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0 욕심과 탐욕 사이 =========================================================================
“오랜만에 재밌었어.”
정지원은 미국행을 결정했다. 한국에서 볼 일은 얼추 다 끝났다고 했다.
“다음에 또 놀러오세요.”
“못해도 분기에 한 번씩은 찾아올게. 회장님을 뵙고 보고 올려야지.”
“회장님? 저요?”
한서진은 황당하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이 나이에 회장님입니까.”
“직급이야 만들면 그만이지. SJ인더스트리 규모로 보면 회장직급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해.”
“아유, 그래도 회장님 직급은 싫습니다. 지금 대표라는 호칭도 낯간지러워 죽겠다구요.”
“너만 안 어울린다 생각하는 옷이다. 남들은 하나같이 어울린다고 여기는데.”
정지원은 의미심장하게 웃었고, 한서진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한서진은 악수를 청했다.
“아무튼 이렇게 가신다니 아쉽네요.”
“금방 또 올 건데 뭘. 미국에서 열심히 일할 테니 나 사장직은 유임해 줘.”
“해임할 마음 없으니 안심하세요. 두고두고 부려먹을 겁니다.”
“다행이다. 전용기 한 대 더 살 수 있겠네. 이번 건 항속거리가 너무 짧아서 직항이 안 되거든.”
전용기는 배트모빌을 실을 수 있도록 개조한 비교적 큰 기체지만, 서울―캘리포니아 직항은 안 된다고 했다. 중간에 한 번 하와이를 경유해야 한다나.
“그럼 지금 쓰는 건 저 주시죠. 저거 탐나는데.”
“지금의 너라면 전용기 몇 대를 사고도 남을 텐데, 저런 쬐끄만 제트기는 가져서 뭐 하려고?”
“음…….”
귀가 솔깃해진다. 안 그래도 요즘 당신 때문에 전용기를 사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고 있는데, 이렇게 대놓고 불을 지르다니. 너무하잖아.
“광동체로 하나 뽑아. A380 어때?”
“A380이요?”
“기왕이면 큰 게 좋지. 개조해서 쓰기도 수월하고. 요즘 5억 달러 조금 넘던데. 개조비까지 해서 6억 달러면 충분할 걸?”
큰일 났다. 귀가 자꾸만 솔깃해지려 하고 있어.
“내가 알아봐줄까?”
“아니에요. 저도 그런 거 시킬 직원 정도는 있습니다.”
“다음에 기회 되면 비행기 경주나 해보자.”
정지원은 싱긋 웃으며, 진담 같은 농담을 던졌다.
“이건 이 공식을 이렇게 대입하면 되고…….”
열심히 문제풀이 설명을 하고 있는데, 턱을 괸 채 바라보던 송하나가 불쑥 물었다.
“오빠, 근데 여름에 휴가 안 가요?”
“휴가?”
한서진은 그 말에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곧 여름방학인데.’
사무소야 어차피 자신이 없어도 알아서 굴러간다. 부장 하정태가 두 팀을 잘 조율하고 있고, 회계재무 감사는 개인 재무팀에서 철저히 하고 있으니.
자신은 중요한 보고만 확인하면 된다. 아직 규모 자체가 크지 않아서 손댈 게 별로 없었다.
‘어디 놀러갈까? 조금 근사한 데로.’
생각해보니 정신없이 바쁘게만 살았다. 느긋한 여유를 즐긴다거나 한 적은 없었다.
문득 자신은 한 번도 여름휴가를 간 적이 없다는 걸 떠올리자 한서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맙소사, 나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지?’
만약 운명의 신이 저주해서 다시 3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리는 한이 있어도 거부해야지.
‘여름휴가라…….’
불현듯 해변이 떠올랐고, 그 다음으로는 수영복이 떠올랐다. 역시 여름 휴가하면 해변과 비키니가 아닐까?
‘윽, 내가 무슨 상상을.’
그는 자책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지금 송하나가 알면 창피해서 쳐다보지도 못할 것이다.
“오빠? 갑자기 얼굴이 빨개졌어요.”
“지, 진짜?”
한서진은 당황해서 얼른 거울을 찾았다. 송하나가 배시시 웃으며 덧붙였다.
“거짓말인데.”
“……야. 혼난다.”
“얼굴이 빨개질 생각을 한 건 맞나 봐요? 무슨 생각하셨어요?”
“이상한 생각 안 했거든? 그냥 요즘 회사 일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혈압이 잠시 올랐을 뿐이야.”
“아아, 그러시구나. 머리 아프면 혈압이 오르는구나. 기억해둘게요.”
“…….”
왜 갑자기 얘한테서 한지혜의 느낌이 나지? 둘이 어째서 친한지 알 것 같기도…….
“지혜 언니와 셋이서 제주도로 휴가 안 갈래요?”
“제주도?”
“네, 거기에 아빠 휴양지 있거든요. 저 수능 때문에 멀리 외국은 못 가고, 그냥 제주도에서 며칠 놀면 어떨까 해서요.”
“지혜도 같이?”
“네, 셋이 간다고 해야 엄마가 허락해주실 테니까요.”
살짝 아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역시 내가 나쁜 놈이기 때문이겠지. 한서진은 억지웃음으로 그런 마음을 감췄다.
“그러자, 내가 지혜한테 한 번 말해볼게.”
“와, 기대된다.”
송하나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조숙한 마스크를 하고 있지만, 저렇게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가 소녀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더불어 그 소녀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자신이 짐승 같아서 한심하고. 한서진은 머리를 흔들어 그런 기분을 떨쳐냈다.
“근데 국내라지만 며칠씩 공부 안 하고 여행 가도 괜찮겠어? 공부는 하루만 쉬어도 감이 떨어지는데, 수능 이제 얼마 안 남은 이 중요한 시기에…….”
“저, 사실 수시 합격했어요. 진짜 며칠 안 됐어요.”
“뭐, 정말?”
한서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럼 이제 과외를 할 수 없는 거야? 그런 거야……?
“그래도 수능은 봐야 돼요. 수시요건 등급은 충족해야 완전한 합격이거든요.”
“그, 그래? 다행이다.”
수능을 봐야 한다는 게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얼떨결에 말실수를 한 한서진은 자신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다행히 송하나는 듣지 못한 건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한국대는 1등급만 맞으면 된대요. 그러니까 정시 준비는 여전히 해야 돼요.”
“1등급, 쉬운 게 아니지. 알았어, 나도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
“고마워요, 오빠.”
다행히도 과외는 계속 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다행이다.
병실은 복도부터 삼엄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일반인의 접근을 아예 차단하겠다는 듯, 복도 입구에서부터 경호원들이 각을 잡고 서 있다. 김성일 실장을 따라 복도를 걷는데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제 조금 있으면 살아있는 한국 경제의 역사를 만나볼 수 있다. 과연 그는 자신에게 무슨 용건이 있을까.
병실 입구에도 두 명의 경호원이 쥐 한 마리 드나들지 못하게 지키고 있었다. 기조실장은 가볍게 노크를 한 뒤 말했다.
“회장님, 김성일 기획조정실장입니다.”
들어오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김성일은 문을 열었다.
박현준은 그를 따라 특실로 들어섰다.
재벌 총수 같은 VVIP를 위한 특별실은, 병실이라기보다는 마치 호텔처럼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스치듯이 봤으면 아마 호텔룸으로 착각했을지도.
박현준은 병실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노인을 보았다.
한국 경제의 살아있는 신화이자, 한때 그가 몸을 담았던 회사의 오너. 정재계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아우르며, 한국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실질적인 권력자.
그가 자신을 쳐다보는 순간 박현준은 저도 모르게 숨이 가빴다. 시선만으로 압박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
묵묵히 주시하던 이창용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박현준 차장인가? 제약에서 근무했다던.”
이미 예전에 퇴사한 몸, 따라서 그와 자신은 남남이다.
그럼에도 밑의 직원을 대하듯이 자연스럽고, 또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신기하게도 박현준은 위압적인 태도에서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고, 그런 자신에게 소름이 돋았다.
‘이런 미친…… 난 이미 진성 직원이 아니라고!’
그렇게 자신을 다그쳐 보지만, 손끝에서부터 일어나는 긴장감이 멈추질 않는다.
박현준은 꿋꿋이 두 다리로 선 채, 입을 열어 대답했다.
“제가 박현준입니다.”
목례는 하지 않았다. 겨우 쥐어짜낸 자존심이었다.
그를 보는 김성일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지금 감히 회장님 앞에서 고개조차 숙이지 않다니.
“제법 기도가 있는 친구로군. 이리 다가오게.”
쥐어짜낸 자존심은 아까 그게 마지막이었는지, 박현준은 그 말에는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힘들게 다가갔다. 이창용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가만히 주시했다.
한때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불경시하며, 신처럼 추앙했던 인물. 한국 경제발전의 산 증인.
그런 인물의 눈빛은, 조용히 쳐다보기만 해도 사람을 짓누르는 힘이 있었다.
“기조실장한테 대강 이야기는 들었네.”
“……무슨 이야기입니까.”
감히 하늘같은 회장님께 질문을 한다는 것. 또 한 번 좁쌀만큼 쥐어짜낸 자존심 덕분이었다.
“아아, 안심하게. 나는 리베이트니 그런 걸 물을 마음은 없어. 그냥 궁금한 게 있네. 별 건 아니고, 자네는 자네가 한 일의 의미를 알고 있나?”
박현준의 눈빛에 일순 혼란이 스쳤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감을 잡기 어려웠다.
그 세 가지 물질의 정체를 아느냐고 묻는 것인가, 아니면 한서진에 관한 이야기인가.
“자네가 조제한 화합물. 그게 어떤 건지, 어디에 쓰이는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
“그것도 모르는군. 알았네.”
이창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했는지 불만족스러워하는 건지 표정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퇴사했다고 들었는데, 앞으로의 계획은 있나?”
“…….”
“알았네. 그만 돌아가 보게.”
이창용은 고개를 돌렸다. 더 말할 가치도 없다는 얼굴이다.
김성일 실장이 웃음을 띠며 나섰다.
“갑시다, 박 차장.”
“…….”
“지금 뭐 합니까? 어서 가자고요.”
거듭된 추궁에 마비에서 깨어난 듯 박현준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꽉 깨문 입술 사이로 들리지 않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이유 모를 분함이 마음을 휘감는다.
아니, 사실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기대했던 것이다. 한때 신처럼 떠받들었던 이창용과, 인간 대 인간으로서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이창용의 눈에 자신은 여전히 이름조차 모를 일개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진성그룹을 퇴사한 지금조차도.
마치 까마득히 낮은 직원을 데려다가 아무렇지 않게 재떨이를 닦으라고 시키듯이, 묻고 싶은 몇 마디만 툭툭 내뱉고 다시 돌려보낸다.
회사를 다닐 때는 아무렇지 않았던 경험. 그러나 지금은 견딜 수 없이 분했다.
“사례비입니다. 아시겠지만 오늘 회장님을 만난 것, 그리고 회장님이 물으신 것들은 함구해 주셔야 합니다. 그 대가라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김성일은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봉투 한 장을 내밀었다.
그가 돌아간 뒤에도, 박현준은 병원 로비에서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봉투를 열어 보았다.
「금일억원.」
안에는 일억 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5분도 안 되는 면담의 대가로 1억을 던져준 것이다.
예전 같으면 앞뒤 재지 않고 기뻐했을 것이다. 겨우 5분 내주고 1억을 벌었으니.
그러나 지금은 기쁜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통장에 있는 25억 남짓한 현금 때문은 아니리라. 25억이 있다 해서 1억이 작은 돈인 것은 아니니.
바로 자존심을 팔고 받은 돈이란 사실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은 그 거래에서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하지 않았나.
그게 분했고,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등을 획 돌렸다. 로비를 나서다가 불현듯 불우이웃 모금함이 보였다. 병원에서 운영하는,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모금이었다.
그는 주저 없이 모금함에 봉투째로 수표를 넣었다. 돌아서는 얼굴에는 일말의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진성제약, 반드시 꼭 인수하고 만다.”
자신을 기조실에 고발한 김 차장을 엿 먹이고 싶다는 마음. 개선장군처럼 회사로 돌아온 자신을 보고 놀라는 동료들의 표정.
그런 사소한 상상 속 즐거움은, 이미 그의 마음에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실탄 감독님. 이번에도 지혜가 눈치 빠르게 빠져주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대본 수정하셔야 해요.”
“아, 왜요!”
“단둘이 보내면 전연령가가 아니잖아요. 안 됩니다. 단호. 절대로. 네버.”
“그런 게 어딨어! 건전하게 물놀이만 하겠다는데 이건 표현의 자유 침해야! 여론 탄압이다! 사상 검증이다!”
“떼를 써도 안 되는 건 안 돼요.”
ㅠㅠ
하지만 우리 실탄프로덕션은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늘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