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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99화 (199/609)

00199  여름 휴가  =========================================================================

“네 꿈? 글쎄…….”

한서진은 말을 흐렸다.

송하나와 몇 번 꿈에 관해 이야기를 한 적은 있지만, 그녀가 구체적으로 말해준 적은 없는 것 같다.

“전 원래 나중에 엄마 모시고 외국에서 조용히 사는 게 꿈이었어요. 공부도 하고, 정원도 가꾸고, 좋아하는 운동도 하고, 뭐 그렇게요.”

“그랬구나. 소박하네.”

“근데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어요.”

“어떻게?”

“어떤 사람을 봤거든요.”

차분하면서도 살짝 들뜬 듯한 어조였다. 한서진은 왠지 그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똑똑하고, 현명하고, 똑 부러지는 사람. 자기 앞길에 거침이 없고,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 우리 아빠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가슴을 펴는 사람이었어요.”

“그게 혹시…….”

“네, 오빠예요.”

“…….”

“오빠 같은 열정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요. 공부든 경영이든 간에요. 이제 소박하게 사는 건 시시할 것 같아요. 지금은 그게 제 꿈이에요. 오빠 때문에 이렇게 됐어요.”

송하나는 배시시 웃었고, 한서진도 기분 좋게 피식거렸다.

“그래서? 나더러 책임이라도 지라는 거야?”

“네에.”

“어떻게 책임질까?”

“과외해서 저 한국대 보내주세요. 나중에 일도 쬐끔 가르쳐 주시고…… 안 되나요?”

“안 될 건 없는데, 나도 받는 게 있어야지.”

“뭘 드릴까요?”

한서진은 문득 생각했다. 여기서 만약 ‘너’라고 대답했다가는 어떻게 될까. 부끄러워할까, 질겁할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넘어갈까.

“나중에 말해줄게. 나중에.”

“지금 말해주시면 안 돼요?”

“응, 안 돼. 지금은.”

몇 달만 지나면 어른이다. 몇 달만 더 참자.

오전 해변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자 한지혜는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있었다. 어떻게 하룻밤 만에 사람 피부가 저렇게 퍼석해질 수 있을까. 그저 술이 웬수다.

“대체 얼마나 퍼마신 거야?”

“몰라. 기억 안 나.”

“모르는 사람들이랑 마셨다며?”

“그랬던가? 기억이 잘 안 나네.”

“경호원 없었으면 뭔 일을 당했어도 백 번은 당했다. 조심 안 할래?”

“경호원 있으니까 그렇게 마신 거지.”

한지혜는 머리를 북북 긁었다. 한서진은 질겁해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긁지 마. 비듬 떨어져. 아, 더러워.”

“뭐래? 하루 안 감았다고 무슨 비듬.”

“으휴.”

“밥 좀 시켜 봐. 배고파 죽겠네.”

한서진은 한심하다는 듯이 혀만 쯧쯧 찼다. 이런 걸 대체 어떤 남자가 눈이 삐어서 데려갈까.

“그래서? 헌팅은 잘 하고 왔냐? 뭐 좀 괜찮은 놈 낚은 거 있어?”

“헌팅하러 간 게 아니라 당하러 간 거라니까.”

“한 거든, 당한 거든. 꼬락서니 보니 별 소득은 없었나 보네.”

“아씨, 밥이나 달라고.”

한지혜는 벌떡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한서진은 혀를 차며 숙박업체에 전화해서 점심을 준비했다. 동생년에게는 아침 겸 점심이 되겠지.

씻고 나오는 동안 식사가 준비되었다. 숙박시설을 통째로 빌리니 이런 점이 좋다. 알아서 숙소로 날라다 준다.

“밥 먹고 뭐 할 거야? 또 해수욕?”

“수상바이크 타러 가요. 전문적으로 그런 거 하는 곳이 근처에 있어요.”

“수상바이크? 그거 면허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저 있어요.”

“…….”

“…….”

두 남매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입을 다물며 서로를 쳐다봤다. 수상바이크 면허가 있는 여고생이라니, 재벌들은 원래 다 이런가?

“그래, 그럼 가보자. 에메랄드 바다에서 수상바이크 타고 노는 것도 나쁘진 않지.”

셋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숙소를 나섰다. 렌트카를 타고 수상 스포츠 리조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이 찾은 곳은 보트와 요트, 수상바이크 등 다양한 설비가 갖춰진, 꽤 규모가 있는 리조트였다. 꽤 많은 사람들이 수상 스키 체험 등 다양한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송하나는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왔다. 어제의 그 래쉬가드였지만, 한서진은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흐뭇했다.

‘그래, 딴 놈들 보는 데서 비키니 입어서 뭐해.’

수상 스포츠를 즐기는 자리라서인지 한지혜도 래쉬가드를 입고 나왔다.

워낙에 튀는 일행이라 그런지 뭇사람들이 자꾸만 힐끔거리는 게 느껴진다. 특히 송하나는 노출이 적은 래쉬가드를 입었음에도 우월한 바디라인 덕에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저 얼굴에, 저 몸매에. 누가 쟤를 미성년자로 보겠어.

“누가 먼저 타실래요?”

어느새 송하나는 수상바이크를 대여해왔다. 한지혜는 한 발작 물러나며 손을 휘휘 저었다.

“난 바닷바람 멀미가 있어서 자제할게. 오빠나 실컷 즐겨.”

“차도 아니고 바닷바람에 무슨 멀미야.”

“있어, 그런 거.”

한지혜가 물러났고, 결국 한서진만 조심조심해서 바이크 뒤에 탔다.

“안 뒤집어지게 조심하시고, 허리 꽉 잡아요.”

“아, 알았어. 꽉 잡으란 말이지…….”

등 뒤에서 팔로 허리를 감싸는데, 심장이 쿵쾅거려서 갈비뼈 밖으로 떨어져 나올 뻔했다.

처음으로 안아보는 송하나의 허리는 보던 것 이상으로 얇고 부드러우면서도,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함이 느껴졌다. 여자치고 키가 크지만, 골격이 가늘어서인지 품에 쏙 안기는 느낌이 든다.

“출발할게요.”

송하나는 바이크를 출발시켰다. 우렁찬 엔진음을 박차고, 바이크가 물소처럼 뛰쳐나갔다.

차갑고 거센 바람이 부딪쳐 온다.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얼굴을 간지럽힌다.

낮은 파도를 시원하게 가르는 속도감이 부딪쳐 오지만, 한서진은 그런 건 하나도 느끼지 못했다. 단단히 끌어안은 송하나의 체온만을 의식했을 뿐이다.

“…….”

“…….”

어느 순간 말이 없어졌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그저 두 사람의 침묵을 가만히 어루만져 줄 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오빠, 이제 그만 돌아갈게요.”

“으, 응?”

“연료가 40% 정도 남았어요. 이제 돌아가야 돼요.”

“그래, 돌아가자.”

한 10분밖에 안 지난 것 같은데 무슨 연료가 벌써 그만큼이나 소모돼? 한서진은 제품이 형편없다며 속으로 불평했다.

바이크를 대고 내리는데 한지혜의 모습이 안 보였다. 한서진은 동생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 년이 그 짧은 새를 못 참고 또 어디로 샌 거야. 어?”

한서진은 문득 저쪽에 있는 한지혜를 발견했다.

그런데 동생은 혼자가 아니었다. 흰 요트 후면에 걸터앉은 남자와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거 혹시 헌팅 상황?

‘불쌍한 솔로 동생의 연애 사업에 초를 치는 건 제네바 협정 위반이지.’

한서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등을 돌리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순간 뭔가가 마음에 걸린 것이다.

‘가만,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한서진은 남자에게 눈을 돌렸다.

검은 바탕의 래쉬가드를 입고, 배에 가벼운 왕자가 새겨져 있는 청년이었다. 나이는 이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서글서글한 눈매에 훤칠한 키가 인상적인, 누가 봐도 생긴 건 괜찮다 싶은 남자였다.

그러나.

“백진현?”

백철중의 손자이자, 백형진의 장남.

H그룹 행사에서 자신에게 교묘한 시비를 걸었던, 새끼 도마뱀의 미소를 띤 남자.

그 놈을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아, 맞다. 제주도.’

그러고 보니 백철중은 일가를 정리하면서 축출한 친인척을 싹 다 제주도로 내려 보냈다. 그래도 그렇지, 제주도가 얼마나 큰데 이렇게 딱 마주칠 줄이야.

“오빠, 무슨 일이에요?”

바이크를 반납한 송하나가 옆에 와서 섰다. 그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백진현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가리킨 곳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여기 잠깐 있어. 갔다 올게.”

“어떡하시려고요?”

“수목드라마 한 편 찍고 와야지. 감히 어디서 내 동생한테 찝적대느냐! 하고.”

“저도 갈래요.”

송하나는 남지 않고 따라붙었다. 한서진은 끄덕이고는 둘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한지혜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으, 달팽이관 다 썩겠다.’

애교가 농축된 여동생의 음색이란, 친오빠에게 있어 손톱으로 쇠를 긁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뭐해?”

“어, 오빠?”

한지혜는 화들짝 놀라서 돌아봤다. 살벌한 눈빛은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제네바 협정 몰라?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는 깔끔히 무시한 채, 백진현을 주시했다.

“오랜만이네. 우리 구면이지?”

“다, 당신!”

그제야 한서진을 알아본 백진현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요트에서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요트가 조금 출렁거렸다.

한지혜는 살짝 놀라서 반 발짝 물러났다. 그리고 한서진과 백진현을 번갈아 보았다.

“오빠, 아는 사람?”

“어, 있어. 하나 조카.”

“……하나 조카?”

한지혜는 당황하며 백진현과 송하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백진현은 20대 중반으로 보인다. 그런데 송하나의 조카라니, 순간 헷갈린 것이다.

“조카라니, 이게 무슨…….”

“안녕.”

송하나는 살갑게 웃으며 백진현에게 손을 흔들었다. 경직된 그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것은 분노가 아닌, 창피함과 당혹스러움이었다.

한서진이 태연히 말했다.

“제주도에서 나름 살 만한가 봐? 요트도 좋은 거로 뽑아서 타고 다니네?”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을 가고, 왕족은 귀양지에서도 배를 띄우며 풍운을 즐긴다더니, 이게 딱 그런 꼴인가?

“죄, 죄송합니다!”

백진현은 후다닥 요트 조종실로 사라졌다. 시동을 걸고, 그대로 요트를 몰며 사라져 버렸다.

사라지는 요트를 멍하니 보던 한지혜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가련한 여동생을 구제해준 거지. 저놈이 어떤 놈인 줄이나 알고.”

“어떤 사람인데? 하나 조카라는 건 뭐고? 하나보다 더 나이 많은 거 아니야?”

송하나가 그 부분은 자세히 이야기를 하지 않은 모양이다. 한서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회피했다.

“언니,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혹시 전화번호 주거나 하지는 않으셨죠?”

“그럴 틈도 없었어. 근데 네 조카, 별로야?”

“네. 완전 별로예요.”

“그럼 됐고.”

한지혜는 미련 없다는 듯이 기지개를 쭉 폈다. 그리고 오빠를 보며 툴툴거렸다.

“그나저나 무슨 바이크를 한 시간 가까이 타? 기다리느라 지루해 죽는 줄 알았네.”

“뭐, 한 시간이나 탔다고?”

한서진은 놀라서 시간을 확인했다. 정말이었다.

아니, 겨우 10분밖에 안 탄 것 같은데? 시간이 그렇게나 지났단 말인가?

“저도 간만에 바이크 타서 신났나 봐요. 정신없이 당겼어요.”

송하나도 살짝 멋쩍어 했다.

그녀가 잠시 물을 마시러 간 사이, 한지혜가 옆구리를 툭 치며 눈을 흘겼다.

“인간아, 좋디?”

“닥쳐줄래, 시스터?”

한서진은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먼 수평선을 살폈다. 백진현의 요트는 벌써 저만치 멀어진 상태였다.

“요트라…….”

배가 꽤 좋아 보이던데.

그룹에서 내쳐져 제주도로 쫓겨났다기에 어떻게 사나 궁금했는데, 그래도 재벌은 재벌인 모양이다. 한가하게 요트놀이나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걸 보면.

‘백세완…….’

문득 그가 생각났다.

신기하게도 분노가 일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서일까, 아니면 그에게 분노를 품기에는 너무 큰 격차가 벌어져서일까.

“뭐, 귤 농사나 하고 있겠지.”

5박 6일의 휴가를 마치고, 셋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동생이 끼긴 했지만 나름 즐거운 휴가였다. 동생이 끼지 않았으면 재미가 없었을 순간도 제법 있었다.

물론 왜 따라왔나 하고 방해물처럼 느껴진 순간이 훨씬 많긴 했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동생을 어디다 치우고 와야겠다. 한서진은 서울 땅을 밟으며 굳게 결심했다.

8월이 끝나기 전, 유레카 통신은 드디어 가입자 1,000만 명을 돌파했다.

============================ 작품 후기 ============================

쾅!

“이봐, 피디! 대체 난 언제쯤 하나와 사귈 수 있는 거야! 오늘도 대본 보고 빡돌았다고! 거기서 발을 빼는 게 어디 있어!”

실탄프로덕션 PD는 멱살이 잡힌 채 공중에서 애처롭게 버둥버둥거렸습니다.

“지금 투자자들이 시놉시스 보고 난리난 거 안 보여?! 그만 뜸들이고 솥뚜껑 열란 말이야! 투자자들이 지쳐서 투자금 뺀다고 하면 어쩔 거야! 이 드라마 엎을 거야?”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아, 안 돼!”

“왜 안 돼!!!”

가련한 피디는 울먹거렸습니다.

“심의회에서 전연령 관람가로 승인받았단 말이야…….”

15세 관람가만 됐어도 진작......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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