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97화 (197/609)

00197  여름 휴가  =========================================================================

I호텔에서 열린 경영자총회는 평소보다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영원그룹에도 초대장을 발송했을 텐데? 왜 아직도 안 보이지?”

“김 회장, 아직 못 들었어? 총회 가입을 거절했다더군.”

“뭐? 총회 가입을 거절해?”

김 회장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전국경영자총회, 전국의 사용자 대표조직으로서 경제단체 빅5에 들어가는 조직이다. 두 개 이상의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 총수라면 필수적으로 가입해야 할 만큼, 경제계에서 가지는 위상이 대단하다.

“박현준이라고 했나, 그 애송이 뜻인가? 아니면 오너 뜻인가?”

“아마도 후자겠지. 박현준은 월급 회장에 지나지 않으니까.”

“허허, 참. 젊은 친구가 배짱이 두둑한 건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김 회장은 끌끌대며 혀를 찼다.

“배짱이 두둑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나? 재계 1위 진성그룹한테서 버젓이 제약 사업을 뺏어온 친군데 말이야.”

“이창용 회장님께서 건재하셨으면 꿈도 못 꿀 일인데, 역시 여자는 이래서 안 돼.”

“듣자니 이서나가 한서진이와 한국대 동문이라더군.”

“아무리 동문이라 해도 그렇지, 어떻게 사업에서 사사로운 감정을. 이래서 여자들이란…….”

경영자총회는 한서진을 놓고 전반적으로 어수선했다.

본래 재계는 그를 크게 인식하지 않았다.

500억 달러. 대기업을 휘청거리게 할 수도 있는 거액을 가진 인물이지만, 운으로 대박을 건진 애송이라는 이미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운 좋게 아랍 왕자의 눈에 띄어 기술을 매각한 대학생. 딱 그 정도 이미지였다.

물론 H그룹 회장과 친하다는 점 때문에 함부로 대하는 이는 없지만, 아무래도 ‘전통적인 거부’들이 ‘신흥 재벌’을 보는 눈은 곱기 어렵다.

그가 설계 사무소를 확장했을 때는 긴장해서 촉각을 곤두세운 이들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순전히 설계 연구에만 전념하는 것을 보고 다들 마음을 놓았다.

요행으로 거머쥔 부 덕분에 국내 제일의 부자가 된 대학생.

사업의 ‘사’자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애송이.

본래는 딱 그 정도 이미지만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그 친구…… 설마 본격적으로 인수 합병에 나설 작정인가?”

제약 그룹 설립은 경총 회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몇 개 이상의 계열사를 거느린 기업가들은 500억 달러가 결국 국내 시장에 참전하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전에는 졸부를 보듯이 ‘아 쟤가 500억 불, 걔야?’라는 반쯤 호기심을 담고 보았다면, 이제는 긴장감을 품고 의식하게 된 것이다.

500억 불의 현금이 마음먹고 움직이면 당해낼 수 있는 기업이 별로 없다. 미리 친분을 쌓아두고 우호를 다져야 했다.

회원들 중 상당수는 한서진이 오늘 이 자리에 직접 나올 거라 생각했다. 오늘 이 자리를 기다리던 이도 많았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한서진은커녕 월급 회장인 박현준까지도 코빼기를 내비치지 않았다.

“하나가 제주도 가재. 셋이 같이.”

초여름을 맞이한 아침, 한지혜가 심드렁한 얼굴로 다가와서 말을 꺼냈다. 느닷없는 통보에 한서진은 얼떨떨했다가 반문했다.

“하나가 너한테 그랬어?”

“뭐야, 오빠한텐 아직 말 안 한 거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분명 송하나는 전에 말했다. 여름에 셋이 같이 제주도 놀러가자고.

고대했던 여름휴가다. 그런데 이 얼떨떨한 기분은 무얼까.

한지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셋이 같이 가는 게 싫은가 보네. 내가 빠져 줘?”

“아니아니, 그건 아니고.”

“곤란한데 이번에는 눈치껏 못 빠져줄 거 같아. 나 안 끼면 아예 휴가 자체가 안 되니까. 하나도 나한테 빠지지 말아달라고 하더라.”

“왜?”

“왜는 뭐가 왜야. 그럼 미성년자랑 둘이서 제주도 여행을 가려고 생각했어? 그 집에서 허락을 할 거 같아?”

대놓고 면박을 주자 한서진은 할 말이 없어졌다.

“아무튼 어쩔 수 없이 끼게 됐으니까 나한테 눈치 주지 말고, 그냥 나 신경 쓰지 말고 놀아. 난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얌전히 있을게. 방해 안 하고.”

방학도 했겠다, 여름휴가만 줄곧 고대하고 있던 한서진으로서는 맥이 빠지는 소리였다.

하지만 마음을 달리 먹었다. 그래, 지혜 말이 맞다. 어떤 부모가 미성년자와 단 둘이 여행을 허락하겠는가.

한서진은 일단 허락을 구하기 위해 백철중에게 연락했다. 물론 요식적인 행위다.

「어, 무슨 일인가?」

“아, 네. 회장님, 다름이 아니라 제가 친동생이랑 이번에 제주도로 여름휴가를 다녀오기로 했는데요.”

한서진은 ‘친동생’이란 말에 억양을 강하게 실었다.

“하나도 ‘우리 남매’와 같이 가고 싶어 하는데, 그래도 될까 해서요. 하나 말로는 허락은 얻었다고 하는데 확인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연락 드렸습니다.”

‘우리 남매’란 단어에 강조 표시를 하고, 한서진은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아, 그거? 나도 들었네. 셋이서 재미있게 놀다 오게나.」

“그래도 됩니까?”

「자네 여동생과 우리 하나가 많이 친하다면서? 걱정할 게 뭐 있겠나. 공부하느라 지쳤을 텐데 이참에 잠깐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지.」

전화를 끊고, 한서진은 불끈 주먹을 쥐었다.

아싸, 비키니다!

그랬는데…….

“래쉬가드?”

“이거 색깔 예쁘죠?”

제주도.

숙소에 짐을 풀고 해변으로 나온 한서진은 목부터 시작해서 손목 끝까지 완벽하게 가린 래쉬가드 상의를 보고 절망했다.

심지어 하의도 비키니식이 아니라 사각 팬츠식으로 된 제품이었다.

늘씬한 다리를 유감없이 볼 수 있어 그나마 숨을 돌렸지만, 이건 해변에서는 본래 당연한 것 아닌가?

래쉬가드라니, 송하나가 이 악마의 발명품을 입고 나올 줄이야. 이런 반전은 전혀 생각도 못했다.

“음, 으음. 마음에 들어. 내가 골랐지만 내 몸매를 너무 훌륭히 돋보여주는군.”

지오빠 속터지는 것도 모른 채, 한지혜는 아찔한 빨강 비키니를 입은 채 자신의 몸매를 둘러보며 만족스러워 했다.

“여름을 위해 운동을 열심히 한 보람이 있네.”

송하나만큼은 아니지만, 한지혜도 뭇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훌륭한 몸매를 지녔다. 160 후반대의 키에 적당한 가슴과 길게 쭉 뻗은 각선미, 이 정도면 상위 1% 안에 속하는 몸매라 할 수 있으리라.

‘내가 저년 비키니를 보려고 여기까지 고생해서 온 게 아닌데.’

물론 동생의 몸매가 훌륭하다 한들 한서진에게는 짜증 밖에 안 났지만.

“너, 수영복이 그게 뭐야. 얌전하지 못하게.”

“웃긴다. 내 나이가 몇 갠데 수영복 스타일까지 오빠 허락을 받아야 돼?”

“남사스럽잖아. 하나가 얼마나 민망하겠어.”

“하나야, 언니 수영복이 민망하니?”

“아니요, 아주 예쁘신데요.”

한지혜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허리에 두 손을 올렸다.

“저봐, 이쁘다잖아. 나도 한 몸매 하거든?”

‘아, 짜증나. 확 둘이 바꿔 입혔으면 좋겠네.’

그는 속으로 감정을 억누르며,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송하나한테 부드럽게 말했다.

“래쉬가드 어때, 좋아?”

“네, 편하고 좋아요. 살도 안 탈 거 같구요.”

“……그래, 좋지. 래쉬가드.”

민소매 상의, 비키니 하의도 얼마든지 많은데 왜 하필 고르고 골라도 저런 래쉬가드인 것인가. 저렇게 방어력이 낮은 제품으로 어떻게 해변에서 버티려고.

물론 그 걱정은 기우였다.

“와, 저 여자 봐. 한국인 맞아?”

“저거 뽕 넣은 거 아니지? 무슨 가슴이 저래?”

“미쳤네, 미쳤다.”

젊은 남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송하나는 해변에서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상의를 철저하게 가리는 래쉬가드를 입었음에도, 우월한 볼륨감은 숨겨지지 않는다.

만약 한지혜 같은 아찔한 비키니를 입었다면, 오늘 커플 여럿 깨뜨렸을지도 모른다.

뜨거운 햇살과 차가운 에메랄드빛 바닷물을 즐기며, 셋은 시원한 여름휴가를 보냈다. 운동을 좋아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지 송하나는 수영을 정말 잘했다.

‘래쉬가드 입을 만하네.’

저만치 멀리까지 왕복을 다녀오는 것을 보고 한서진은 그저 혀를 내둘렀다. 안전요원이 말리려고 왔다가 그저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었다.

한지혜가 감탄했다.

“와, 하나 수영 되게 잘하네. 운동 좋아하는 건 알았는데. 역시 재벌집 아가씨는 다른가.”

“응? 재벌집 아가씨라니?”

“하나 쟤, H그룹 딸이라며?”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저번에 물어보니까 하나가 말해주던데?”

당황하는 한서진과 달리 한지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부잣집 딸인 건 알았는데, 영 예사롭지가 않단 말이지. 준석 오빠랑 어려서부터 친하다고 할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어. 그래서 H그룹 딸이라고 들었을 때 별로 놀라진 않았어.”

“아무렇지 않아?”

“내가 뭘?”

“…….”

“나도 어디에서 안 꿇리는 오빠 뒀는데, 재벌 딸이라고 뭐 기죽고 그래야 하나?”

“그래, 차라리 그게 너답다.”

여자들 사이는 자신의 짐작을 벗어난 유대감이 있는 것 같다. 아무튼 동생이 송하나의 신분을 알고 있다니 마음이 편했다. 그동안은 가시 한 개가 목구멍에 살짝 걸린 듯했었는데.

물놀이는 무척 즐거웠다.

스포츠 수영으로 가볍게 몸을 푼 송하나는 두 남매와 어울리며 재밌게 시간을 보냈다.

여자친구 몰래 흘끔거리는 주위 남자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한서진은 그런 시선이 불쾌하다기보다는, 왠지 즐거웠다. 남자로서의 지위를 확인받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오후가 되자 셋은 물놀이로 지친 몸을 끌고 해변의 숙소로 돌아왔다. 원래 숙박업을 하는 업체인데 휴가기간 동안 아예 통째로 빌리기로 했다. 번잡한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고급 호텔에서 휴가를 보낼 수도 있지만, 그냥 소박하게 보내자는 제안에 이런 일반용 시설을 빌린 것이다.

“호텔 가봤자 외국인 투성이야. 재미도 없고.”

“맞아요. 차라리 이렇게 노는 게 훨씬 재밌어요.”

이른 저녁으로 해산물 만찬이 잔뜩 차려졌다. 셋은 즐겁게 이야기를 하며 요리를 즐겼다.

해가 수평선에 걸리기 시작했다. 한지혜는 비키니 위로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얇은 겉옷을 걸치고는 일어섰다.

“어디 가냐?”

그녀는 배시시 눈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헌팅.”

“헌팅하려고?”

“미쳤어. 당하려고 가는 거야.”

“그렇게 음흉하게 웃고 있는데 누가 헌팅한다고?”

“뭐래, 나 같은 훌륭한 먹이감이 포착되면 사냥꾼들이 사방에서 몰려들걸? 아무튼 갔다 온다. 둘이 놀고 있어.”

한지혜는 후다닥 숙소를 나섰다.

넓은 공간에 둘만 남자 잠시 어색한 침묵이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수영복 차림이다. 비록 악마의 발명품이라는 래쉬가드이긴 하지만…….

한서진은 어색함을 떨쳐내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지혜가 요새 좀 외롭나 보네. 여기까지 와서 남자나 찾으러 다닐 줄은 몰랐어.”

“지혜 언니가 그런 분은 아닌데, 그냥 심심해서 저녁 바다나 보러 가신 걸 거예요.”

“그래?”

“네, 언니 헌팅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아마 바다 보러 가신 걸 거예요.”

“기집애, 그럼 셋이 같이 가면 더 좋잖아.”

송하나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십대의 표정이라기에 믿어지지 않는 어른스러운 미소다. 벌써부터 이리 조숙한데 몇 년 지나면 과연 어떨까. 얼마나 성숙해 있을지 언뜻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래도 재벌 딸인데, 호텔 말고 이런 데서 휴가 보내려니까 조금 불편하지?”

“괜찮아요. 저 이런 것도 좋아해요.”

그녀는 웃으며 덧붙였다.

“학교에서도 저 재벌 딸인 거 모르는걸요.”

“하긴, 그랬지.”

화려한 인생, 그리고 소박한 삶. 송하나는 그 두 가지를 아무렇지 않게 즐기는 느낌이었다. 어느 쪽으로 스위치를 눌러도 당연한 듯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오빠, 숙소 뒤에 온천 있던데. 거기 가실래요?”

“온천?”

“인공온천 같던데, 확 트이게 잘 꾸며놔서 보기 예쁘더라고요. 바다도 한눈에 보여서 경치도 좋고요.”

“그래, 가자.”

“먼저 가 계세요. 전 씻고 갈게요. 소금기가 있어서.”

“알았어.”

한서진은 인공온천 입구에 있는 간이 샤워기로 대강 소금기를 씻어내고는 들어섰다.

과연 송하나의 말대로 사방이 확 트이게 꾸민 인공온천이 있었다. 자연의 모습에 가까운 천연석으로 꾸며놔서 마치 대자연 속에 잠긴 듯한 느낌마저 준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는 온천에 발을 담그고 뜨거운 느낌을 즐겼다. 밤에 물들어가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하나야, 왔……어?”

무심코 부르며 돌아보던 한서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한지혜 못지않은 아찔한 노출의 검은 비키니를 입은 채, 반투명한 숄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각을 철저히 강탈하는 치명적인 모습, 그는 경직되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이것도 너프해 보시지!”

“목표를 포착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