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89화 (189/609)

00189  욕심과 탐욕 사이  =========================================================================

박현준은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원래는 한서진에게 받은 돈으로 여생을 편안히 즐기려 했다. 이 나이 먹고 어느 기업에서 받아주지도 않거니와, 이제는 굽실거리면서 직장 생활을 하는 것에 넌덜머리가 났다.

남은 돈은 약 25억 가량. 60평대 아파트와 자동차 등을 제외하고 순수 현금만 따진 것이다.

수퍼카 등의 욕심만 내지 않으면, 남은 시간을 편안히 즐기며 보낼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러나 퇴사하면서 한서진에게 건 전화 한통이 그의 남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름도 모를 시시한 부품 따위가 아니라, 엔진이 될 수 있는 기회야.’

박현준은 각오를 다졌다.

지금까지 별 볼일 없는 대기업 부품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달라진다.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주요 부품, 엔진으로 거듭나게 된다.

‘안정적인 생산라인이 필요해. 단지 제조설비를 갖추는 것을 넘어서, 원재료를 합법적이고 투명하게 공급하고, 또 비밀리에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춰야 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세 가지 물질.

박현준은 더 이상 그 물질의 정체나 용도에 관해서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해야 할 것은 단 하나, 고용주가 원하는 대로 안정적인 공급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다.

‘무제한이라…….’

처음 한서진은 무제한의 자본 투입을 불렀다가, 박현준이 기겁을 하자 연간 5,000억 원이라고 마지못해 상한을 그어 주었다.

그것으로 알 수 있었다. 고용주에게 세 가지 의약 물질은 전 재산보다 더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연 5,000억 원은 자신을 안심시키고, 폭주를 통제하기 위한 안전수치에 불과했다.

“역시 그 방법뿐이야.”

오랜 조사와 고민 끝에 박현준은 결론을 내렸다.

고용주의 지시를 가장 훌륭하기 이행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뿐이었다.

‘제약회사를 인수해야 해. 기왕이면…… 진성제약으로 할까.’

진성제약 시가총액이 1,800억 원이었던가.

한서진이 약속한 연 5,000억 원에 비하면 턱에도 미치지 못한다. 진성제약을 두 개나 인수하고도 무려 1,400억 원이 남는 돈이 아닌가.

게다가 진성제약은 자신이 오래 근무해서 회사의 생태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고용주의 비밀 유지에도 수월하다.

덤으로 미운 놈에게 엿도 먹일 수 있고.

‘김 차장, 그 인간.’

자신이 큰 아파트를 샀다고 그룹 기조실에 리베이트 혐의로 냉큼 고발한 인간.

리베이트를 할 조건도 환경도 되지 않는 건 상사인 그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조실에 찔렀다는 것은, 그냥 개구리가 죽든 말든 심심하니까 돌을 던지겠다는 뜻이다.

박현준은 그렇게 결심을 굳혔다.

“여보, 전 회사에서 사람이 찾아왔는데요.”

안방에서 사업 구상을 하고 있는데, 와이프가 들어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 회사? 진성제약? 그 놈들이 왜?”

“내가 알아요. 당신하고 이야기하고 싶다는데, 어떡해요?”

“그 놈들이 뭐라고 집까지 찾아와.”

평생 먹고 살 걱정 없겠다, 세계 탑클래스 청년 부호를 고용주로 두고 있겠다, 박현준은 자신감이 넘쳤다. 근래 사정을 모르는 와이프 눈에는 객기로만 보였지만.

박현준은 대충 옷을 걸쳐 입고 현관문을 열었다.

“누굽니까?”

“박현준 차장님?”

박현준은 살짝 흠칫 했다. 눈에 익은 얼굴, 바로 기획조정실장 김성일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곧 차분해졌다.

“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 리베이트라면 난 할 말 없는데. 고소할 거면 하던가.”

“박현준 차장님, 그게 아니라.”

“이봐요, 김 씨.”

순간 김성일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었다.

박현준이 회사에 있을 때는 자신 앞에서 감히 숨도 못 쉴 지위였다. 시가총액 2,000억도 안 되는 계열사의 일개 차장과, 그룹 기조실장의 차이는 어마어마했으니까.

진성에 몸을 오래 담근 이들은 퇴사하더라도 감히 진성에 반기를 들 생각을 못한다. 오래 일할수록 진성이 사회에서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체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박현준은 거리낌이 없다.

“이제 나 차장 아니니 그냥 박 씨라 불러요.”

“……아무튼 박현준 차장님. 저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내가 왜?”

박현준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풀썩 웃었다. 목소리에 냉소가 뚝뚝 묻어났다.

“당신이 경찰이라도 돼? 깡패야? 내가 왜 당신이 가자고 하면 가야 되지?”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분이 있어요. 잠시 시간을 내주시는 게 어떨까요.”

김성일은 당장이라도 울화가 터질 것 같았으나, 필사적으로 꾹 참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회장님이 손수 분부하신 일이다. 자신의 사적인 감정으로 지시를 망칠 수는 없지 않은가.

“누가 날 찾는데 기조실장씩이나 되는 양반이 말심부름이나 하러 다녀? 그룹 전무라도 날 찾나?”

“이창용 회장님이십니다.”

박현준의 안에서, 순간적으로 뭔가가 멈췄다.

다행히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멈췄던 것은 다시 돌아갔고, 박현준은 보이지 않게 크게 심호흡을 했다.

회장님. 그 단어에서 십 수 년 간 훈련처럼 쌓인 반사작용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말도 조금씩 떨렸다.

“진성 회장님이 나를……?”

“그렇습니다. 그러니 같이 가주시죠. 그분이 당신을 꼭 뵙고 싶어 해요.”

김성일의 어조가 은근슬쩍 높아졌다. 상대의 약해진 모습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것이다.

‘아무렴, 회장님 이름 앞에서 누가 감히.’

김성일은 마치 자신의 권세라도 되는 양 뿌듯했다. 알량한 이십 몇 억을 믿고 사표까지 내던지고 나간 주제에, 회장님이 불렀다는 말 한 마디에 딸꾹질부터 나오다니.

‘회장님이 왜 나를?’

박현준은 빠르게 생각했다.

그는 무의식중에서도 ‘회장님’이라고 공대하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그만큼 정신이 없었다.

십 년이 훨씬 넘도록 회사를 다녔지만, 한 번도 지근거리에서 이창용을 본 적이 없었다. 어쩌다가 한 번, 그것도 먼발치에서만 겨우 봤을 뿐이다.

이미 진성과는 인연이 없어졌지만, 그럼에도 이창용 회장이 자신을 찾는다니,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긴장으로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자산만 치면 500억 불의 한서진이 훨씬 대단하지만, 이창용은 이 나라 경제와 정치를 쥐락펴락하는 거물이자, 살아 있는 역사 아닌가.

한서진이 신흥 챔피언이라면, 이창용은 오래 된 전통의 명문가라고 할까.

“무슨 용건입니까?”

박현준은 한참 후에 겨우 입을 열었다. 김성일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됐다, 반쯤 넘어왔다.

“그거야 나도 알 수 없죠. 하지만 아주 중요한 용건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퇴사한 사람을 회장님이 직접 만나고 싶어 할 리가 있겠어요?”

고민이 끊어지지 않는다.

위험에 처할까 불안해서가 아니다. 기조실장이 딴 마음을 먹었다면 ‘법적인 절차’를 밟아서 위해를 가했지, 무식하게 갱단 흉내를 내지는 않을 테니.

다만 신경이 쓰였다. 이창용 회장이 대관절 무엇 때문에 자신을 보려고 하는 것일까.

‘역시 그 세 가지 물질 때문에? 대체 그게 뭐라고…….’

긴 고민을 마친 박현준은 고개를 들었다.

“안내해요.”

왜 불렀는지 이유도 궁금했지만, 한국 경제의 살아있는 역사와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흘리는 것도 아까웠다.

게다가 자신은 지금 진성제약 인수를 고려하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조만간 부딪칠지도 모른다.

한서진은 오랜만에 H반도체 공장을 찾았다.

대외적으로 그는 H반도체와 크게 연관이 없지만,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H반도체에는 그가 개발한 5nm공정 기술이 적용된 설비들이 있었으니.

H반도체를 다시 찾자 괜히 감개가 무량했다. 이곳에서 비글, 슈나우저를 개발했던 옛 과거들이 떠올랐다.

퇴사 당시에만 해도 자신이 이렇게나 성공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몰랐다.

‘정 팀장님이라면 예상했을 수도.’

500억 원의 사업자금이 있었다 하나,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밑바닥부터 모든 것을 시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은 기술만 개발했을 뿐, 나머지 번거롭고 궂은일은 모두 정지원이 알아서 처리했다. 그에게 준 SJ인더스트리의 지분 1%가 결코 아깝지 않았다.

“이 공정라인에서 현재 한 달에 약 4,000만 개의 반도체를 쉬지 않고 찍어내고 있습니다.”

공장장이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처음 보는 얼굴, 아마도 SJ인더스트리에서 H반도체를 인수하면서 새로 고용한 사람이리라.

불현듯 예전 공장장이 그대로 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신입사원일 때의 모습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다. 아마 몹시 어색하고, 재미난 광경이지 않을까.

그걸 상상하며 슬며시 웃는데, 공장장은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는지 불안한 표정이었다.

“저어, 뭐가 걸리는 게 있으신지……?”

“그냥 다른 생각이 좀 났어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개발자로 이곳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일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웃음이 났습니다.”

“아, 그건 저도 들었습니다. 여기 공장 직원 중에서 모르는 이가 없더군요.”

일반 생산직으로 입사해서 개발 엔지니어로 보직을 변경, 한국대에 수석 입학을 한 뒤 회사의 축하를 받으며 독립했다.

그리고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500억 달러의 자산가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 공장의 주력 공정기술을 개발한 인물이며, 사주인 SJ인더스트리의 최고경영자와 돈독한 사이다.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은 인생 대반전, 일반 직원들에게 한서진은 신성불가침의 숭배 대상이었다.

“숭배라니요. 그거 뭔가 듣기 민망한데요.”

“빈말이 아니라 직원들은 하나같이 한 대표님을 동경하고 추앙합니다. 기왕 방문하신 김에 한 말씀 해주신다면 다들 사기가 오를 겁니다.”

5nm공정 기술 검토만 하러 왔던 한서진은 졸지에 직원 대상으로 연설까지 하게 되었다.

‘직원 입장에서는 높은 사람들이 와서 연설하는 거 별로인데. 뭐, 근무 시간에 편히 쉴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한서진은 어렵지 않게 연설을 마쳤다. 일부러 퇴근 시간 20분 전에 딱 맞춰서 연설을 끝냈는데, 직원들이 그런 배려를 알까 싶었다.

연설이 끝난 후 한서진은 그리운 얼굴을 만났다.

“김 대리님, 최 대리님.”

“우리가 뭐라고 불러야 할지 이거…….”

“그냥 편히 부르세요. 어차피 저, 이 공장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설계2팀의 직원인 김경규와 최지석 대리.

한서진은 그들의 마음을 최대한 편하게 해주려 애썼다.

몹시 망설이던 그들은 한서진이 빈말로 하는 게 아님을 알아차리고 그제야 마음 편히 대했다.

김경규는 푸념하듯이 말했다.

“그때 네 제안을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하 과장님, 지금은 부장소리 듣고 사신다면서? 연봉이 10억이 넘는다던데.”

“하하…… 그만큼 일을 많이 해주시죠. 사무소 일은 거의 그 분에게 맡기다시피 합니다. 저는 설계 위주로만 일을 해서요.”

“……부럽다.”

떠나보낸 버스가 알고 보니 행선지가 금광이었을 줄이야.

두 사람만큼 가슴이 쓰린 이도 없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셋은 이런저런 옛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한서진은 굳이 그들에게 스카웃 제안을 하지 않았다.

사무소 인력도 충분했지만, 더 냉정히 말하자면 그들은 그가 필요로 할 만한 최고급 인력까지는 아니었다.

그들도 굳이 옛 정을 빌미로 입사 부탁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겉으로나마 즐겁게 옛 추억을 상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럼 또 뵙죠.”

“다음에 다시 볼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만…… 그때에는 네가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지 상상이 안 가.”

최지석이 어렵게 꺼낸 농담에 한서진은 가만히 웃었다.

“저도 그래요.”

============================ 작품 후기 ============================

“이봐, 김 씨. 기조실장이든 참모총장이든 옷 벗으면 동네 아저씨인 거 몰라? 아직도 내가 진성직원이야, 앙?”

그리고...

“아이고, 회장님!”

반복학습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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