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96화 (196/609)

00196  보복성 인수합병  =========================================================================

“창용이가 제주도로 내려갔다는군.”

잔을 부딪치며 백철중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놈도 돈은 많으니까, 잘 관리하고 요양 잘하면 십 년은 더 거뜬히 살 거야. 자네도 너무 신경 쓰지 말게.”

“포기했을까요?”

“모르지. 마음으로는 놓지 못했을 수도. 하지만 완전히 은퇴한 걸 보면 겉으로나마 확고한 결심을 보여준 걸세.”

술잔을 입에 대며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에 제대로 큰 경험을 했다.

엘릭서의 존재를 알린 적도, 암시한 적도 없다. 헌데 이창용은 귀신같이 그 냄새를 맡고 접근해왔다. 마치 맡겨놓은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당연하게 요구했다.

한서진의 마음이 조금만 약했어도 엘릭서를 주지 않는 것에 오히려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이창용은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밀어붙였으니.

‘보물을 나눠주지 않는 것만으로 사람을 죄인처럼 만든다.’

이창용이 건강을 해친 건 자신의 책임이 아니다. 또한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보물을 나눠줘야 할 만큼 이창용과 돈독한 사이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은 진성전자 공장에서 췌장암을 얻어 죽을 뻔했고, 산재도 받지 못한 채로 반쯤 쫓겨나다시피 퇴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릭서를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죄인 것이다. 그것이 저들의 논리이고, 주장이었다.

“자네도 이번에 겪었으니 알 거야. 명심하게. 이창용이는 오히려 신사 축에 속한다는 것을.”

“…….”

“만약 이창용이 아니라 중국 같은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였다면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아. 온갖 외교, 무역 압박은 물론이고 자칫 이 나라가 전쟁터가 될 수도 있어.”

건강한 삶을 탐하는 늙은 권력자의 탐욕이란, 세상을 순식간에 불지옥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엘릭서를 주지 않은 건 잘한 게야. 그러니 혹시라도 마음에 담아 두지는 말게. 설사 이창용이가 쇠진해서 죽더라도.”

영원한 비밀은 없다.

이창용을 믿고 과연 엘릭서를 줄 수 있을까. 결국 비밀은 새어나가게 되고, 한 번 새어나간 비밀은 공연한 진실이 된다.

비교적 신사적인 이창용 한 명을 상대하는 것도 이렇게 피곤하다. 헌데 천문학적인 부와 권력을 가진 왕족, 권력자, 자본가들이 수만, 수십 만 명씩 군집을 이뤄 달려든다면, 그것을 어떻게 다 감당할 수 있을까.

보물은 지킬 힘이 없는 자에게는 죄악이다.

그나마 한서진이 힘을 갖추고 있어 이기적인 원망을 듣는 선에서 끝났지, 만약 조금이라도 힘이 없었다면 철저하게 강탈당했을지도 모른다.

‘엘릭서는 영원히 감춰야겠구나. 적어도 세상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힘이 없는 한은.’

지킬 힘은 있으되, 존재가 알려지면 상상 이상으로 곤란해진다. 그리고 전 세계를 상대로 지킬 힘은 아직까지 없다.

“사실 엘릭서를 주더라도 이창용 회장님이 건강해졌으리란 보장도 없습니다.”

“그건 무슨 말인가?”

“저도 엘릭서의 정확한 효능을 모르거든요. 암은 확실히 낫게 했고, 회장님의 뇌 손상도 치유했지만, 그 밖에도 어떤 효능이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자네도 모르는 게 많군. 엘릭서에 대해서.”

“네, 저도 모르는 게 무궁무진합니다.”

백철중은 엘릭서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한서진이 만든 건지, 다른 곳에서 얻은 건지, 아무것도.

짐작 가는 바가 몇 가지 있지만, 그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것이 둘 사이의 굳건한 신뢰였다.

“어두운 이야기는 그만하세. 좋은 소식도 있네.”

“뭔가요?”

“유레카 통신 가입자가 600만 명이 넘었어. 경축할 일이지.”

출시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통신사의 가입자 수가 무려 600만 명이 넘었다. 이 기세를 살리면 빅3 이통사 중 하나를 몰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백철중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기존 약정 기간이 끝나면 갈아타려고 벼르는 잠재적 고객 수도 1,5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네. 그것도 최소한의 숫자야. 기쁘지 않은가?”

“정말 잘 됐군요. 오랜만에 좋은 소식입니다.”

“허허, 애초에 이건 성공할 수밖에 없었어. 칼라 통신망의 1/10이라도 흉내 낼 수 있는 통신 시스템이 지구상 어디에 있겠나?”

종합처리장치(TPU) 슈나우저, 초고속 메모리 코카 스패니얼.

이 둘을 탑재한 스마트폰은 기존에도 제법 있었다. 그러나 그에 어울리는 통신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H통신은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을 탑재한 스마트폰과, 최고 전송 속도가 초당 2.6 기가바이트에 이르는 유레카 통신을 묶음으로써.

도그폰. 소비자들이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이 장착된 차세대 고성능 스마트폰을 부르는 별칭이다. 어떤 이는 개폰이나 강아지폰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어쨌든.

유레카 통신 덕분에 H그룹은 도그폰 시장에서도 압도적인 강자로 우뚝 설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모바일 제조사들이 유레카 통신에 자사 폰을 공급하고 싶어 안절부절 못하지만, 당분간은 철저히 쳐낼 생각일세.”

“정부 규제가 안 들어오는 게 용할 정도군요.”

“안 그래도 요즘 말이 많네. 지들이 허가해줄 때는 언제고. 하지만 유레카 통신 요금이 제법 싼 편이라 결국 아무 소리 못하고 있지.”

시원하게 설명하던 백철중은 문득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진성제약을 인수한 이유가 뭔가? 정말 단순한 보복 차원에서인가?”

“글쎄요.”

한서진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엘릭서의 존재를 아는 백철중이라면 내심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점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캐묻지도, 내색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둘 사이에 맺어진 약속이었다.

“일단 제약 연구도 해보고 싶고…… 또 나름대로 자선 사업도 해보려고 합니다.”

“자선 사업?”

“그냥 돈만 내는 건 재미없잖아요. 보람도 없고요.”

진성제약, 진성메디컬 등 4개의 계열사를 인수한 뒤 박현준은 회사 통합에 몰두했다.

그룹은 본래 2개 이상의 회사 연합을 일컫는 말이다. 시가총액도 계열사 개수도 50대 그룹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어쨌든 엄연한 그룹이다.

기존 진성그룹 계열 임원들을 모두 쳐내고, 회사를 전반적으로 재정비하는 한편, 대대적으로 회사 출범식도 가졌다.

새로 지은 명칭, ‘영원그룹’은 비록 시가총액 1조 원도 안 되는 소규모 그룹이다. 하지만 진성그룹을 상대로 벌여진 적대적 인수합병에서 탄생했다는 점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기자회견을 앞두고 박현준은 안절부절 못했다.

“제가 정말 저 자리에 나가도 되는 겁니까? 이 회사의 주인은 대표님이신데…….”

“전 경영은 잘 못해요. 관심도 없고요. 박 회장님이라면 잘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박 회장. 작긴 해도 엄연히 4개 계열사를 가진 그룹의 최고경영자니, 회장이란 직함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박현준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유치원생이 아빠 옷을 훔쳐 입은 기분이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작 차장이었는데, 회장이라니……. 스스로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박 회장님은 잘 하실 거라 믿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결의를 다졌다. 그의 눈빛은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성큼성큼 기자들 앞에 나선 그는 단상에 서서 자연스럽게 연설을 시작했다.

“우리 영원그룹의 정체성은 제약 연구입니다. 세상이 진실로 필요로 하는 약을 개발하기 위한 것이라면 어떤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겁니다. 그게 바로 오늘 창업식에서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회사의 정체성입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지금 단상에 서 있는 건 더 이상 진성제약의 일개 사무직 차장이 아니었다.

“또한 매년 회사 이익의 일정분을 희귀병 환자들을 위한 약을 제조하는데 쓰겠습니다. 이는 약이 없거나 혹은 약값이 너무 비싸 고통 받는 희귀병 환자들을 위한 사회 환원 사업으로, 마진 추구가 아닌 환자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데 목적을 두겠습니다.”

가벼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멀리 구석에서 한서진은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고, ‘박현준 회장’은 자연스럽게 연설을 이어 나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병마에 고통 받는 환자분들과 함께 모든 것을 나누는 기업이 되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제약 회사의 설립 혹은 인수. 엘릭서의 원재료를 가장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수단이다.

그러나 어차피 엘릭서는 많은 양이 필요하지 않다. 한서진은 다만 안정적이고, 확실하게 공급받을 수단이 필요했을 뿐이다.

평소 회사를 놀리는 것은 실용적이지 않다. 그래서 한서진은 제약 연구로 회사의 목적을 설정했다.

엘릭서를 만들지 않을 때는 기초 제약 연구에 죽어라 노력하는 회사로 꾸려나갈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세운 회사도 아니니, 마진은 회사 유지를 위한 최소한으로 하되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신경 쓰게 할 생각이었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타회사가 제조하지 않는 약을 만들어서 저렴하게 팔거나, 눈이 튀어나오게 비싼 약을 환자들이 최대한 쉽게 구할 수 있게 하거나, 기타 등등.

이는 이창용이 마음에 남긴 부담을 어느 정도 덜어내는 역할도 할 수 있으리라.

한서진은 박수갈채를 받는 박현준 회장을 지켜보다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엘릭서 재료 공급처나 확보하려고 벌인 일이……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날씨가 꽤 무더워졌다.

그러고 보니 곧 여름방학이 온다.

눈을 뜬 왕의 쓴웃음을 보며, 노신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어인 일로 그리 웃으시는지요.”

“그냥 참, 사람이란 것은 어느 곳이나 다 똑같은가 보오.”

“꿈속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군요.”

“엘릭서 때문이오.”

짧은 한 마디. 그러나 노신하는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영생과 부활은 누구나 탐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함부로 허락해서는 안 되는 은총이기도 하지요.”

“영생과 부활이라……. 그 정도까지는 아니오.”

“아직도 엘릭서에 에테르를 담지는 못하는 모양이군요.”

“그렇소.”

한서진이 만든 엘릭서는 결국 모조에 불과하다. 정제된 에테르의 근원을 담지 못한, 가짜.

에테르를 정제한 근원이 담긴, 진짜 엘릭서는 오직 레노지안에만 존재한다. 한서진이 통찰안을 능숙하게 다루고, 에테르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다면 모를까, 그 전에는 진짜 엘릭서를 만들 수 없으리라.

가짜 엘릭서만 해도 그 세상에서는 신의 은총이나 다름없다. 병마를 치료하고, 약간이지만 육신의 나이를 젊어지게 할 수 있는 권능이 담겼으니.

그러나 진짜 엘릭서는 다르다.

모든 병마의 치유와 불로장생은 물론이고,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사람마저 온전히 되살릴 힘을 지니고 있다.

아무나 함부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 사용도 오로지 왕의 허락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엘릭서를 무단 사용한다면 천리를 거스른 죄로 중한 처벌을 받게 된다.

“요즘은 어떠합니까?”

노신하가 덤덤히 물었다. 무슨 뜻인지 깨달고 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한서진’의 근황을 묻는 것이리라. 꿈속에서 나약한 육신과 나약한 정신을 지니게 된, 레노지안의 군주.

“뭐, 그곳에서는 노예라 부를 수 없게 됐소.”

============================ 작품 후기 ============================

리미트리스 드림에서 노예는 오직 한 명 뿐이죠.

딱지닦이 실탄;;;;

오늘도 딱지를 반짝반짝 닦느라 관절통에 시달립니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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