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2 욕심과 탐욕 사이 =========================================================================
처음 대면한 진성제국의 주인은 낯선 느낌이었다.
백철중과 비슷하면서 다르다. 그는 위엄이 넘치지만, 동시에 인간다운 소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값이 싼 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창용은 절대로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는 소주를 마신다는 행위 자체를 경멸하지 않을까.
철저히 구름 위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재벌 총수.
그것이 이창용을 처음 대면한 한서진의 느낌이었다.
가만히 주시하던 이창용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조실장, 자네는 나가 있게.”
“예, 회장님.”
회장의 지시에 감히 어떻게 반발할까. 김성일은 공손히 목례를 올리고 나갔다.
병실에 둘만 남자 이창용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어조가 조금 변했다.
“처음에는 바보스러운 망상이라 생각했소. 내 아들이 정신이 나간 거라 생각했지.”
덤덤한 음색이지만, 눈빛 깊은 곳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참을 수가 없더군. 혹시 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소. 그래서 자세히 알아봤지.”
“회장님의 결론은 무엇인가요?”
“두 번은 우연일 수 있지만, 세 번 네 번 이상으로 거듭되는 건 인과관계라는 거요.”
이창용은 잔잔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한 대표가 말기 암을 극복한 것, 여기까진 기적이오. 그러나 한 대표가 박 차장에게 화합물 제조를 의뢰한 것, 그리고 그에게 수십억의 대가를 지불한 것부터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오?”
“…….”
“그 밖에도 중첩되는 인과관계가 많소. 결정적인 건 철중이에게 기적이 일어났다는 거지. 한 대표에게 그랬던 것처럼.”
“정황이 그러할 뿐, 결국 증거는 없습니다.”
“증거란 결국 결과를 납득할 수 있게 하는 힘이오. 반드시 형체가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지.”
이창용의 어조가 다시 한 번 변했다.
꿈틀거리는 욕심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를 감싼 채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것이 보인다. 그의 시선이 닿는 피부마다 간지러운 느낌이 든다.
“저에게 기적의 신약이라도 있다고 믿으시는 겁니까?”
갑작스럽게 찔러온 일침. 그러나 이창용은 당황하지 않고, 역으로 찔러 들어왔다.
“그게 한 대표가 지닌 비밀이오?”
“저를 조사해보셨으면 아실 텐데요. 저는 제약이라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불세출의 천재인 것은 사실이지. 진흙에 묻혀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을 뿐.”
“진성전자를 진흙이라 하시는 건가요.”
순간적으로 이창용의 눈빛이 흔들렸다.
노회한 기업가이지만, 그룹의 기둥이자 전부나 마찬가지인 진성전자를 걸고 넘어지는 것은 참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러나 동요는 길지 않았다. 이창용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표정을 되찾았다.
“소모적인 논쟁은 싫소.”
“논쟁을 하고자 했다면 애초에 찾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물론 그럴 거라 생각하오. 한 대표가 찾아올 줄은 전혀 몰랐지만, 오히려 이 자리가 만들어진 것에 감사하고 있소.”
이창용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한 대표와 그저 거래를 하고 싶소.”
강한 확신이 담긴 미소. 그리고 지금까지의 발언.
더 생각할 것도 없다. 이창용은 지금 기적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었다.
부정할까, 부인할까. 한서진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미 이곳에 올 때부터 큰 방향은 정해두고 왔다. 그대로 키를 쥐기만 하면 될 뿐이다.
“그룹을 주십시오. 그럼 고려해보겠습니다.”
“한 대표. 그건 너무 과하지 않소?”
예상했던 것일까, 아니면 어처구니가 없어서일까. 이창용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조용히 반문했다.
“그렇다면 거래는 없는 겁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거시는구려. 그룹은 내 전부나 마찬가지인 회사요.”
“그건 제 사정이 아니지요. 기적의 가치는 진성그룹보다 값싸지 않다, 이것이 제 사정입니다.”
“…….”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2년 전 췌장암에 걸려 죽을 뻔했습니다. 진성전자 반도체 라인에서 온갖 화학물질을 접한 게 원인이지요.”
이창용은 서늘한 눈으로, 한서진을 잠자코 주시했다.
“그런 제가 이 자리에 먼저 나온 것만으로도, 대단히 큰 양보라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아시겠지만 저는 이제 돈이 부족할 게 없는 입장입니다. 애초에 물질적인 욕심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니고요. 제가 제일 중요시하는 건 반도체 연구, 오직 그거 하나뿐입니다.”
이창용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주변에서 넘실거리던 욕심의 기운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욕심의 기운은 숨길 수 없는 탐욕의 색깔로 변질돼 있었다.
“나는 많이 쇠약해졌소.”
“…….”
“가장 큰 문제는 심장이지만, 노회한 육신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있소. 주치의는 내가 5년을 넘기기 힘들 수도 있다고 예상하더군.”
“…….”
“그 기적, 믿어도 되겠소?”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먼저 기적의 존재를 확신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약한 모습이란 말인가.
아니, 어쩌면 저건 약한 모습이 아니라 교묘한 협상술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서진은 느슨해지려는 마음을 바짝 다잡았다.
“저는 기적을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회장님께서 단독으로 판단하신 것이지요.”
“이상하군. 아까는 기적이 진성전자보다 값싸지 않다고 하지 않았소?”
“기어이 거래를 하고 싶어 하시는 회장님의 생각에 어울려드린 것이지,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회장님이 그룹 전체를 걸고 도박을 하시겠다면 룰렛을 돌리겠습니다. 그게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입니다.”
이창용의 눈빛에 떠오른 탐욕이 점점 짙어진다.
삶에 대한 탐욕. 그것은 너무나 농도가 높아 오히려 순수한 열정으로 착각될 정도였다. 불같은 사랑에 몸을 던지는 젊은이도 저보다 뜨거운 눈빛을 가지진 못하리라.
“만약 내 믿음이 틀리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룹을 주지 않으시면 됩니다. 어렵지 않죠.”
한서진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간단히 대답했다.
이창용은 눈을 몇 번이고 감았다가 다시 떴다. 재벌 오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초조한 고뇌가 담긴 표정이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서 번뇌가 완전히 지워졌다.
처음처럼 말끔해진 표정으로, 그는 덤덤히 약속했다.
“그렇게 하리다.”
한서진이 돌아갔다.
이창용은 그가 나간 뒤에도 언제까지나 문 쪽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서진이라…….’
진흙에 가려진 보석 수준이 아니다. 진흙 속에 잠겨 있던 용의 알이었다. 그 알이 껍데기를 깨고 부화해 높이 승천한 것이다.
문득 욕심이 일었다. 만약 그가 자신의 핏줄이라면?
“더 바랄 게 없겠지.”
그룹을 놓고 다투는 두 자녀를 떠올리며, 그는 무거운 한숨을 뱉었다.
경영 능력만 보면 이서나가 뛰어나다. 그러나 한국, 특히 재계는 남자가 지배하는 사회다. 이서나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결국 그 유리천장에 부딪치게 된다.
당장 20대 기업 총수 중에 여자는 없다. 이서나가 이용무 이상으로 그들과 친밀하게 어울릴 수 있을까? 아무리 진성이 재계 1위라도 독불장군은 아니었다.
만약 이용무나 이서나 대신 한서진을 그 자리에 끼워 넣으면 어떨까. 자신의 상상을 넘어서는 완벽한 진성그룹으로 거듭나게 된다.
“회장님.”
김성일 기조실장이 들어와서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상념을 접은 이창용은 차갑게 말했다.
“아까 내 지시, 잊지 않았겠지?”
“예, 물론입니다.”
“즉시 시행하게.”
김성일은 목례를 하고 나간 뒤, 혼자 남은 이창용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한서진은 백철중에게 기꺼이 기적을 베풀었다. 기조실장과 아들은 H반도체 재직 시절의 은혜 때문이라 했지만, 이창용은 그런 시시한 이유가 아니라고 믿었다.
분명 놓치고 있는 뭔가가 있으리라. 그 연결고리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내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겠지.”
진성의료원을 나온 뒤 한서진은 백철중을 찾았다. 그리고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이창용 회장을 만났습니다.”
“뭐? 설마 이창용이 그 친구가 기어이 자네한테까지 찾아간 건가?”
처음 백철중은 놀라더니, 곧 분개한 감정을 드러냈다. 휠체어까지 타고 와서 자신을 귀찮게 하더니,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단 말인가.
한서진은 쓴웃음을 짓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찾아간 겁니다.”
“……자네가? 왜?”
그 말에 더욱 어이없어하던 백철중은 설마 하고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혹시 자네…… 엘릭서를 팔 생각인가?”
“뭐, 일단 그룹 전체를 주면 팔 수도 있다고 넌지시 암시를 하긴 했습니다. 물론 엘릭서의 존재를 긍정한 건 아닙니다.”
“비밀을 아는 자를 늘리는 것은 자네에게 결코 좋지 않네. 특히 이창용이처럼 욕심 많고 끈질긴 놈은 안 돼.”
백철중 회장의 눈빛에는 진심 어린 우려가 담겨 있었다.
“저도 압니다.”
“알면서 왜 그랬나?”
“보고 싶었거든요.”
“……?”
“평생을 세상 위에 군림했고, 가지지 못한 게 없고, 이제는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 건강, 삶에 가지는 집착이 어떤 건지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네도 병으로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고 했지.”
“저와는 많이 다르더군요.”
한서진의 어조에는 살짝 냉랭함이 묻어났다.
“절박함이나 간절함 같은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별로 안 보이더군요. 그저 집착만이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살고자 하는 것보다는 지금의 권세를 더 연장하고자 하는 것처럼 여겨지더군요. 솔직히 저에게는 매우 불편한 감정이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과연 그 둘이 본질적으로 다른지는, 백철중은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앞으로 어떡할 건가?”
“그래도 이창용 회장님을 직접 만난 보람이 있었습니다. 큰 수확이었죠.”
“어떤?”
“늙고 병든 부자에게 엘릭서가 어떤 의미인지 두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까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다. 막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만 하는 것과, 그 실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 그 생동감의 차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동안은 진성그룹을 통째로 주겠다면 거래를 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백철중은 차분한 눈으로 주시했다. 한서진은 문득 그는 이미 대답을 알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엘릭서는 매매의 거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가.”
“애초에 돈 같은, 물질적 이익의 반대편 저울접시에 올리면 안 되는 물건이었습니다.”
돈으로 매매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런 지위로 전락시켜서도 안 된다.
백철중과 이창용, 두 대조적인 인연을 통해 한서진은 그것을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럼 엘릭서의 반대편 접시에는 뭘 올려야 하나?”
“믿음이죠.”
거기서 대답이 끊어졌다면 백철중은 조금 실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서진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정말 믿고 함께 할 수 있는 자들에게만 제공해야 할…… 그런 전략 무기로 써야합니다. 그걸 깨달았습니다.”
비로소 백철중은 웃음을 지었다.
“축하하네. 한 걸음 더 성장했군.”
돈으로 거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정말로 ‘믿어야 하는’ 혈맹만을 위한 무기다.
안타깝지만, 이창용은 그런 동맹 대상은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엘릭서를 주고 진성그룹을 처묵하는 전개로 갑시다. 그거 어차피 얼마 안 하잖슴.”
저는 분명히 이렇게 촬영장에 지시를 내렸는데...
배우가 갑자기 애드립을 하고...
작가가 거기에 맞춰서 대본을 수정하고...
촬영 감독이 제멋대로 편집을 하고 이어붙이고..
결과물이랍시고 가져온 게 이거네요.
실탄프로덕션이 영세하다고 배우와 감독, 촬영진한테까지 매번 무시당합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