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0 산불, 전대미문 =========================================================================
H통신 가입자 수가 천만 명을 돌파했다.
회사는 축제 분위기였다. 백철중 회장은 직접 회사를 방문해서 가입자 천만 명 돌파를 축하했다.
“임직원 모두 수고했어요. 이것으로 우리 H통신이 빅3에 당당히 올라섰습니다.”
천만 명. 그것은 여러 모로 의미가 깊었다.
자릿수가 바뀐 것도 바뀐 것이지만, 기존 빅3 체제를 무너뜨리고 통신사업 3위로 올라섰다는 의의가 있었다.
그것도 불과 몇 달 만에. 엄청난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정상용 사장은 백철중의 칭찬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회장님, 아직입니다. 약정 기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잠정 고객 수도 엄청납니다. 그들을 전부 끌어올 수만 있다면, 내년 상반기 안으로 국내 1위도 발돋움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1위 찍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지. 시기가 언제인가만 문제일 뿐일세.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임원들 위주로 조촐하게 열린 축하 파티에 참가한 한서진도 모처럼 가벼운 마음이었다. 백철중이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도 기분이 좋아졌다.
“타르타로스, 이 놈아. 앙탈 좀 그만 부려라.”
저택 보안룸.
주모니터 앞에 앉은 한서진은 명령어를 타이핑하면서 그렇게 투덜거렸다.
그는 타르타로스를 이용해 꿈속 세계로 진입을 시도했다. 벌써 한 시간이 넘었다.
하지만 타르타로스는 감감무소식이었다. 현재 본체를 둘러싼 에테르의 흐름도 매우 안정적이었다.
“아, 왜 이렇게 안 돼. 좀 응답하라고.”
한서진은 투덜거리며 타르타로스 제어에 매달렸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확인해보니 송하나가 보낸 톡 메시지가 있었다.
―더워요. 무지 더워요. 지금 늘어졌어요.
한서진은 피식 웃으며 잠깐 키보드를 놓고 스마트폰을 쥐었다. 의자를 뒤로 젖히며 편안한 자세로 답 메시지를 보냈다.
―학교에서 에어컨 안 틀어 줘?
―틀어도 더워요. 아, 다시 제주도 내려가서 바다에 뛰어들고 싶어요.
―바다?
난 온천이 더 좋은데, 하고 한서진은 잠깐 엉뚱한 생각을 했다. 물론 톡 메시지로 보내진 않았다.
방학이 끝났어도 아직 8월이다 보니 늦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는 중이었다. 요즘 고등학교는 에어컨이 빵빵하다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재벌 아가씨가 평범한 고등학교에서 저출력 에어컨 때문에 더위에 고통 받아야 하다니. 한서진은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학교 끝나고 삼계탕 먹으러 갈래? 더위에는 역시 치킨을 뜯어야지.
―정말요? 데리러 올 거예요?
―데리러 갈게. 4시에 끝나지?
―4시 반에 맞춰 오세요.
갑자기 톡 메시지에 활기가 피어났다. 치킨은 더위에 늘어진 소녀도 일으켜 세우나?
―앗, 저 수업 시작해요. 끝나구 톡할게요.
―그래. 나도 일해야겠어.
톡을 일단 마무리하고, 한서진은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잠깐의 대화로 즐거웠던 마음이 주모니터를 보자 다시금 짜증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 왜 안 돼!
그때였다.
별안간 타르타로스를 둘러싼 에테르의 흐름이 폭풍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주모니터 화면이 꺼지고 대신 푸르스름한 노이즈가 그 자리를 가득 뒤덮었다.
‘됐다!’
한서진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어느 순간 모니터 화면이 변하며,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다.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도시, 그 어떤 메트로폴리스도 저 규모에는 비하지 못하리라.
정돈된 도로 블록과 강, 그리고 하천. 질서 있게 자리 잡은 주택과 건물들.
창공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모습은 높은 문명의 힘을 빌려 질서정연하게 건설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하늘을 자유롭게 부유하는, 마치 용을 닮은 생명체의 모습은 도시가 가진 신비로움을 한층 부각시켜 준다.
현대 도시처럼 수십 층이 넘어가는 고층 건물은 없다. 아무리 높은 것도 5층 이내의 낮은 건물이다.
하지만 건축 기술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 증거가 바로 산을 등지고 있는, 저 거대한 황금빛 궁전이었다.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중앙성은 그 둘레도 엄청나지만, 가장 중심탑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었다. 언뜻 눈으로 가늠하기에도, 63빌딩의 세 배 이상은 넘어 보이는 높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온 땅을 내려다보겠다는 듯한 그 위엄은, 한서진의 가슴에 뜨거운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저 성의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기분은 어떠할까. 그 자리는, 아마도 그 왕을 위해서만 존재하겠지?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어느덧 순식간에 황금의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쉴 새 없이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은 한서진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왕의 대전에 도착한 시선은 잠시 멈췄다.
중심에 앉은 왕은 십여 명의 신하들에게 둘러싸인 채,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저건 뭐지?’
한서진은 왕이 앉은 바닥을 중심으로, 은색의 둥글고 커다란 원을 발견했다. 원 안은 복잡한 문자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뭐가 낯익다.’
그 문자들이 어딘가 낯이 익은 듯한 느낌이 들어, 한서진은 주모니터에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바로 그때였다.
별안간 왕이 눈을 뜨며, 이쪽을 똑바로 주시했다.
벌써 몇 번째인가. 틀림없다. 왕은 ‘이쪽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한서진은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왕이 뭐라고 하는지, 그 입 모양에 주시했다. 당장 해석은 못할지언정, 발음 모양을 기억해두기 위해 애썼다.
왕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이쪽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 꿈속의 짐이여.”
은색 마법진이 머금은 마력의 폭풍이 은은하게 느껴진다. 익숙한 감촉을 자연스럽게 다루며, 왕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짐은 왕가의 모든 보물을 쏟아 부은 대의식을 통해, 그곳 세상과 이곳 세상을 잇는 통로를 열었다. 그대가 지금처럼 이곳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도 그것 덕분이다.”
주변을 둘러싼 마력의 힘이 더욱 강해진다.
“앞으로 짐은 끊임없이 꿈속으로 진입을 시도할 것이다. 허나 이것은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곳은 짐에게는 꿈이나, 그대에게는 현실. 따라서 꿈을 형성한 세상이 짐을 강하게 거부하기 때문이다.”
한서진이 그곳이 꿈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저주를 구성한 모든 힘을 소멸한다.
이는 단지 한서진이 ‘여기가 꿈이구나.’하고 용인하는 것을 넘어서, 지구와 한서진은 허상이며 레노지안과 아서만이 절대적인 실존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도 짐은 시도할 것이다.”
마법진을 둘러싼 마력이 은색에서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마력의 폭풍이 몰아치며, 왕궁 전체가 무너질 듯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대 또한 짐의 시도와 실패를 보고 배우기 바란다. 그리고 짐의 노력에서 에테르의 지혜를 얻기를 바란다. 이곳에서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그곳에서 이곳으로 나오는 게 만 배는 쉬울 터이니.”
꿈속 진입을 성공해도 좋지만, 실패해도 의미는 남는다.
만약 한서진이 이쪽의 진입 시도를 보고 뭔가를 습득한다면, 그리하여 꿈속에서 레노지안으로 나올 수 있다면, 왕가의 시도는 헛되이 그치지 않는 것이니.
“똑똑히 보아라. 이것이.”
선명한 황금빛 광채가 한 치 앞도 보지 못하게 모든 것을 뒤덮은 가운데, 왕의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울렸다. ‘창’을 통해 이곳을 바라보는 한서진에게는 그 목소리가 닿지 않겠지만.
“에테르의 힘이다.”
“허억!”
화면이 뚝 꺼지며, 지독한 노이즈가 주모니터를 뒤덮었다. 한서진은 숨을 몰아쉬었다.
황금빛 폭풍이 터진 순간, 그 여파를 감당하지 못하고 ‘시선’이 망가져 버렸다. 마치 쫓겨나듯이 그쪽 세상에서 튕겨져 나온 것이다.
‘에테르를 그렇게도 다룰 수 있구나.’
한서진은 벅찬 감격에 몸을 떨었다.
통찰안을 통해 똑똑히 보았다. 왕을 둘러싼 에테르의 무궁무진하면서도 자유로운 흐름의 폭발을.
자신도 에테르를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다. 슈나우저와 케르베로스 등 에테르 반도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반도체들이 만들어내는 에테르의 흐름은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힘을 풀피리 연주로 치면, 왕의 힘은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교향악이라고 할까. 아니, 이것도 매우 후한 비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타르타로스…….’
그는 고개를 돌려 타르타로스를 응시했다.
본체를 감싼 거대한 에테르의 흐름. 그러나 저것은 자신이 의도한 게 아니다.
일만 개의 케르베로스가 서로 상호작용하며 스스로 만들어낸 에테르 흐름의 집합이다.
“나한테 뭔가를 보여주려고 했어.”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도 없다.
하지만 한서진은 왕의 의도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왕은 자신이 어떻게 에테르를 다루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마치 어린 제자를 위해 손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거장처럼, 그 복잡하고 웅장한 흐름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한서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았어.”
“죄송해요. 많이 기다렸죠.”
교문을 나선 송하나가 후다닥 레인지로버에 탔다.
“아, 시원해. 잠깐 걸어오는 데도 왜 그렇게 더운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땀은 별로 안 흘린 거 같은데?”
“하교하고 샤워했거든요. 땀이 너무 많이 나서요.”
쿵. 샤워라는 말에 순간 가슴에 커다란 게 직격했다.
“씻고 나온 거야? 학교에서?”
“땀 많이 나서 냄새날까 봐요. 학교에 샤워실 있어요.”
“그, 그렇구나.”
왜 샤워는 하고 나왔대? 사람 설레게.
한서진은 자주 가는 백숙집으로 차를 몰았다. 말복이 지나서인지 조금 손님이 뜸했지만, 오히려 쾌적해서 더 좋았다.
재벌집 아가씨라 삼계탕이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녀는 맛있게 잘 먹었다.
“이제 8월도 다 갔고…… 수능까지 두 달 조금 넘게 남았네. 맞아?”
“76일 남았어요. 수능 끝나면 금방 또 한 살 먹어요.”
“그래, 한 살…….”
“저 졸업 선물 뭐 해주실 거예요? 작년에 약속한 거.”
“네가 달라는 거 해준다고 한 거 같은데.”
송하나는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제가 해달라는 거 그럼 다 해주실 거죠?”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면.”
“알았어요. 생각해둘게요.”
한서진은 송하나를 지그시 주시했다.
손만 뻗으면 닿을 듯한 이 가까운 거리. 여름 휴가로 그것은 더욱 뚜렷해졌다.
그저 손만 뻗으면 된다. 쥘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은 망설여지는 것은, 역시 성년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일까.
‘네 달 남았네.’
“김 사장, 무슨 체력이 그렇게 좋은가. 내가 따라가질 못하겠어.”
“자네도 나처럼 매일 태백산의 정기를 느껴보라고. 허구한 날 집에만 틀어박혀서 바둑만 두지 말고. 그러니 몸이 그렇게 허약해지지.”
태백산의 어느 계곡.
등산복 차림을 한 50대 남자 둘이서 계곡을 타고 있었다. 한쪽은 쌩쌩한 데 비해, 다른 한쪽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헉헉거렸다.
“힘내.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작은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게 아주 물맛이 끝내 줘. 태백의 정기가 담긴 물이라고 근방에서 소문이 자자하더군.”
“물맛이 그렇게 좋은가?”
“아, 복덕방 박 사장 알지?”
“알지, 그럼.”
“그 양반이 얼마 전에 그 연못 물 마시고 이십 년을 앓던 관절염이 사라졌다잖아. 그저 용하다고.”
최 사장은 헐떡이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영험한데 왜 난 소문을 못 들었지?”
“아는 사람만 알음알음 아는 곳이라고. 어이쿠, 이제 다 왔다.”
김 사장이 잠시 멈추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지름 10미터 가량 되는 조그만 연못이 있었다. 물은 그리 깊지 않아 어른 허리까지 닿을 정도였고, 신기하게도 투명하리만치 물이 맑았다.
놀라운 것은 은은한 황금 안개 같은 것이 주변에 아스라하게 떠돌고 있다는 점이다. 그 아름다운 광경에 최 사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연못이 있었단 말이야?”
“어때, 정말 신기하지?”
“와…… 대단하네그려.”
김 사장은 자랑스럽게 떠들어댔다.
“원래 평범한 연못인데,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변했다는 거야. 복덕방 박 사장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못 물 마셨는데 며칠만에 관절염이 다 나았대. 주민들 일부만 알음알음 알고 있는 곳…….”
“으억! 저, 저게 뭔가?”
그때였다. 최 사장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연못을 가리켰다.
무슨 일인가 하고 돌아본 김 사장도 뛸 듯이 놀랐다.
은은한 황금빛 안개가 연못의 중심으로 모이며, 치지직거리는 스파크를 튀기고 있었던 것이다.
믿어지지 않게도, 연못에 불이 붙고 있었다.
“뛰, 뛰어!”
“불이다! 산불이다!”
태백산의 한 이름 모를 계곡.
그곳에서 일어난 원인불명의 산불이 성난 물소 떼처럼 온 산맥을 내달렸다.
============================ 작품 후기 ============================
“한서진, 꿈속의 짐이여. 짐을 따라하여, 이곳 진실 된 세상으로 건너 오거라.”
“ㅇㅋ.”
“올 때 람보르기니 잊지 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