에 걸쳐 드넓은 삼림이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풀 한 포기 남지 않고, 모든 것이 철저하게 불탔다.
다행스러운 것은, 수십여 명의 경상자를 제외하면 인명 피해가 없었다는 것이다.
“불이 번지는 속도가 느린 점이 주효했습니다. 덕분에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경상자를 제외하면,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망자가 없다는 것.
많은 이들이 그 기적 같은 결과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무사히 진압했군.”
왕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허상의 세계라 하나 고통은 실존하는 것. 그곳의 백성들이 고통 받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비록 그들의 실체가 허구의 것이라 해도.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했다.
“마법 수정을 그런 식으로 발동시킬 줄이야.”
그곳에서는 수퍼컴퓨터라 부르는, 에고 주얼을 닮은 기물.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 레노지안의 에고 주얼과는 많이 다르다.
아무튼 그 기물의 힘을 이용해 마법 수정의 마법진을 발동시킬 줄이야. 왕은 그 발상에는 조금 감탄했다.
“무사히 수습한 모양이군요. 다행이옵니다, 폐하.”
“이제 한숨을 돌려도 될 것 같소.”
“기왕이면 수동형이 아닌, 능동형 주문을 보냈으면 더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드는군요.”
“어쩔 수 없지 않소. 이곳에서 지식을 보내는 것에는 큰 과부하가 걸리니, 최대한 간단하고 단순한 주문을 보내는 수밖에.”
“하긴, 능동형 주문을 보냈으면 전송에서 실패했을 거라는 우려도 드는군요.”
한서진이 얻은 주문식은 기상 조절 마법 중에서도 매우 간단한 하급에 속한다.
종종 자연계에 존재하는 에테르가 이상 결집 현상을 보일 때가 있다. 그 경우 부작용으로 산불이나 홍수가 발생하거나, 혹은 해당 지역의 식물들이 떼몰살 당하기도 한다.
그 주문식은 바로 과부화된 에테르를 흩어버리는, 아주 간단한 작용을 하는 주문이다.
이 경우 흩어지는 에너지가 에테르 스톰으로 변하며 큰 비가 쏟아지기도 한다.
즉 화재가 진압된 것은 과부화된 에테르가 흩어져서이지, 비가 쏟아져서가 아니다. 비는 에테르가 흩어지며 발생한 부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기상 조절 마법이라기보다는, 에테르의 이상 결집 현상을 해소하여 악천후가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는 마법이다. 대표적인 수동형 마법으로, 넓은 지역에 걸쳐 과밀화된 에테르에만 반응할 뿐 다른 작용은 없다.
노신하는 가볍게 웃었다.
“괜히 비를 부르는 마법으로 오인해서 헛수고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에테르가 뭉쳐 있지 않으면 아무 작용도 않는 마법인데 말입니다.”
왕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경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군.”
마력 칩셋.
한서진이 붙인 이름이었다. 마법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신비한 힘을 반도체 칩셋으로 찍어냈으니, 이보다 더 적합한 이름은 없으리라 여겼다.
그리고 한서진은 마력 칩셋과 한창 씨름 중이었다.
“아, 왜! 왜 아무 일도 없는 거야!”
지친 그는 짜증을 내뱉으며 의자에 몸을 풀썩 묻었다.
“비 내리는 마법 같은 게 아니었나? 대체 왜 안 돼.”
한서진은 타르타로스로 남은 마력 칩셋을 이용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았다. 하지만 마력 칩셋은 묵묵부답이었다.
가동 시 나타나는, 타르타로스 주변으로 에테르가 요동치는 현상도 없었다. 마치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반응 자체가 없다.
그는 한숨을 쉬며, 소나기를 찍은 사진을 들여다봤다. 선명한 고해상도의 사진에는 세상이 떠나갈 듯이 쏟아지는 빗줄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에테르 스톰이라…….’
사진 속 빗줄기에 실린 에테르의 흐름이 똑똑히 보인다. 그 안에는 농도 진한 에너지가 담겨 있었다.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에테르의 밀집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고농도의 에테르가 실린 저 빗줄기가 산불을 꺼버린 게 틀림없다.
그런데 왜 재현이 되지 않을까.
“설마 일회용?”
그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꿈속의 왕이 그렇게 인색한 존재였나? 겨우 한 번 쓰고 말 힘이나 알려주고?
“그나저나 대체 어떤 세상일까…….”
한서진은 그 세상에서 기계과학 정수의 흔적은 그다지 발견하지 못했다. 차량이나 컴퓨터 같은 것은 일절 찾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자연 재해까지 손쉽게 조절하는 것을 보면, 결코 이곳 지구보다 하등한 문명은 아닐 것이다. 아니, 오히려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높은 수준을 달성한 문명일 수도 있다.
‘외계인? 그런데 생김새는 뭔가 인간과 거의 똑같던데……. 그리고 왕궁이라니, 그래서야 마치 꼭 중세 시대 같잖아.’
고도로 발달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고 했다.
한서진은 그들 문명의 일부를 엿보며, 마치 마법과도 같은 인상을 여러 번 받았다.
이해할 수 없는 마법의 범주로 받아들인다는 것, 이는 그들의 문명이 지고한 수준에 닿아있음을 뜻하지 않을까.
‘통찰안도 그렇고, 엘릭서도. 그리고 그 거대한 용과 에테르 스톰까지…….’
어느 것 하나만 보아도 예사로운 문명이 아니다.
자신의 기준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그 지고함. 한서진은 불현듯 뜨거운 욕망이 치솟았다.
그곳을, 에테르를, 좀 더 파헤치고 싶다는 것.
주식으로 M&A나 하고, 수퍼카를 타고 거들먹거리는 것들이, 그 세상의 신비함에 비하면 시시하게 느껴졌다.
‘특히 그 용들이 말이지…….’
자유롭게 도시 상공을 부유하던 신비한 용들.
그런 용을 타고 다니면 얼마나 멋질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재해대책본부장은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총리에게 보고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이걸 지금 보고서라고 가져온 건가, 엉?”
부하 직원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본부장은 답답한 가슴을 몇 번 쳤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하지만 사실입니다. 수많은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을 취합해서 작성한 내용입니다.”
“그래도! 이건 너무 말이 안 되잖아!”
산불은 잡았으니, 이제 사후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리고 대책 수립 이전에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원인 규명과 책임 소재의 분별이다.
이번 산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되지 않는 기괴한 현상으로 가득했다.
이상하리만치 늦은 속도, 어떤 소화 물질에도 반응하지 않는 불길, 그런데 소나기 한 방으로 무력하게 꺼진 점.
―화재 불똥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나무에 옮겨 붙음. 주먹만 한 불꽃이라 조기 진압을 시도했으나, 아무리 물과 모래를 끼얹어도 전혀 꺼지지 않았음.
이와 같은 현장 실무자들의 목격담이 수도 없이 많았고.
―나무 등 발화 재료가 완전히 소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꽃이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음.
더 이상 탈 것이 남아 있지 않음에도 불길은 기세가 죽지 않았다. 그것도 한두 명이 목격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보고는…….
“최초 신고자?”
“예. 최초 신고를 보면 태백산의 어느 조그만 연못에서 산불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갑자기 연못 한가운데에서 불이 붙으며 활활 타올랐다고…….”
“누가 그 연못에 기름이나 다른 인화 물질이라도 부어놓은 건가? 일부러 산불을 일으키려고?”
“그래서 전문 소방 인력들을 파견해 연못을 살폈지만, 그런 인위적인 인화 물질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연못은?”
“말라버렸습니다. 물 한 방울 남아 있지 않다더군요.”
“그러니까 연못 한가운데에서 산불이 시작됐고, 그 산불이 태백산과 소백산, 청량산에 걸쳐 강원도 삼림 일대를 초토화시켰으며, 물이나 모래, 소화 물질을 아무리 끼얹어도 꺼지지 않다가 소나기 한 방에 푸시식 하고 진화되었다?”
“…….”
“자네가 총리라면 이 보고를 믿을 수 있겠나?”
“하지만 목격자들의 증언이…….”
“그만!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는 내용을 전달해야지, 현장에서 소설을 써서 올려 보내면 어쩌자는 건가. 다시 고쳐 와. 자네가 총리다 생각하고 읽고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말이야.”
보고는 반려되었고, 두 시간 만에 다시 올라왔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는 원인 및 결과와 개연성을 갖춘 보고는 무사히 승인을 받고, 총리실로 올라갔다.
연못, 소화 물질에 대한 면역, 기상청이 조금도 예견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폭우.
그런 이상한 사실은 보고서 공문에 중요 기재사항이 아니었다.
윗사람들에게는 그저 전대미문의 규모로 벌어진, 아주 큰 산불일 뿐이었다.
사망자가 없어서 그저 다행일 뿐인 재해였다.
태풍 메기가 할퀸 상처의 아픔이 채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강원도 일대를 덮친 산불은 나라 분위기를 침체하게 만들었다.
사망자가 없어서 다행이지만, 그런 안도감은 곧 사라졌다. 태백산과 소백산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일대의 삼림 생태계 파괴는 심각한 우려를 낳았다.
불이 붙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철저히 탔으며, 바위와 흙은 검게 그을려서 흡사 폭격을 맞은 듯했다. 마치 삼림 일대에 미사일 폭격이 떨어진 듯한 광경이었다.
전국에서 강원도 삼림을 살리기 위한 성금 모금이 이뤄졌다.
“용돈 모아둔 거 조금만 남기고 다 내려구요.”
“그러지 말고, 일단 갖고 있어 봐.”
“네?”
“나도 성금 좀 내려고 하는데, 그냥 내는 것보다는 환경 복구 사업에 직접 쓰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서.”
성금으로 모인 눈먼 자금이 고위 공직자들의 술값으로 들어간다는 도시음모론. 한서진은 어느 정도 그 설을 믿는 입장이었다.
「우리 그룹에 맡기게. 태풍 복구 사업을 전담하는 팀에 맡기면 되지. 100원도 새지 않도록 철저히 회계 감사를 하고 있으니까 자네가 염려하는 바는 없을 거야.」
“감사합니다, 회장님.”
한서진은 로열티로 들어온 금액 중 3억 달러를 환경 복구 성금으로 냈다. 안 내도 상관없지만, 재투성이가 된 채 삶의 터전을 잃고 돌아다니는 동물들의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
‘태풍 메기와 이번 산불…… 그러고 보니 둘 다 에테르의 이상 작용이었는데…… 이게 과연 단순한 우연일까?’
왕이 존재하는 꿈속 세상을 떠올리자 괜히 찜찜한 기분이 입안을 맴돌았다.
에테르를 다루는 것으로 생각되는 그곳 문명은,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에 잠겨 있는데 메일 알람이 깜박거렸다.
“니트론 교수님?”
스탠포드의 니트론 교수가 보낸 메일이었다. 한서진은 메일을 클릭해 내용을 확인했다.
뭔가 하고 덤덤히 메일을 읽던 그는 튕겨지듯이 상체를 앞으로 뻗었다.
「……중략…… 태풍 메기와 이번 한국의 산불, 그리고 그 이상 폭우는 제5의 힘이 관여한 것으로서…….」
한서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한 구절을 따라 읽었다.
“제5의 에너지 검출에 성공하셨다고?”
메일에는, 산불을 진압한 이상 폭우에서 미지의 에너지 직접 검출에 성공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 작품 후기 ============================
왕이 한서진의 행동 하나하나에 쪽팔려 하는 이유는...
몽유병으로 돌아다닌 동안 한 짓을 부끄러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냥 그 자체로 쪽팔린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