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93화 (193/609)

00193  보복성 인수합병  =========================================================================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틀 후 아침, 최수한이 굳은 얼굴로 말문을 꺼냈다.

한서진에게는 의외였다. 최수한은 그림자처럼 시중을 들고 저택을 관리해왔다.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무슨 일이시죠?”

“누군가 대표님의 과거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제 과거를 캐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요.”

한서진은 의연하게 반응했다.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데, 한두 명이 뒤를 캔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아니다.

“진성그룹 측에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진성그룹이요?”

한서진의 얼굴이 곧바로 차가워졌다.

초췌한 이창용의 안색을 떠올린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만약 내 믿음이 틀리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룹을 주지 않으시면 됩니다. 어렵지 않죠.’

‘그렇게 하리다.’

엘릭서를 줄 마음은 없지만, 일단 얌전하게 만들어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수작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이건 이창용의 뜻인가, 아니면 다른 이의 단독인가.

“구체적으로는 대표님과 H그룹 간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파고드는 것 같습니다.”

“저와 H그룹을요?”

“송하나 양의 학교까지 찾아갔던 모양입니다. 물론 위해를 가하거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닙니다만.”

송하나. 그 이름이 나오자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었다.

지금 감히 누구를 뒷조사해?

“정확히 누가 조사하는지, 어디까지 조사했는지, 그리고 조사 목적이 뭔지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무리한 요구인 건 알지만, 한서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물어보았다. 최수한은 의외로 담담했다.

“알겠습니다. 자세히 알아보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최수한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서진은 불현듯 궁금증이 들었다. 최수한은 대체 전에 뭐 하던 사람이었을까. 가만히 보면 못하는 게 없는 팔방미인이다.

‘저런 능력을 가지고 왜 집사 같은 걸 하는 거지?’

세계적인 부호인 크렘 회장이 소개해준 인물이니 남다른 것은 인정하지만, 이건 지나친 재능 낭비 아닌가?

조사 결과는 제법 빨리 나왔다.

“진성그룹 기획조정실장 김성일이라는 자의 주도로 조사 작업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김성일이라는 이름에 한서진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다만 궁금했다. 그의 단독 결정인지, 누군가의 지시가 있는지.

“정황을 보면 이용무 부회장이 아닌 이창용 회장의 지시를 받은 듯합니다.”

“이창용 회장이요?”

“예, 지금 기조실장은 이창용 회장의 옆에 거의 붙어 있습니다.”

한서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창용은 자신을 믿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인내심이 그 정도였던 것일까.

새삼 놀랍지는 않았다.

늙은 재벌이 삶을 연장하고자 하는 탐욕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보았으니.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감히 송하나와 자신의 관계를 캐다니. 남자라면 누구나 이 상황에서 끓어오를 것이다.

‘역시 엘릭서는 이창용 회장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거래를 할 마음은 없지만, 이 상황은 입맛을 더욱 더럽게 만든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최수한이 덤덤히 묻자 한서진은 눈을 떴다.

“아니, 됐습니다.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백철중 회장은 과연 이 일을 알까. 최수한이 알아낼 정도면 그도 알고 있지 않을까?

한서진은 백철중에게 연락을 했다.

「우리 하나? 별일 없지. 공부도 잘 하고, 왜 무슨 일인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직 백철중은 모르는 눈치였다. 한서진은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통화를 끝냈다.

최수한이 설명했다.

“기조실장이 대표님을 중심으로 조사 중이라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겁니다. 송하나양 쪽은 아직 모를 수 있습니다. 진성그룹도 그쪽은 조심스럽게 알아보는 중이니까요.”

“그래도 용케 알아차리셨네요.”

“박 실장이 대단하지요. PMC에서 오래 구른 친구라서 감이 무척 좋습니다.”

박 실장이 H그룹의 경호원 여럿을 혼자서 제압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한서진은 수긍했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건 명백히 자신을 우습게 본 행위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는 법이니.

‘추해.’

경제 발전의 산증인이라고 불리던, 모든 것을 다 가진 삶을 누린 이창용. 그런 인물이 조금 더 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은 절박하다기보다는 추하게 느껴졌다. 아무런 동정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한 경고가 필요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넘어갈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어떡하면 가장 효과적인 경고일까.

최수한이 물러간 줄도 모른 채, 한서진은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대표님, 박현준 팀장이 찾아왔습니다.”

“아, 들어오라 하세요.”

“예.”

잠시 후 최수한은 박현준을 안내해서 1층 로비에 들어왔다.

본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던 박현준은 신기한 듯 주변을 살피다가, 얼른 시선을 똑바로 했다.

그는 한서진에게 정중히 목례했다.

“인사드립니다, 대표님.”

“아, 어서 오세요. 일단 앉으시죠.”

“예.”

박현준은 살짝 옆으로 조심스럽게 앉으며,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올렸다.

“전에 지시하신 것에 관해서 보고 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습니다.”

“짧게 설명 부탁합니다. 지금 머리를 아프게 하는 고민이 하나 있어서요.”

박현준은 긴장감이 도는지 마른침을 삼키고는 말을 꺼냈다.

“저는 진성제약을 인수했으면 합니다.”

“……!”

진성제약 인수. 그 말을 듣는 순간 짧은 번개가 머리를 쳤다.

박현준이 계속 설명했다.

“진성제약의 시가총액은 1,800억 원입니다. 인수합병을 선언하고 주식을 끌어 모으면 프리미엄을 감안해도 2,000억 이하에서 과반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계속하세요. 자세히.”

한서진이 흥미를 보이자 박현준도 신이 나서 더욱 열의를 띠고 설명했다.

“진성제약은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설비와 인력을 갖추고 있죠. 대표님의 뜻에 맞는 최고의 조건입니다. 그리고 저는 진성제약에서 십 년을 넘게 일했습니다. 다른 이의 손을 타지 않고 제가 직접 대표님의 지시를 수월히 이행할 수 있습니다.”

조리 있는 설명이었다. 한서진이 듣기에도 납득이 갔다.

엘릭서의 기본 재료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에, 그것 이상으로 좋은 방법은 찾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한서진은 바로 수긍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박 팀장님은 진성제약 출신이시죠. 저번에 이창용 회장의 호출을 받은 것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박현준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중요한 질문이었다.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한서진이 자신에게 가지는 신뢰가 달라질 것이다.

“제가 이창용 회장, 그리고 진성제약에서 작은 모욕을 당한 것은 사실이고, 그것을 의식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저도 사람이다 보니 그 부분에 관련해서 전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더군요.”

“…….”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저는 진성제약 인수가 대표님의 지시를 안전하고 확실하게 이행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직장생활의 평생을 진성제약에 바친 사람입니다. 진성제약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솔직함이 느껴지는 태도에 한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박현준은 화색을 띠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단, 과반만 인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

“끝장을 보지요. 주식 전량 인수해서 상장 폐지하고 1인 주주 체제로 갑시다. 어차피 약 장사 하려고 인수하는 게 아니니까. 아예 대형 의약 연구소처럼 만들어버려도 좋습니다.”

박현준은 감동했다.

아, 이 사람은 어찌 이리 스케일이 크단 말인가. 자신이 그린 밑그림보다 훨씬 큰 스케치에 그는 가슴이 벅찼다.

“알겠습니다. 대표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연간 오천억 원이라고 상한선을 잡았지만, 진성제약을 100% 가져오기 위해서는 초과해도 좋습니다.”

한서진은 이창용을 떠올리며, 차갑게 덧붙였다.

“단, 확실하게 뺏어 와야 합니다.”

기조실장은 조심스럽게 보고하고 있었다.

“단순히 재직 시절 백철중 회장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큰 게 전부는 아닙니다. 백철중 회장님의 막내딸, 송하나양과 깊은 사이로 보입니다.”

“하나가 벌써 그리 컸나?”

마지막으로 본 게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던가. 이창용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올해 열아홉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고, 한국대 반도체공학부에 수시로 붙었습니다. 아마 한 대표를 따라 진로를 정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요즘은 어떤가? 이쁜가?”

“여기 사진이 있습니다.”

기조실장은 다양하게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이창용은 대강 사진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짤막한 소감을 밝혔다.

“참 예쁘게 컸군. 충분히 납득이 가네.”

객관적으로도 빼어난 미인으로 성장했다. 게다가 백철중은 H그룹을 송하나한테 물려준다지.

재계 2위 대기업의 회장이 확정된 미인 후계자. 한서진 같은 남자가 마음을 뺏기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철중이와 한 대표, 둘 사이가 참으로 돈독하겠어. 함부로 끼어들었다가는 오히려 일을 망칠 게야.”

“정식으로 약혼하지는 않았지만, 주변에서는 조만간 발표를 하지 않을까 지켜보는 중이라 합니다.”

“H통신도 한 대표가 제공한 기술이 핵심이라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백철중 회장은 아마도 송하나 양을 통해 한 대표에게 그룹을 맡길 생각인 것 같습니다.”

“늦둥이 막내딸이 없는 게 이런 패배를 낳는군.”

이창용은 덤덤히 말했다.

구체적인 윤곽이 나왔다. 쓰러진 백철중을 도운 게 만약 사실이라면, 그것은 영리를 위한 거래가 아니라 진솔한 애정에 기반한다는 사실이.

“이거…… 어쩌면 나는 힘들 수도 있겠어.”

자조하는 듯한 중얼거림에 기조실장은 조금 당황했다. 설마 일이 꼬이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는 무례인 걸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회장님. 무슨 말씀이신지…….”

“회장님, 한서진 대표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비서실장이 들어서며 알렸다. 기조실장은 흠칫해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창용은 굳은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들어오시라 하게.”

“예, 알겠습니다.”

잠시 후 한서진이 안내를 받아 들어왔다.

며칠 만에 금세 다시 찾아왔다는 것, 좋은 조짐이 아니다. 이창용의 안색이 더욱 딱딱해졌다.

차분히 기조실장을 둘러보던 한서진이 다시 이창용에게 시선을 돌렸다.

“모두 나가라 하시는 게 회장님 체신에 낫지 않을까요.”

“……모두 나가 있게.”

기조실장과 비서실장이 급히 목례하고 나갔다.

병실에 둘만 남자, 한서진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하나와 저의 관계를 조사하셨더군요. 심지어 기조실 직원이 하나 학교까지 찾아갔고 말입니다.”

이창용은 흠칫했다. 기조실장은 분명히 은밀히 움직였다 했는데, 어떻게 그걸 알았단 말인가?

“한 대표, 뭔가 잘못된.”

“저는 거래를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걸 망친 건 회장님이십니다.”

그는 품에서 손가락 크기만 한 투명한 병을 꺼내, 병실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것이 그에 대한 대답이자, 경고입니다. 앞으로 이 거래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없습니다.”

“한 대표.”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한서진은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이창용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가 남긴 투명한 병을 바라보았다. 저것이 자신이 간절히 원하던 것이 아님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미완의 엘릭서. 왕의 피가 없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질.

그것은 경고이자, 조롱이었다.

============================ 작품 후기 ============================

“아, 이 사람은 어찌 이리 스케일이 크단 말인가…….”

?1 : 풉.

?2 : 풉.

?3 : 푸웁!

?4 : .....피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