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4 보복성 인수합병 =========================================================================
“구성 물질을 조사한 결과, 박 차장이 빼돌린 원재료와 모두 일치합니다. 화학 구조식도 알아냈습니다.”
진성제약은 온힘을 다해 미완의 엘릭서를 분석하는데 매달렸다. 그 덕분에 미지에 숨어 있던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성분 배합, 제조 방법, 그리고 화학 구조식까지.
“인체에 유해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특별히 유익한 작용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분조사와 동물실험 등 다양한 방향에 걸쳐 화학구조물의 분석 작업이 이뤄졌다.
인체 실험은 하지 못했지만, 할 필요조차 없이 윤곽이 뚜렷했다.
“이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질입니다.”
최고의 연구원들이라는 자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분 분석을 지시했던 김성일 기조실장은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이건 치료제도, 뭐도 아닙니다. 그냥 아무 작용도 하지 않는 물질입니다. 뭐, 과다복용하면 혈관에 이상 작용을 일으킬 가능성은 조금 있군요.”
“어떤 종류의 치료제일 가능성은?”
아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서슬 퍼런 권력의 기조실장이 아니었으면 수석연구원은 코웃음이라도 쳤을 것이다.
“치료제라니요,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일말의 가능성조차 끊어졌다.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한서진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질을 대답이랍시고 던지고 간 것이다. 김성일은 불쾌한 마음을 억누르고, 이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했다.
감히 진성그룹 회장에게 이딴 걸 대답이랍시고 던지다니, 측근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돈 좀 쥐었다고 눈에 뵈는 게 없어.’
상심한 이창용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김성일이 성분 지시를 하겠다는 말에 이창용은 힘없이 승인해주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대체 그때 병실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던 것일까.
회장님을 위해서 뭐든 해야 할 텐데.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실장님.”
“무슨 일이야?”
조심스럽게 다가온 기조실 부하의 부름에 그는 퉁명스럽게 반응했다가 흠칫 했다. 부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진성제약과 진성메디컬을 포함해, 의료산업 관련 계열사들의 주가가 동시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중에 물량이 씨가 말랐습니다. 누군가가 집중적으로 사들이고 있는 듯합니다.”
“의료 계열사들이?”
이건 또 무슨 일인가. 기조실장은 어이가 없어서 잠시 멍해 있다가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조사 착수해. 누가 사들이고 있는지, 그 목적이 뭔지, 그리고 얼마나 사들였는지 그 대략적인 추정치도 알아 봐.”
“알겠습니다.”
부하 직원이 나갔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김성일은 벌떡 일어나서 사무실을 서성거렸다.
단기 투자를 위한 치고 빠지기, 혹은 적대적 인수합병. 아니면 주가장난.
어느 쪽이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김성일이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왜 진성제약이지?’
국내에는 진성그룹을 상대로 그런 수작을 부릴 간 큰 투자자가 없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진성제약이란 말인가.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진성제약 외에도 메디컬 등 4개 계열사 주식을 동시에 모으고 있습니다. 그 넷을 동시에 쥐어야 장기적인 운용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늘 말하지만 돈은 걱정하지 마세요.”
5nm공정기술로 쌓이는 특허 로열티만 해도, 그 정도 자금은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는다.
박현준은 밤낮으로 진성제약 합병 문제에 매달렸다.
진성제약만 합병한다고 끝이 아니라, 관련 계열사도 함께 집어삼켜야 원활하게 운용할 수 있다.
박현준은 11%의 지분을 확보한 뒤 인수 합병을 선언하고 공개적으로 주식 모집을 시작했다.
진성그룹 측은 다급히 주식을 모집하며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수천억의 실탄을 퍼붓는 박현준의 공세를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박현준은 진성제약의 지분 51%를 확보했다. 뿐만 아니라 관련 계열사의 지분도 40% 이상씩 사들였다.
이에 다급해진 것은 이서나였다. 갓 회장에 취임한 그녀로서는 앉은 자리에서 날벼락을 맞은 것이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죠? 누가 대체 진성제약 관련주를 사 모으는 겁니까?”
“한서진 대표입니다.”
비서실장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이서나는 충격에 빠졌다.
“한 대표가 왜 진성제약을?”
백철중과 함께 자신을 진성그룹의 회장으로 밀어준 인물. 그의 중재가 없었으면 자신은 결코 회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충분히 끈끈한 동맹 사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역공을 맞을 줄이야. 그녀는 당황했지만, 침착히 대응했다.
“한 대표와 내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닌데, 말도 없이 이럴 리가 없어요. 분명히 뭔가 있을 거예요. 자세히 알아봐요.”
“알겠습니다.”
“특히 이용무 부회장 위주로.”
이서나의 우려가 깃든 말이었고, 비서실장도 바로 이해했다.
총력을 기울인 내사 결과 대략적인 윤곽이 나왔다. 보고를 들은 이서나는 분노로 가볍게 떨었다.
“그러니까 김성일 기조실장이 나한테 보고 없이 멋대로 한 대표의 뒷조사를 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이용무 부회장이 시킨 짓입니까?”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다만 회장님께서 아무래도 이 일에 관련되어 있으신 듯합니다.”
이서나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언급한 회장, 자신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었다. 그룹에서 자신을 제외하고 회장이란 말을 들을 수 있는 건 한 명뿐이다.
“아버지가 한 대표 뒷조사를 왜?”
이서나는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자신의 회장직을 위협할 수도 있는 큰일임을 알았다.
그녀는 곧바로 한서진에게 연락했다. 더 이상 사정만 알아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한 대표, 나 이서나예요.”
「네, 회장님.」
“진성제약 관련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지금 어디에 있나요? 내가 찾아갈게요.”
다급한 그녀는 본론부터 말했다. 일단 한서진의 진의를 알아야 대책을 세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저 지금 진성제약입니다.」
“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랜만에 찾은 진성제약.
이게 얼마만이던가. 본사 로비에 발을 내딛는 느낌이 제법 상쾌했다.
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보잘것없는 생산기술직이었다. 그것도 죽음을 앞두고, 지푸라기라도 잡기 위해 발버둥 치던.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모든 것이 다르다. 돈, 명예, 신분, 무엇보다 마음가짐까지.
로비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박현준 외에 여섯 명의 경호원을 당당히 거느린 모습은 평범한 방문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일행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프론트 직원들은 기가 죽어서 선뜻 나서지 못했다.
한서진은 프론트에 서서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사장님 좀 뵐 수 있을까요?”
“사, 사장님이요? 무슨 일이신지…….”
“대주주가 왔다고 전해줘요. 한서진이라고.”
여직원은 잠시 현실성 없는 얼굴로 멍하니 바라보다가 뭔가 깨달은 게 있는지 퍼뜩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급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고, 한서진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잠시 후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남자와 함께 몇 명의 사람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사장과 임원들이었다.
“진성제약 사장님이신가요?”
“예, 그렇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사장은 숨을 헐떡이며 겨우 인사했다.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숙여졌다.
‘회장님이라니. 영 어색하네.’
오너 일가가 아니라 단순한 월급 사장인 모양이다. 몸에 밴 태도에서 느껴진다.
한서진은 무심히 그를 보다가 임원들에게 눈을 돌렸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임원들이 흠칫흠칫 놀란다. 다들 사장처럼 월급쟁이 경영진인 모양이다.
이야기가 쉬워질 것 같다.
“남들 보기에 좋지 않으니, 저기로 가시죠.”
한서진은 로비 한쪽에 있는 휴식처를 가리켰다. 공공 휴식처라 경영진은 부담감이 굴뚝같았지만, 여섯 명의 경호원을 거느린 그의 말에 감히 토를 달 수 없었다.
마치 회장님을 연상케 하는 숨 막히는 기도. 그들은 얌전히 한서진을 따라 휴식처로 향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 섞인 시선이 쏟아진다. 경영진은 안절부절 못했다. 여기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든 그것이 퍼져 나가는 것은 순식간이다.
‘혹시 그걸 노리고 일부러 여기서?’
그런 생각이 들자 사장은 더욱 손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51%의 지분을 확보했으면 이미 회사의 주인이나 마찬가지인데. 주식회사 체계에서 과반의 지분은 무소불위의 권력이다.
한서진은 자리에 앉은 채 입을 다물었고, 박현준이 그를 대신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아시겠지만 여기 한 대표님께서는 막 진성제약 지분의 51%를 확보했습니다. 진성메디컬 등 사업 연관성 있는 다른 계열사도 40%에 근접하게 지분을 확보한 상태입니다.”
임원들도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그래서 지금 그룹에 비상이 켜지지 않았던가.
“이 정도면 충분히 이해하시겠지요. 대표님께서는 진성그룹의 제약 관련 사업을 강제 인수하려고 합니다.”
명백한 적대적 합병 선언. 사장은 식은땀을 감추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구상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일단은 주주총회를 열어 기존 경영진을 모두 해임하려고 합니다. 오너 일가의 입김이 닿는 인물들은 안고 가지 않겠다는 이야기지요. 그렇지 않으면 대표님 뜻대로 회사를 움직이기 어려우니까요.”
“…….”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이야기에 임원들은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가는 건 시간도 걸리고, 절차도 좀 번거롭습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는데, 여러분들이 자진사퇴를 해주실 수는 없습니까?”
“네?”
“어차피 경영진 교체는 예정된 작업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협조를 해주시면 번거로운 절차를 줄일 수 있습니다. 대표님은 그런 부탁을 드리러 오신 겁니다.”
말을 내뱉으며, 박현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짜릿함을 느꼈다. 쫓겨난 회사에 점령군으로 돌아와 숙청의 칼을 휘두른다는 게, 이렇게도 기분 좋을 줄이야.
특히 자신을 알아본 임원들이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즐거웠다.
한편 경영진은 크게 당황했다. 그냥 임시주총을 열어서 해임을 하면 그만이지, 굳이 찾아와서 부탁을 하다니?
어느 임원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만약 우리가 버틴다면 어떻게 됩니까?”
“버티실 생각이십니까?”
“우리는 우리만의 뜻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룹과 회장님의 뜻을 받들어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겁니다. 한 회장님이 비록 51%의 대주주이긴 하나, 임시주총도 거치지 않은 말 한 마디에 대뜸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정식으로 해임 수순을 밟으라는 겁니까?”
“우리들의 입장도 있다는 점을 이해해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임원은 조금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룹이나 회장의 지시 없이 한서진의 경고 한 마디에 경영진이 모두 그만둔다면 어떻게 될까. 단단히 질책을 받을 것이다.
박현준은 흔들리지 않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뭔가 오해를 하시는 모양인데……. 진성그룹의 제약산업을 강제 인수하는 것은 사업 영리적인 목적보다는 보복의 성질이 훨씬 큽니다.”
“보, 보복이요?”
“대표님은 여러분들께 탈출의 기회를 마련해드리는 겁니다. 아니면, 공룡의 싸움에 낀 개미 신세가 되고 싶으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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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역은 지옥헬, 지옥헬 역입니다. 안 내릴 꺼유?”
“내, 내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