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2 산불, 전대미문 =========================================================================
강원도 산불.
남의 동네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국민들도 드디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기 시작했다.
“이거 봐, 이게 여덟 시간 전 항공사진이고 이건 한 시간 전 항공사진.”
“와, 불이 이렇게나 번진 거야?”
“미쳤다. 불길 잡힐 조짐이 전혀 없네.”
태백산 어느 계곡에서 시작된 산불은 상하로 퍼져 나갔다. 마치 한반도를 통째로 삼켜버릴 듯한 기세였다.
“그거 들었어? 저 산불, 기존 소화 물질로는 안 잡힌대.”
“그게 무슨 소리야?”
“물이고 뭐고 간에 안 통한대. 여기 동영상 올라온 거 봐봐.”
UCC에 올라온 화재 진압 영상은 충격적이었다.
세 대의 대형 소방차가 사정없이 물을 끼얹고 있지만, 불길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물이 닿은 부위는 일시적으로라도 불길이 잡혀야 정상인데, 마치 물에 면역이라도 있는 듯 끄떡없었던 것이다.
불길은 살아 있는 듯이 천천히 주변을 집어삼켜 나갔다. 큰 산들을 하나하나씩 정복해 나갔다.
―이러다가 한반도 전체가 불반도 되는 거 아니야?
불반도 강림.
그래도 이때까지는 아직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틀림없어. 저 산불은 에테르가 실려 있어.’
어느 항공사진을 봐도 선명하게 황금빛 에테르의 흐름이 불꽃 속에 보인다.
그렇다면 왜 기존 소화 물질에 반응하지 않는지도 답이 나왔다.
‘저건 나무나 숲이 아니라, 에테르에 붙은 불이야.’
불꽃은 나무나 풀이 아닌, 에테르를 발화 원료로 사용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니 아무리 물이나 소화 분말을 끼얹어도 진압되지 않는 것이다.
인화 물질인 에테르를 끊어야 한다. 그래야 저 불꽃을 다스릴 수 있다.
“이거 설마, 산소도 필요 없는 건가?”
산소를 차단하는 소화 물질에도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틀림없으리라.
한서진은 답답했다. 대책본부를 비롯하여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물이나 소화 물질을 끼얹는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 시간과 인력만 낭비할 뿐이다.
“오빠,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산소가 필요 없다니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거 뭔가 특이한 불인가요?”
“그런 거 같긴 한데, 신경 쓰지 마. 내가 그냥 잘못 말한 거니까.”
한서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산소가 필요 없는 불이 어딨어.”
“…….”
송하나는 조금 미심쩍은 눈빛이었다.
한서진은 얼른 태블릿으로 눈을 돌렸다. 예측 결과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말도 안 되는 예상이지만, 타르타로스의 계산은 틀림이 없다. 이미 태풍 메기 때 똑똑히 확인했다.
심지어 저 산불은 에테르를 태우며 번져나가는 것 아닌가. 에테르의 분석에 있어 타르타로스가 틀릴 수가 없다.
‘이걸 어떡하지?’
한서진은 답답했다. 문제의 원인은 아는데, 해결 방법을 모르니 가슴이 막막했다.
이대로 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한반도의 큰 산맥이 전부 불타버리고, 종래에는 한반도 전체가 화마에 휩싸이고 만다.
‘한가하게 풋마시지나 받을 때가 아닌데.’
그렇다고 자신이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없지 않은가.
“오빠도 많이 걱정되나 봐요?”
“으, 응. 아무래도…….”
“역시 오빠는 그 계산 결과를 믿는 거죠?”
“……조, 조금?”
“너무 걱정 마세요. 설마 산불을 못 잡겠어요. 오빠도 사람인데 실수 할 수도 있죠. 틀린 계산일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다.”
걱정스러운 시선이 느껴진다. 한서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태블릿을 살폈다.
‘방법이 없을까…….’
그는 문득 태풍 메기 때 일을 생각했다.
원래 계산대로라면 메기는 하루 더 동해에 머무른 다음에 이탈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나흘을 전부 채우지 않은 채 한반도를 떠났다.
당시 자그맣게 품었던 의심.
타르타로스가 태풍의 경로 변경에 간섭을 한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공상.
‘어쩌면 산불도……?’
가슴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이 조그맣게 싹을 틔웠다.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이렇게 될 줄이야.”
왕은 보기 드물게 당황하고 있었다.
꿈속 세상을 향한 진입, 그리고 간섭.
왕은 그저 한서진에게 그 과정을 낱낱이 보여주려고 했을 뿐이다. 성공하여 꿈에 강림할 수 있다면 좋고, 실패하더라도 한서진이 그 과정을 보고 에테르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으니 좋다.
그러나 이런 결과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연약한 세상일 줄이야.”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왕은 마법진을 통해 꿈속 세상에 마력을 투입했다. 그러나 꿈속 세상은 그 과부하를 견디지 못했다.
그 여파가 저런 재앙으로 나타난 것이다.
“꿈속의 폐하는 아직 에테르 불꽃을 다스릴 수 있는 역량이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소.”
노신하가 우려를 나타냈고, 왕은 힘들게 끄덕였다.
꿈의 세상이 고작 이 정도 마력을 버티지 못해, 저런 재앙이 일어날 줄이야. 너무 사소하여 오히려 예상치 못한 것이다.
“사실 그리 큰 재앙도 아니오. 이곳 레노지안에서는 마법사 한 명이면 혼자서 진압할 수 있는 산불이오.”
“하지만 그 세상은 에테르를 다루지 못하지요. 존재조차도 알지 못하고 말입니다.”
“그렇소.”
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꿈속의 짐 또한 이제 겨우 에테르의 미시적인 흐름을 다루는 수준이오. 그것도 통찰안의 힘을 빌려 그대로 따라하는 어린아이 같은 수준이지. 거시적 영역에서 에테르를 다루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오.”
왕은 후회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가서려 했지만, 저쪽 세상이 상상 이상으로 약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더욱 조심해야겠소. 짐의 본신으로 잘못 강림했다가 저 세상은 무너질지도 모르오.”
“저번처럼 의식만을 보내는 것은 어떻습니까?”
노신하가 조언했다.
처음으로 통로를 뚫었을 때, 한서진의 몸으로 잠시나마 깨어났던 일을 말하는 것이다.
“폐하의 힘과 권능의 사용에는 제약이 걸리겠으나, 그 세상에는 좀 더 안전한 방법이 될 겁니다.”
“한서진의 몸으로 깨어나는 것이 더 어렵지 않소.”
“그래도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고 봅니다.”
“…….”
왕은 잠시 고민했다.
레노지안에서 왕이 꿈속에 진입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저번처럼 한서진의 몸으로 깨어나는 것, 다른 하나는 왕이 직접 그 세상에 강림하는 것이다.
전자는 난이도가 좀 더 어렵고, 후자는 꿈속 세상이 왕의 힘을 버티지 못해 위태로워진다는 단점이 있다.
“아니면, 그 둘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노신하가 넌지시 간청했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 노신하도 왕도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왕은 쓴웃음만 나왔다.
“경의 생각대로, 꿈속의 짐이 이쪽의 마력 신호를 수신하여 유도한다면 간단히 해결될 거요. 그러나 그 방법은 아직 무리이지 않소.”
“에테르의 미시적인 조절이 가능하다면, 기초적인 교신 마법 정도는 가능할 텐데요.”
“그런 게 존재하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서 배우고 익힐 수 있겠소.”
노신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왕은 고개를 들어, 대전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쯤 꿈속 세상은 에테르의 불길로 난리가 났으리라.
“모든 것이 짐의 불찰이로다.”
그렇게나 연약하고, 불안정한 세상일 줄 전혀 몰랐다.
거짓된 땅이며,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된 세상. 그들이 겪는 고통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래도 군주의 유책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왕은 솟구치는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경, 함께 방법을 찾아봅시다. 재앙은 멈춰야 하지 않겠소.”
막아야 했다.
비록 세상이 허상일지라도, 아픔은 실존하는 것이기에.
‘막아야 하는데.’
태블릿을 통해 타르타로스의 조작이 가능한 만큼, 장소는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한가하게 풋마사지를 받으면서 할 말은 아니지만, 한서진은 나름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고 있었다.
옆에서 같이 마사지를 받는 송하나는 그가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말을 걸지 않았다. 집중력을 깨지 않기 위해 배려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나?’
뭐라고 알릴까?
물이나 소화 물질로는 절대 끌 수 없고, 22일 안에 한반도 전체를 불태울 것이라고?
듣자마자 미쳤다고 할 것이다. 애초에 자신은 재해 전문가도 아니지 않은가.
‘에테르를 다룰 수 있다면 가능할지도 몰라. 하지만 어떻게 하지?’
그는 이미 통찰안을 통해 에테르를 다룰 수 있다. 에테르 반도체가 바로 그 결과물. 하지만 ‘알고 행하는’ 게 아니라 통찰안이 시키는 대로 따라할 뿐이다.
자신이 새기는 회로가 구체적으로 어떤 원리와 구조를 갖는지, 그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물며 에테르를 제어해 불꽃을 다스린다니. 지금으로서는 꿈같은 소리다.
‘그 왕이라면 가능할 텐데.’
답답한 마음이 가슴을 쳤다.
꿈속의 군주, 뭐든지 가능할 것 같은 그 위엄이 부러웠다. 그 사람이라면 명령 하나로 불꽃을 잠재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오빠, 너무 초조해하지 마세요. 오빠 잘못도 아니잖아요.”
보다 못한 송하나가 위로를 건넸다. 한서진은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래, 고마워.”
‘하나 말이 맞아. 내 잘못도 아닌데, 너무 초조해하지 말자. 차분히 방법을 생각해보자. 차분하게, 천천히…….’
그때였다.
타르타로스와 연결된 태블릿 화면이 치직거리며 심한 노이즈가 나타났다. 한서진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화면에 집중했다. 그는 송하나가 보지 못하게 각도를 틀었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건 다른 누구라도 보여줄 수 없는 장면이다.
노이즈가 심해졌다. 한서진은 의아했다.
‘왜 이러지? 평소와 달라.’
전 같았으면 약간의 노이즈를 거친 후, 그곳과 바로 연결되는 시선이 나타난다. 그 시선을 통해, 투명인간처럼 자유롭게 그곳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헌데 노이즈는 점점 더 커져갈 뿐, 그곳 세상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뚝.
바로 그 순간, 거짓말처럼 노이즈가 멎었다. 한서진은 바짝 긴장해서 화면을 주시했다.
화면에는 아무 풍경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검은 명암만이 가득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몇 초 후, 이질적인 문자가 떠올랐다.
지구상의 어느 언어도 아닌, 오로지 그만이 읽을 수 있는 문자. USL이라 명명한 그 미지의 언어였다.
문자는 한 글자씩, 차례차례로 천천히 떠올랐다. 한서진은 더듬더듬 그것을 읽었다.
“에. 테. 르. 스. 톰.”
글자가 완전히 사라지며, 황금색 선으로 그려진 원이 나타났다. 원 내부에는 전에 꿈에서 봤던, 기하학적인 문양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건…… 에테르 언어?’
틀림없다.
통찰안을 통해 이미 여러 번 겪어본, 반도체 회로에 새긴 에테르 언어와 흡사했다. 아마 반도체 성능과 다른 작용을 하는 에테르 언어이리라.
‘설마?’
불현듯 치민 어떤 확신에 한서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명했다. 왕이 자신에게 뭔가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보고 있어! 그 왕도 이곳을 의식하고 있는 거야!’
혹시 이건 산불을 제압할 수 있는 단서가 아닐까? 한서진은 재빨리 이미지를 저장했다.
저장을 마치자마자 이미지는 스르르 사라지며, 원래 화면으로 돌아왔다.
한서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해보자.’
왕은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짧은 단어 한 마디와 조그만 마법진 하나. 고작 그것을 보냈을 뿐인데 이렇게나 많은 체력을 소모할 줄이야.
그러나 보람은 있기에, 왕은 지친 와중에도 조용히 미소 지었다.
“비록 기초 마법이지만, 불을 진압하는 데는 충분할 것이다.”
============================ 작품 후기 ============================
“이거 핑이 이상하구나. 9ms로 뜨는데 왜 이렇게 반응이 느린가? 화면도 멈춰 있는 거 같은데.”
“아이구, 그거 ms(millisecond)가 아니라 m(minute)이에요. 우리 아서 군주님, 단위 잘못 보셨네. 하하하.”
“그, 그럼 응답 지연속도가 9/1000초가 아니라...”
“9분임.”
“그래서 데이터를 이렇게 무식하게 처먹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