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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98화 (198/609)

00198  여름 휴가  =========================================================================

“저한테 별로 안 어울리죠?”

송하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숄을 연신 잡아당겼다. 그런다고 저 큰 키와 볼륨감이 다 가려지기나 할까.

오히려 숄을 벗어버린 것보다 살짝 가린 듯한 그 느낌이, 남자의 심장을 제대로 저격했다.

겨우 현실로 되돌아온 한서진은 필사적으로 떨림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어…… 너 비키니도 있었어?”

“사실 갖고 왔거든요.”

“근데 왜 아까는…….”

송하나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입기에는 좀 부끄러워서요.”

그 말이 왜 그리 야릇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자신의 앞에서는 괜찮다는 의미일까. 한서진은 가슴이 더욱 세차게 뛰었다.

송하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담갔다. 길고 늘씬한 다리가 물속으로 천천히 잠긴다. 간단한 동작이지만,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조금씩 다가왔다. 허벅지까지 아슬아슬하게 차오른 수면이 철렁거리며 가볍게 튄다.

“물이 뜨겁네요. 겨울에 오면 더 좋을 거 같은데.”

“그럼 겨울에 또 올까?”

“그래요.”

천연석에 가슴을 기대고 자세를 낮춘 송하나가 돌아보며 배시시 웃었다.

흉부까지 몸을 담근 자태는 그저 시선을 붙들어놓을 뿐이다. 엉뚱하게도, 한서진은 그녀가 왜 해변에서 비키니를 입지 않았는지 납득해버렸다.

이런 여자가 비키니를 입고 해변을 활보한다는 것은 무차별 폭격이다. 여자든 남자든, 사정없이 짓밟아버리는 융단 폭격.

겨우 30cm, 그녀와의 거리.

그 짧은 간격은 아득한 수평선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마음만 먹으면 닿을 수 있을 듯 여겨지기도 했다.

손만 조금 뻗으면, 분명 좁힐 수 있는 거리다. 그러나 선뜻 손이 움직여지질 않는다.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해서인지, 지금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게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겁이 나서인지. 한서진은 자신의 마음을 몰랐다.

“아, 이러고 있으니까 너무 좋다. 오빠는요?”

“……나도 좋아.”

“바다도 예쁘고, 물도 따뜻하고. 겨울에 오면 진짜 엄청 좋을 거 같지 않아요?”

“그러게. 겨울에 꼭 한 번 다시 와야겠네.”

“이번 주 용돈 받으면 이렇게 조그만 개인 별장 하나 지어둘까 봐요.”

“회장님 개인 별장 있지 않아?”

“그건 너무 사교 파티장 느낌이라서 별로예요. 이번엔 제 개인 별장으로 꾸며보려고요.”

재벌 딸이라 그런지 금전 감각이 역시 다르다. 우스운 것은 자신에게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500억 달러라는 옷이, 어느덧 자신에게도 딱 맞는 슈트가 되어간다는 뜻일까.

한서진은 가만히 그녀의 옆모습을 보았다. 천연석 위로 팔을 걸치고 턱을 괸 채 먼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상념에 젖은 듯한 표정은 이미 어엿한 숙녀였다.

하얀 뺨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다. 문득 강한 충동이 들었다.

넌 날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고 싶은, 그런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이.

“근데 오빠는 왜 연애 안 해요?”

“응?”

“오빠 정말 괜찮은데, 연애는커녕 주변에 여자도 전혀 없는 것 같아서요. 혹시 여자에 관심 없어요?”

그럴 리가 있겠냐!

하지만 곧이곧대로 속마음을 말할 수도 없는 처지라, 한서진은 재빨리 두뇌를 풀가동했다. 어떡하면 자연스럽고, 또 뒷일을 기약하며, 이 자리를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을까?

“어, 음…… 사실 내가 눈이 좀 높아.”

“그래요?”

“이런 말하긴 그런데, 지혜가 좀 이쁜 편이잖아.”

양심이 사정없이 푹푹 파인다. 한서진은 양심이 깎여나가는 고통을 필사적으로 인내했다.

그래도 남자들 사이에서는 인기 많으니까, 이쁜 게 맞겠지. 내가 보기엔 아니올시다지만.

송하나는 맞장구를 쳤다.

“그렇죠. 언니 엄청 미인이시죠.”

“그래서 그런가, 지혜보다 별로면 마음이 가질 않네. 너무 속물이지, 나?”

“아니에요. 이해해요. 저라도 그랬을 거 같아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던 송하나는 가볍게 눈웃음을 쳤다.

“그럼 오빠는 여자친구 만들기 엄청 힘드시겠다.”

“왜?”

“무조건 지혜 언니보다는 이뻐야 한다면서요. 좀처럼 찾기 힘들 텐데.”

“에이, 세상의 반이 여자인데, 지혜보다 예쁜 애를 못 찾겠어?”

무릇 오빠의 입장에서 여동생보다 예쁜 여자는 발에 치이도록 널린 것. 지혜가 예쁘다고 쫓아다니는 남자들이 이해가 안 되는 판인데.

한서진은 이번에는 자신이 물었다.

“하나 넌 연애 안 해? 남자에 관심 없어?”

“글쎄요.”

“이상향은 있니? 아니면 좋아하는 스타일이라던가.”

“알고 싶으세요?”

“……네가 물어봤으니, 나도 물어본 거지.”

은근한 질문에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얼버무렸다.

송하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조소를 닮은 듯한 그 웃음도 어찌나 이쁜지 몰랐다.

“아빠랑 편하게 술 마실 수 있는 남자요.”

“……회장님이랑?”

전혀 의외의 대답에 한서진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송하나는 먼 바다를 쳐다보며,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아빠, 다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많이 외로우신 분이거든요. 전부인과 결혼 생활도 순탄치 않으셨고.”

“…….”

“친구도 없어요. 저와 엄마 때문에 다른 언니 오빠들하고도 안 친하고요. 마음 터놓으실 게 없는 분인데…… 그래서 아빠와 친구처럼, 아들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남자가 좋아요.”

“회장님을 많이 사랑하는구나.”

“아빠잖아요.”

“…….”

입맛이 조금 썼다.

아빠니까, 가족이니까 사랑한다. 그런 사고방식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마지막으로 보았던 생모의 초라한 뒷모습을 떠올리며, 그는 주먹을 살짝 쥐었다.

그는 농담처럼 말했다.

“너도 남자친구 찾기 쉽지 않겠다.”

“그쵸? 그런 남자 없을 것 같죠?”

“회장님하고 편하게 술 마실 정도면 최소 10대 그룹 재벌 2세 정도는 되어야 가능할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은 기본이 40대잖아. 이럼 또 나이가 안 맞고.”

“그래도 오빠만큼 어렵진 않을 거예요. 지혜 언니보다 괜찮은 여자를 어디 가서 찾으시려고요.”

“지혜보다 괜찮은 애는 널리고 널렸지.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지혜가 말이야. 사실은…….”

한서진은 동생의 흉을 떨며, 타박했다. 송하나는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달빛 아래에서 온천에 몸을 담근 채, 둘은 유독 길게 대화를 나누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한지혜가 거실에 엎어져 자고 있었다. 심지어 옷도 입고 나간 그대로다. 아무렇게나 다리를 늘어뜨린 채 코까지 고는 모습을 보며, 한서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거보다 괜찮은 여자? 세상에 널렸을걸.

“얜 대체 몇 시에 들어온 거야? 술은 또 누구랑 처마시고.”

사고 걱정은 안 한다. 경호원들이 거리를 유지하며 24시간 경호를 했을 테니까.

그는 낑낑대며 한지혜를 끌어다가 구석에 던져 버렸다. 충격을 느낀 한지혜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아, 뭐야……. 내가 왜 여기 있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이년아. 어제 누구랑 처마셨어?”

“그냥 해변에서 만난 애들이랑. 아무 일 없었어.”

“당연히 아무 일도 없었겠지. 경호원이 몇인데.”

한지혜는 다시 눈을 감고 쿨쿨 잠이 들었다. 술 냄새가 아주 그냥 진동을 한다.

“오빠, 일어나셨어요?”

그때 송하나가 방에서 눈을 비비며 나왔다.

짧은 핫팬츠에, 커다란 흰 박스티를 걸친 모습이다. 티의 목 부위가 크고 헐렁해, 한쪽 어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워낙 얇은 티다 보니, 안에 받쳐 입은 검은색 비키니가 눈에 띈다.

“언니는요? 아, 저기서 주무시네. 언제 들어오셨대요?”

“몰라. 새벽에 기어 들어왔나 보네.”

“저렇게 놔둬도 돼요? 침대로 옮겨야지 않을까요?”

“저대로 디비져 자라고 해. 가까이 가지 마.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저 술 냄새는 익숙해요.”

송하나는 한지혜를 부축해서 들어 올리려 했다. 침대로 옮기려는 모양이다.

할 수 없이 한서진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한지혜를 들어 올려서 등에 업은 뒤, 침실로 갔다. 그리고 침대에 사정없이 던져 버렸다.

송하나가 기겁을 했다.

“오, 오빠! 그러다 언니 다쳐요!”

“안 다쳐, 안 다쳐. 저 봐, 잘 주무시잖아.”

그 말대로 한지혜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쿨쿨 잘 자고 있었다. 송하나는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손가락을 물고 지켜봤다.

“언니한테 너무 사정없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 이것도 남매간의 우애니까.”

한서진은 손을 탁탁 털며 침실을 나섰다. 그리고 송하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침 먹어야지? 나가서 먹을까?”

“네, 그래요.”

둘은 숙소를 나섰다. 업체에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그냥 적당히 돌아다니며 식당을 찾았다.

한 식당을 정하고, 둘은 안에 들어갔다. 간단한 메뉴로 아침을 해결한 뒤 다시 나왔다.

해변에는 미풍이 기분 좋게 살랑이고 있었다.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산책하듯이 해변을 걸었다.

‘손잡고 싶다.’

문득 한서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흘끔 돌아보았다. 송하나는 팔짱을 끼듯 옆구리를 껴안은 채 걷고 있었다. 이래서야 손을 잡기는커녕, 손끝이 스치기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오빠, 저 사진 좀 찍어주세요.”

“사진? 아, 응.”

한서진은 스마트폰을 받아들고 뒤로 물러났다. 송하나는 바다를 배경으로 서서 포즈를 취했다. 똑바로 선 채 브이자를 그린, 깜찍한 포즈였다.

찰칵, 찰칵, 여러 장의 사진을 찍고 그는 스마트폰을 다시 돌려주었다. 그녀가 말했다.

“같이 찍을래요?”

“같이?”

“네, 기념으로.”

“기념, 좋지. 찍자.”

송하나가 옆에 바짝 붙어 섰다. 가슴팍에 그녀의 머리가 살짝 닿자 심장이 다시금 쿵쾅거린다. 부디 이 맥박이 그녀에게 들리지 않아야 할 텐데.

“자, 찍어요.”

셀카 모드의 카메라를 들어 올린 채 송하나가 말했다. 한서진은 애써 렌즈를 주시하려 노력했다. 송하나를 힐끔거리는 모습이 찍히기라도 하면 무슨 망신인가.

“그러고 보니까 오빠랑 같이 사진 찍은 건 처음이네요. 그렇죠?”

“아, 그러네.”

“전 사진 찍는 게 좋아요. 사소한 것도 일일이 찍어서 기록을 남겨요. 나중에 다시 돌아볼 수 있게.”

“좋은 습관이네. 나도 사진 찍는 건 좋아해.”

당연히 거짓말이다. 사진 찍는 걸 얼마나 귀찮아하는데.

“아, 그럼 앞으로 자주 같이 찍어요. 지혜 언니도 같이.”

“그럴까?”

“네, 10년쯤 뒤에 하나하나 들춰보면 얼마나 좋은 추억이 되는데요.”

“10년이라……그때 우리는 뭐 하고 있으려나?”

“오빠는 지금처럼 사업하실 테구…… 전 엄마 백화점에서 일 배우고 있지 않을까요?”

송하나는 밝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아직 자신이 차기 회장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모친도 알려주지 않았을 테니.

“백화점이라니, 그보다는 더 큰 회사에서 경영자 수업 받고 있을 거야. 틀림없어.”

“백화점도 이미 충분히 큰데.”

“하나 너한테는 너무 작아. 더 큰물, 더 큰 회사에서 일 배우고 있을 거야. 내가 장담해.”

“회사 크면 피곤한데. 신경 쓸 게 많단 말이에요.”

“그럼…… 하나 너는 뭘 하고 싶은데? 특별히 정말 하고 싶은 게 있어?”

송하나는 웃음이 사라지고 조금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똑바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제 꿈이 뭔지 알고 싶으세요?”

============================ 작품 후기 ============================

“프로게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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