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1 욕심과 탐욕 사이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한서진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통화 상대는 박현준이었다. 그는 이창용 회장을 만나게 된 과정을 소상히 밝혔다. 짧은 견해까지 곁들여서.
「이창용 회장은 그 셋에 묘한 집착을 가진 것 같습니다.」
셋. 한서진이 의뢰한 세 가지 화합물을 돌려서 가리키는 말.
박현준도 세 화합물에 특별한 비밀이 있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구체적인 효능은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그는 한서진의 췌장암 이력을 모르니까.
“제가 알아서 하지요. 박 팀장님은 전에 부탁드린 일에만 집중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한서진은 의자에 등을 깊이 묻었다. 그제야 참았던 한숨이 새어 나온다.
‘이창용 회장…….’
틀림없다. 이용무가 언질을 준 것이리라.
이창용은 과연 아들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어디까지 생각이 닿아 있을까.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
이창용은 일생의 전부를 가진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은 그가 맨손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진성을 일군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가 초기 진성을 물려받을 때 이미 진성은 중견그룹 이상이었다.
재계 1위의 글로벌 대그룹을 일군 공은 어마어마하지만, 맨땅부터 시작한 것은 아니란 뜻이다.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왔고, 이 나라를 음으로 양으로 지배하며 좌지우지했다.
재계의 맏이이자 한국 경제의 신화로서, 아무리 진성을 싫어하는 인물들도 그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꺼려한다.
‘돈만 있는 나하곤 달라.’
모든 것에서 자신과 대조적인 인물이다.
나이도, 환경도, 인맥도, 그 밖의 모든 것이.
그러나 통찰안을 제외하더라도, 딱 두 가지에서 자신은 압도적으로 그를 능가한다.
바로 젊음, 그리고 미래.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부자의 마음은 어떨까.’
한서진은 문득 그것이 궁금했다. 그리고 이창용에게 자신을 대입해보았다.
만약 자신이 지금의 이창용이고, 엘릭서가 눈앞에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전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가지고 싶겠지.’
보통 사람이 막연히 할 수 있는 상상은 고작 이 정도이리라. 누구라도 떠올릴 수 있는 그런 것.
어차피 죽으면서 돈을 싸갈 것도 아닌데,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만 있다면 그깟 돈이 무슨 대수일까.
목숨과 돈, 그 등가교환성.
췌장암으로 시한부 선고까지 받았던 한서진은 누구보다 그 비율을 잘 알고 있었다.
돈은 아무리 많아도 목숨에 비견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이창용 회장도 그때의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할까?’
살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도 좋다. 가난한 청년은 그런 절박함으로 기도했었다.
모든 것을 누린 늙은 재벌이 가지는 삶의 집착도, 과연 그와 비슷할 것인가.
알고 싶어졌다.
한서진은 한국대 반도체공학부 최고의 인기스타였다.
교수들도 인정한 천재적인 두뇌에, 기술 하나로 초대박을 터트려 큰 부자가 된 인물 아닌가.
500억 불, 질투가 생겨나려다가도 사그라질 듯한 숫자다. 숫자의 크기는 이해해도, 그게 어느 정도로 큰 가치인지는 감을 잡기 어려웠다.
“50조 원이니까 1년에 5,000억 원씩 써도 100년을 쓸 수 있는 거 아닌가?”
“진짜 한심하다. 어디 가서 한국대라고 말하지 마라. 이자는 생각 안 하냐?”
“이자라니, 너도 똑같아. 50조 원을 가지고 생각한다는 게 겨우 이자 놀이야?”
반도체공학부 학생들은 셋만 모였다 하면 한서진의 재산을 놓고 입씨름을 벌였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얼마만한 힘이 있는지, 마치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설정 싸움을 하듯이 열렬한 토론을 벌였다.
한서진이 봤다면 아마 기겁을 했을지도.
“근데 이자만 따져도 정말 어마어마하지 않아? 지금 금리 1.5%인데 50조 원이면 연간 이자만 7,500억 원이네.”
일 년에 5,000억만 써도 100년을 쓸 수 있다고 말했던 학생은 조용히 찌그러졌다. 일 년에 5,000억만 써도 2,500억씩 저축할 수 있는 금액이다. 일단 세금은 별도로 치고.
“어쨌든 투자 수익률 5%만 잡아도 일 년에 2조 5,000억 원이라는 거네.”
“야, 왜 로열티로 받는 건 생각 안 하냐? 5nm공정 기술, 그거 계약금 50억 불에 특허 수익 40%로 팔린 거 몰라?”
“아오, 말하다 보니까 너무 부러워서 돌아가시겠네.”
이공계는 취직은 잘 되지만, 제대로 된 대우는 받지 못한다.
아직까지 한국 기업은 개발자가 묘목을 심으면 경영자가 과실을 수확하는 시스템이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행여나 우수한 개발자가 따로 사비를 들여 과수원을 차리면, 경영자들은 괘씸하다고 합심해서 농사를 망친다.
일조를 가리거나, 독극물을 밭에 투입하거나, 아니면 물을 끊거나. 물론 비유적인 의미다.
그런 극악한 생태계를 뚫고, 한서진은 당당히 대성했다.
그냥저냥 큰 성공도 아니고, 재벌 회장도 우습게 볼 만한 재산을 갖추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청년 재벌이겠는가.
“너희, 서진이 형 여자친구 봤어?”
느닷없이 화제가 전환되었다.
노란 블라우스를 입은 여학생이 발끈했다.
“무슨 소리야? 서진이 오빠가 여자친구가 어디 있다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사업하느라 얼마나 바쁘신 분인데.”
“맞아, 맞아. 얘 되게 웃긴다.”
“어, 나도 봤어.”
“아, 그게 여자친구였구나. 하긴,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긴 했다.”
두어 명이 거들고 나서자 처음에 반발했던 여자애들은 그제야 이상함을 감지했다. 뭐야, 헛소리가 아니라 정말이야?
“여자친구가 있었어? 봤냐? 어떻디?”
“이쁘시더냐?”
처음 말을 꺼냈던 남학생은 아무 소리 없이 오른손을 내밀어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끝내주던데.”
“그, 그 정도야?”
“키 크고, 시원하게 늘씬하고, 얼굴이랑 몸매도 아주 그냥 죽여주더라. 난 무슨 신인 무명 연예인인 줄 알고 열심히 검색까지 해봤잖아.”
남학생의 가차 없는 호평에 여자애들의 얼굴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어둡게 변했다.
“말도 안 돼…….”
“이건 배신이야. 어떻게 우리 반공대 스타가 연애를…….”
“야, 서진이 형이 무슨 연예인이야? 여자도 만나고 연애도 할 수 있고 다 그런 거지.”
발 없는 말이 한 번 도약하면, 십만 리를 가는 법.
한서진이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문은 한국대는 물론이고, 주변 명문대에까지 일부 퍼졌다. 남몰래 연모를 불태우고 있던 수많은 동문 여학생들은 쓴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근데 그 여자친구, 우리 학교 학생이야?”
“일단 대학생처럼 보이긴 했어. 한 2, 3학년쯤? 내 생각엔 우리 학교 학생 아닌 거 같더라.”
“왜?”
“그 얼굴에 그 몸매에, 학교까지 한국대라면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
말도 안 되는 근거지만, 그렇게 납득하고 싶어졌다.
이거 뭔가 분한데?
이창용이 깨어난 직후 김성일 기조실장은 병실을 지켰다.
상시 회장의 곁을 지킨다는 것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김성일은 차라리 요즘이 편했다.
이창용이 본격적으로 마음만 먹으면, 이용무는 다시 후계 구도를 가져올 수 있다. 자신의 동아줄이 탄탄해지는 것이다.
‘그나저나 박현준이를 어떻게 구워삶아야 하는데.’
어떡하면 좀 더 회장님이 마음에 들어 할 일을 할 수 있을까.
김성일은 박현준을 떠올렸다.
그는 단순히 하수인에 지나지 않음은 이미 확인했다. 한서진의 부탁을 받고 회사 설비를 이용해서 어떤 화합물을 만들어준 것이리라.
‘박현준이를 족쳐서 정확히 어떤 화합물인지 구조식을 알아내야 하는데.’
하지만 회장님은 순순히 놓아주었다. 별다른 지시도 없었다.
그래서 김성일은 더 고민스러웠다. 어쩌면 불법에 발을 담그는 한이 있어도, 알아서 하라는 의중이 아닐까?
‘만약 아니라면 회장님 심기만 거스르는 건데.’
구체적으로 회장님이 박현준에게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아야 행동을 할 수 있는데, 직접 물어볼 수도 없으니 신중하게 움직일 수밖에.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비서실장이 나왔다.
“김 실장님,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알겠습니다.”
김성일은 벌떡 일어나서 병실로 들어왔다. 언질이 있었는지, 비서실장은 함께 들어오지 않았다.
VVIP 병실에는 이창용과 김성일, 둘뿐이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이창용이 문득 입을 열었다.
“자네가 용무, 그 아이를 섬기고 있던가?”
“네, 그렇습니다. 이용무 부회장님이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주었습니다. 언제나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룹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나?”
나지막하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다. 김성일은 드디어 올 게 왔다는 것을 느꼈다.
아마 떳떳한 지시는 아니리라.
그럼에도 김성일은 떨리거나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고대하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예, 부회장님과 회장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충심이 뚝뚝 흘러넘치는 목소리다. 김성일은 가슴을 열어 보일 수 없다는 점이 마냥 안타까웠다.
이창용은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한서진 대표, 그자에 관해서 조사하게.”
“알겠습니다.”
각오했던 것만큼 특별하지 않은, 포괄적인 지시다.
그러나 김성일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저 짧은 한 마디에 담긴 회장님의 무수한 의중을 읽어내야 한다.
다행히 이창용은 좀 더 세심하게 틀을 잡아주었다.
“한 대표가 백 회장과 어떤 사이인지, 어떤 인연이 있었으며 지금 둘이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런 인간관계적인 부분을 중점적으로 조사하게.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선을 넘으면 안 되네. 자네가 조사한다는 걸 한 대표가 알아차려서는 안 돼.”
“염려 마십시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좋아. 나가보게.”
김성일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십 개가 넘는 행동 방침이 떠올랐다. 어떡하면 회장님의 지시를 효과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지를.
그때였다. 병실 문이 열리며 비서실장이 몹시 당황한 기색으로 들어섰다.
“회장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이창용은 불쾌한 어조로 반문했다. 중요한 순간에 겨우 병문안 손님으로 방해를 받아야 하다니.
“한서진 대표입니다.”
“한서진이? 그 친구가?”
이창용은 흠칫 놀랐다. 김성일도 옆에서 당황했다. 그가 방문할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안으로 모시게.”
“알겠습니다.”
비서실장은 급히 병실을 나갔다가 잠시 후 한서진을 안내해서 돌아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서진이라고 합니다.”
“이창용이오. 이렇게 문안까지 와주다니, 정말 고맙소.”
“평소 백철중 회장님한테서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뵈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철중이 놈이 좋은 이야기를 했을 리가 없을 텐데.”
이창용은 여유 있게 받아넘겼다. 어느새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까지 피어나 있었다.
김성일은 보이지 않게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조금 전, 스치듯이 자신을 본 시선. 묘한 미소를 담은 그 눈빛은, 마치 ‘네가 김성일이구나.’라고 탐색을 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직접 대면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평소 한 대표의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소. 대한민국 반도체를 뜨겁게 달구는 인물이 이렇게 문안까지 와줄 줄은 몰랐소.”
“회장님께서 제게 몹시 궁금한 게 하나 있으신 줄로 압니다.”
이창용은 흠칫 했으나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었다.
“글쎄……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소만.”
“잘 아실 거라 생각하는데요.”
그가 슬그머니 집어넣으려는 주도권에 손을 올린 채, 한서진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여기 기조실장님이 낱낱이 보고했을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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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얼굴에 그 몸매에, 학교까지 한국대라면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하나 더 추가해야 함. 차기 H그룹 회장임.”
“히익! 히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