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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95화 (195/609)

00195  보복성 인수합병  =========================================================================

검은 세단이 급히 정지했고, 뒷좌석에서 이서나가 내렸다.

그녀는 수행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급히 달렸다. 마음속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진성제약 본사에 들어선 그녀는 어렵지 않게 로비에서 한서진 일행을 발견했다.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가다듬고 다가갔다.

“한 대표, 나 왔어요.”

한서진은 그녀를 돌아보고는 덤덤히 인사했다.

“이서나 회장님. 여기까지 오셨군요.”

“나와 이야기 좀 해요.”

“알겠습니다.”

거절을 하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다행이었다. 일단 이서나는 보이지 않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곳은 보는 눈이 많아요. 조용한 곳으로 가죠.”

“좋습니다.”

다행히 한서진은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그녀는 동맹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진성제약 본사에 마련된 비즈니스 회의실에 자리 잡고, 이서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진성제약을 인수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이서나 회장님께 손해가 되진 않을 겁니다.”

“그건 아니죠. 지금 취임 초기라 입지가 불안한데, 제약 사업까지 넘어가면 다들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이서나 회장님보다는 이용무 부회장이 더 불안할 겁니다. 자기가 한 짓이 있으니까요.”

영민한 이서나는 그 말뜻에서 바로 알아들었다.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용무한테 덮어씌우라는 건가요?”

“우리 둘의 관계는 얼마든지 빅딜로 포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여전히 이서나 회장님께 우호적입니다. 다만 이번 일은…… 그룹 기획조정실에서 먼저 저를 건드렸습니다.”

“……그건 내가 사과할게요.”

함부로 뒷조사를 했다. 자신 같아도 참고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참지 않아도 될 힘이 있는데, 뭐 하러 부당한 침해에 수긍하겠는가.

“겨우 시총 1,800억 원짜리 회사 하나 가지고 우리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래요, 겨우 1,800억 원짜리.”

이서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한서진이 해준 것에 비하면 제약 사업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아직 진성그룹은 제약 사업에 본격적인 투자를 하지 않은 단계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적당히 눈을 감을 구실을 찾아야겠군요.”

웃으며 말하지만 조금 속이 쓰린 것도 사실.

어떡하면 자신의 입지를 지키면서 이용무에게 떠넘길까 고민 중인데, 별안간 수행원이 하얗게 질려서 말했다.

“회장님. 이창용 회장님께서 또 쓰러지셨답니다.”

심장 문제로 쓰러진 이창용은 다행히 한나절이 지나기 전에 의식을 회복했다.

주치의는 신신당부를 했다.

“모든 경영에서 손을 떼고 절대 요양하셔야 합니다.”

기업가로서는 사실상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격무와 노화로 인한 건강 악화라 어쩔 수 없습니다. 회사는 완전히 잊으십시오. 일에서 완전히 정신을 떼어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회복되실 수 있습니다.”

이창용은 멍한 눈빛으로 듣기만 했다.

두 번이나 쓰러진 그의 눈빛은 기력이 많이 쇠진해 있었다. 측근들은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 보기만 했다.

한때 대한민국 경제를 호령하던 이의 눈빛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나약했다. 세월의 무상함인가.

한편 부친이 쓰러진 동안 이용무는 정신없이 바빠졌다.

“진성제약 및 관련 계열사들 경영진 교체에 들어갔습니다.”

“경영권을 방어하기에는 글렀어. 기존 경영진들에게 지시해. 최대한 가져올 거 챙겨서 빠져 나올 준비 하라고.”

“이서나 회장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길이 멈칫했다.

이용무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차갑게 말했다.

“들어오시라고 해.”

잠시 후 이서나가 수행원의 안내를 받으며 당당히 들어섰다. 도도한 걸음을 보는 이용무의 눈빛이 조금 매서워졌다.

그녀는 앉자마자 대뜸 용건부터 꺼냈다.

“대강 들었어. 네가 이상한 소리로 아버지를 부추겼다며?”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덕분에 제약 사업만 날아갔네. 한 대표와 그룹 사이에 조금 금도 갔고. 이걸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지?”

“누나.”

“한 번 쓰러지신 것 때문에 심약해진 아버지까지 이용하다니, 회장직에서 밀려난 네 아쉬움이 얼마나 큰지는 이해해.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아?”

대놓고 깔아뭉갠다. 이용무는 입술을 깨물며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서나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우리 페어플레이하자. 아버지는 끌어들이지 마. 안 그래도 건강 안 좋으신 분인데, 의료진이 경영에서 일절 손 떼라고 했는데, 못 들었어?”

“누나야말로 한 대표와 H그룹을 먼저 끌어들이지 않았나? 그것도 그룹의 살점까지 떼어다 바치면서. 큼지막하게.”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증거 있어?”

“증거? 어차피 모든 이가 알고 있어.”

“그 모든 이가 왜 내 눈에는 하나도 안 보이고, 네 눈에만 보일까?”

이용무는 끓어오르는 가슴을 차갑게 식혔다.

지금은 모든 게 이서나에게 유리했다. 섣불리 그녀와 부딪치기에는 위험 요소가 컸다.

“진성제약 경영진은 내가 전원 사임하라 했어. 다른 계열사에 자리를 알아봐줘야겠지.”

“누나, 그게 무슨 짓이야? 제약 사업을 그대로 송두리째 내주겠다고?”

“어차피 저쪽이 51% 쥐고 있고, 결국 시간문제인데 질질 끌어서 좋을 건 뭔데? 한 대표와 완전히 선을 긋겠다고?”

“…….”

“잊지 마. 네가 아버지를 부추기지만 않았으면 애초에 이렇게 되지도 않았어.”

이서나는 차갑게 경고했다.

“이 이상은, 네가 동생이라 해도 용납 못해.”

진성제약 경영진은 순순히 교체를 받아들였다.

진성제약을 중심으로 관련 계열사 3개가 함께 넘어오자, 박현준은 상호를 변경하는 등 회사에서 진성의 정체성을 지워버리는 작업에 들어갔다.

하루에 3시간도 채 자지 못하고 일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더러운 기억을 안고 쫓겨나듯이 나온 회사에 점령군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마약처럼 달콤한 것이었다. 고된 격무의 피로도 잊게 해줄 만큼.

“망할! 망할!”

김성일 기조실장은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책상을 걷어차 버렸다.

이서나가 이용무를 거세게 질책했다. 그룹 승계를 위해, 판단 능력을 잃은 아버지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명분이었다.

다소 억지스러운 명분이지만, 주주들과 투자자들은 그녀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들은 그룹의 안정을 원했지, 더 이상의 변수는 원하지 않았다.

이용무가 흔들린다는 것은 자신의 몰락을 의미했다. 김성일은 미칠 것 같았다.

이창용이 입원한 병실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창용이 보러 왔네. 들어가도 되나?”

느닷없는 백철중의 회장의 등장에 경호실장은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회장님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있나. 우리가 친구는 아니지만 몇 십 년을 알고 지낸 사인데.”

백철중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며 병실문을 열었다. 경호실장은 감히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병실에 들어서며, 백철중은 일부러 쾌활하게 불렀다.

“어이, 창용이. 나 왔네.”

“……백철중이 네놈이 여기는 웬일이냐?”

“또 쓰러졌다면서? 그러게 내가 진작 운동 좀 하라 했지? 허구한 날 여자만 끼고 놀지 말고.”

“지금 놀리러 온 거냐?”

“아니, 진지하게 충고를 해줄까 해서 왔다.”

백철중은 여전히 웃고 있지만, 그 미소는 차가웠다.

“이창용이, 욕심은 그만 접어라.”

“욕심? 내가 욕심?”

이창용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조금 더 건강하게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게 왜 욕심인가? 철중이 네놈은 안 그랬냐?”

“아등바등하는 건 욕심이 아니지. 헌데 왜 애꿎은 한서진이를 자꾸 괴롭히고 매달리나? 그건 욕심이지.”

“백철중.”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으면 의료진을 달달 볶아. 운동을 하고 식이요법을 해. 의료 사업에 진즉 돈도 좀 투자하고. 그렇게 아등바등하면 누가 욕심이라고 하나?”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말하는구나, 네놈.”

이창용의 두 눈에 솔직한 분노가 드러났다.

“백철중, 네놈이 지금 나라면 나처럼 안 했을 것 같냐? 가슴에 손을 얹고 지껄여 봐라.”

“솔직히 말해서.”

백철중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

“건강에 집착하는 네 마음은 십분 이해한다. 나라도 네놈과 비슷한 심정이었을 거다. 아니, 지금도 비슷한 마음이고.”

“근데 그런 말을 지껄여?”

“그런데 남을 괴롭히고 강탈하는 건 동기가 어쨌든 간에 잘못된 거 아니냐?”

“내가 언제 괴롭히고, 강탈했다고!”

“그럼 왜 한서진이를 자꾸 자극하는 거냐? 애초에 네가 쓰러진 게 한서진이 때문이냐? 왜 한서진이한테 책임이 있는 것처럼 들러붙는 거냐?”

그 말에는 이창용도 순간 대답이 막혔다.

백철중은 싸늘히 말을 이었다.

“나는 네놈 욕심 막을 거다. 내 예비 사위가 곤란에 처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다.”

“이기적인 놈.”

“가족을 위해서 이기적인 게 뭐 어때서? 어차피 너와 내가 돈독한 사이도 아니고.”

“…….”

“너한테 욕먹고, 네 원망 받는 거, 전혀 무섭지 않다. 진성그룹까지 박살나고 싶으면 얼마든지 지금처럼 해라. 나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

“…….”

“김성일이라고 했나? 기적? 새파란 애송이가 지 자리 좀 보전해보겠답시고 가져온 날조에 홀랑 넘어가다니, 이창용이도 많이 나약해졌구먼. 건강 잃으니 판단력이 흐려지디? 기적 같은 게 세상에 어디 있냐, 한심한 놈.”

기적 따위는 없다. 너 혼자 착각하는 것일 뿐.

노골적인 조롱이 담긴 말에도, 이창용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이창용, 이놈…….’

백철중은 내뱉는 말과 달리 심경은 복잡했다.

조금 더 건강하게 살고 싶은 마음, 그라고 왜 모르겠는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부, 명예, 권력. 이 모든 것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쥐고 싶은 마음, 절절히 이해한다.

자신은 기적의 수혜를 입었고, 이창용은 입지 못했다. 단지 그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건 그냥 가정인데, 생각을 해봐라. 기적이라는 게 정말 있다고 쳐도 그걸 인정할 수 있겠냐? 네놈이라면?”

“…….”

“지금 네 꼴을 봐라. 거의 반 협박에 가깝게 부탁하고 구걸하고 있지 않느냐? 너 같은 놈이 전 세계에서 수천, 수만 명이 매일같이 몰려들어서 닦달을 할 텐데, 그걸 이 세상에서 누가 감당할 수 있겠냐?”

“……기적이 있다는 거냐?”

“없다. 있어도 인정하지 않을 거다.”

그 둘은 본질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창용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침묵은 과연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는지.

“한서진이가 2년 전에 진성전자에서 반도체 화학물질 만지다가 암 걸려서 죽을 뻔한 건 알고 있냐? 산업재해 소송 걸지 말라고 반쯤 협박 받고 회사에서 조용히 나간 것은?”

“…….”

“애초에 넌 구걸할 자격조차 없다. 한서진이가 지금도 많이 참아주고 있는 거다. 더 이상 한서진이 자극하면 그때는 내가 안 참는다. 네가 평생을 바친 그룹이 산산조각 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겠지?”

이창용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백철중은 등을 돌렸다. 쏘아붙이면서도 내내 마음이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 역시 이기적인 건 마찬가지지.’

그렇게 씁쓸한 마음을 머금은 채 발을 떼는데, 문득 힘없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백철중이. 기적…… 그런 건 정말 없는 거냐?”

“없다.”

백철중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냉랭하게 덧붙였다.

“있어도 없는 거다. 무슨 뜻인지, 네놈도 잘 알고 있을 것 아니냐?”

“…….”

“경영에서 손 완전히 떼고 요양이나 잘해라. 그럼 십 년 이십 년 살지도 모르지.”

백철중은 그대로 병실을 나섰다.

며칠 후.

이창용이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는 보도가 경제신문을 뒤덮었다. 건강상의 문제로 은퇴를 선언한 이창용은 요양을 위해 제주도로 내려갔다.

============================ 작품 후기 ============================

미안.. 제주도.

여기밖에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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