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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88화 (188/609)

00188  욕심과 탐욕 사이  =========================================================================

미래과학부 장관이 직접 움직였다.

작심을 했는지 그는 세 명의 전문가를 대동했다. 그리고 칼라 통신망이 전파를 쓰지 않는 것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정상용은 어렵지 않게 그들의 눈앞에서 직접 여러 가지 증거를 보여 주었다. 몇 시간에 걸친 소명 작업을 마치고, 전문가들은 만장일치의 결론을 내렸다.

“전파를 쓰지 않는 건 확실합니다.”

단단히 벼르고 왔던 장관은 한 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떤 원리로 이게 가능한 겁니까?

“공개할 수 없는 기술 비밀입니다.”

정상용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다만 제품의 모든 부품 설계는 공개되어 있으니 언제든지 직접 확인하시지요.”

기술의 실체는 존재한다. 칼라 칩은 설계 특허의 형태로 공개되어 있으니.

그러나 회로 설계도만 보고, 어떻게 전파를 쓰지 않고 통신이 가능한지를 알아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칼라 칩에 새겨진 에테르 언어 회로, 한서진 외에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이가 나타나기 전에는.

미래과학부는 H그룹에 기술 원리를 공개하라는 요구를 할 수는 없었다. 사고나 위험을 야기할 수 있다는 객관적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미래과학부는 일단 한 발자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유레카 통신은 아무 제지 없이 서비스되었다.

‘완벽한 일기예보라.’

한서진은 타르타로스를 노려보듯이 주시하며 끄응 하는 신음을 냈다.

오늘도 벌써 꿈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느라 두 시간을 헛되이 썼다.

지친 그는 지금부터는 현실에 충실하기로 했다. 하루 일과를 꿈속 탐구에만 몽땅 쏟을 수는 없는 일이니.

‘가능할 것도 같은데.’

타르타로스는 기상 정보에 담긴 에테르의 흐름을 본다. 그것을 해독해 인간이 알지 못하는 날씨의 변화를 예측한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기상 정보의 규모를 더욱 늘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알고리즘은 불안정해.’

지금 타르타로스에 입력된 일기예보 분석 모듈은 한국 기상청에서 쓰는 것이다. 즉 전 지구를 대상으로 한 예측에는 알맞지 않다.

그렇다면 적당한 프로그램을 어디서 구할까.

‘이럴 땐 미국이 아닌 게 불편하기도 하네. 미국이라면 편히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합법적인 루트를 통하면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주변의 관심을 사게 된다.

정지원도 그렇지 않았던가. 날씨 예측 프로그램을 탐내는 거부들이 상당수 있다고.

쓸데없는 관심으로 주변이 시끄러워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어차피 돈을 벌려고 하는 짓도 아니다. 돈은 이미 죽을 때까지 다 쓰지도 못할 만큼 있었다.

의자에 늘어지듯 등을 기대고 있던 한서진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냥 내가 확 만들어?”

프로그래밍 실력은 아직 미약하지만, 통찰안이 이끄는 대로 하면 될 것이다.

애초에 프로그래밍을 배우는 이유가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통찰안이 좀 더 잘 발휘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니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관련 분야에 지식을 쌓고 이해도를 높일수록 통찰안은 더욱 높은 경지의 비밀을 보여준다.

손가락으로 탁자를 타닥타닥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한서진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대체 꿈속은 언제 또 들어가지?”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전설 속의 용을 닮은 듯한 생명체. 그 신비한 풍경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타르타로스를 통해서든 꿈을 통해서든, 다시 한 번 더 그 안을 엿보고 싶었다.

그리고 황금빛 왕궁의 주인.

“그 사람이라면…… 통찰안을 분명히 잘 알고 있을 텐데.”

정지원은 빠듯하게 한국 일정을 소화했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혀가 내둘러지는 강행군이었다.

그는 하루에 세 시간만 자면서, 대학과 기업, 학술회, 재해지원행사 등을 빼놓지 않고 돌았다.

어떤 자리에서는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성공한 기업가, 어떤 장소에서는 반도체에 이해 깊은 학자, 또 어떤 곳에서는 인자하고 베풀 줄 아는 자선사업가.

그는 적재적소에 맞춰 다양한 사람의 역할을 해냈으며, 주변의 지지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한두 번 그의 행사를 관람했던 백철중은 이렇게 탄식을 하기도 했다.

“저런 인재가 내 회사에 있는 줄 전혀 몰랐다니.”

공치사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한탄이었다. 그러나 곧 아쉬움을 떨쳐냈다.

“기술에 대한 이해와 경영가로서 태도, 두 가지 모두를 갖춘 친구야. 이 나라는 그에게 너무 좁았던 건지도.”

술 상대를 해주던 한서진은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왠지 묘했다. 그럼 나는?

“회장님. 그렇게 말씀하시니 언어 때문에 미국에 못 간 제가 많이 부족하게 느껴지는데요.”

“아아, 자네야 어디, 어느 나라에 있든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세상이 자네를 위해 존재할 텐데.”

“과, 과찬이십니다.”

이건 칭찬이 좀 쎄다. 한서진은 민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아졌다.

“정 이사가 큰일을 해주었어. 자네를 위해서나, 우리 H그룹을 위해서나. 배려는 잊지 않겠다고 전해주게.”

“이재민 주택 지원 사업 말씀하시는군요.”

정지원은 주택 공급 사업에 4천억을 내놓으며, H그룹의 이미지 개선에 큰 도움을 주었다. 아마 그걸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백철중은 고개를 저었다.

“꼭 그것만이 아닐세. H반도체 시찰 때부터 그는 나를 많이 배려해주었네. 그때는 쫓겨난 오너한테 왜 이러나 의아했었는데, 자네가 SJ인더스트리 오너라는 걸 알게 되니 납득이 되는군.”

“정 팀장님도 회장님과 제 친분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까 그러셨을 겁니다.”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닐세. 정 이사 그 친구, 생각보다 눈치가 아주 빠른 친구야. 그래서 칭찬하는 거고.”

아리송한 말을 끝으로, 백철중은 말을 아꼈다.

그는 화제를 돌렸다.

“차세대 국가 기간망 교체 사업이 시작되도록 해야겠네. 그래야 칼라 통신망의 제한을 지속적으로 풀 수 있으니.”

유레카 통신 이용자가 체감할 수 있는 통신 속도의 증가는 현재 100배가 한계였다.

이것은 물리적인 문제였다. 국가 기간망을 전부 교체하기 전에는 더 이상의 속도 증가가 불가능했다.

“그건 H그룹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요?”

“그러니까 로비를 해야지. 언제까지 구닥다리 시스템에 만족하며 살 거냐고 달달 볶아야 하지 않겠나? 공무원이란 놈들은 게을러 터져서 지금부터 미리 못살게 괴롭혀놔야 제때에 맞춰서 간신히 결과물이 나온다네.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야.”

“그러고 보니, 회장님. 하나 말인데요.”

한서진이 슬슬 이야기를 꺼내자 백철중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한서진은 그걸 보지 못했다.

“하나가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저번에 회장님이 말씀하신, 수능이 필요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해서요.”

“아아, 그거?”

백철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평소보다 과장된 제스처였지만, 한서진은 느끼지 못했다.

“실은 그 아이가 수시와 정시, 둘 다 준비하고 있거든. 수시가 결정 나면 정시는 안 봐도 되지 않나? 난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었다네.”

“수시요?”

한서진은 그 말에 왠지 아쉬워졌다.

수시로 붙어버리면, 더 이상 정시를 위한 과외는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인데…….

“나도 정확한 건 모르니, 나중에 하나한테 물어보게.”

백철중은 그렇게 말을 얼버무렸다.

한서진은 그 말에 문득, 저번에 헤어지기 전 송하나가 배시시 웃으며 했던 말이 생각났다.

‘오빠, 지금 저 시험하는 거예요?’

그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한서진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통찰안이 사람의 마음까지도 보여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나가 자신에게 가진 감정.

그것이 호의인지, 호감인지, 아니면 애정인지 판별이 어렵다. 웃는 얼굴 아래 어떤 색깔의 마음이 있는지 아리송하다.

그것만 확실하다면, 더 이상 망설이지 않을 텐데.

“니가 보기엔 말이야.”

한지혜와 저녁 식사를 하던 중 한서진은 불쑥 물었다.

“하나가 나 어떻게 생각하는 거 같아?”

“어떻게 생각하냐니. 그게 무슨 의미인데?”

한지혜는 대답 대신 오히려 되물었다. 한서진은 내심 못마땅했지만 차분히 말했다.

“넌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들어? 눈치 빠르잖아?”

“그러니까 정확히 뭘?”

“…….”

“아아, 미안. 재밌어서 놀려봤어.”

한지혜는 키득거리면서, 포크로 가볍게 허공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하긴, 어차피 이제 반 년 정도만 지나면 하나도 스무 살 되지? 오빠, 기다리느라 사리 쌓였겠다. 하나 처음 만난 지도 일 년 넘지 않았어?”

“대답만 하시죠, 한 여사님.”

“하나 마음이야 하나가 알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하나 대변인이라도 돼?”

기집애, 말문 막히게 하는 언변은 여전하다. 한서진은 조금 울컥했지만 일단 참았다.

한지혜도 더 놀리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진지하게 말했다.

“일단 하나 주변에서, 하나 애인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오빠야.”

“진짜 그렇게 생각해?”

“걔가 알고 지내는 남자사람친구가 오빠밖에 없거든.”

“…….”

“꾸준히 연락하고 만나고 하는 사람은 오빠뿐일 거야.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 이 정도면 차려놓은 밥상이지, 안 그래?”

“……됐다. 내가 너한테 뭘 기대했냐.”

한지혜는 히죽 웃으며 놀리듯이 물었다.

“왜, 막 둘이 천생연분이라서 잘 될 것 같다, 그런 입에 발린 응원을 기대했어? 그렇게 해줄 걸 그랬나?”

“카드가 정지돼봐야 이 기집애가 오라버니 무서운 걸 깨닫겠네.”

“……죄송합니다. 카드만은 참아주시죠, 한 회장님.”

“밥이나 처먹고 올라가.”

한지혜는 실실 웃으며 마저 포크질을 했다.

저 눈웃음이 오늘따라 특히 거슬린다고 생각하며, 한서진도 식사에 집중했다.

‘사내새끼들 눈이 삐었지. 저 눈웃음이 뭐가 이쁘다고 그 난리들인지.’

저 눈웃음을 애교로 보고 껌뻑 죽는다는 남자들이 이해가 안 간다. 혹시 그거 다 동생이 지어낸 거짓말이 아닐까 싶다.

저렇게 영악하고, 음흉한 눈웃음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다고?

“폐하.”

초룡 타르온이 머리를 땅에 내려놓고, 왕은 그 위에 편안히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자 왕은 흘끔 돌아보았다.

로브를 입고 수정 지팡이를 든, 충직한 노신하가 가볍게 목례를 했다. 왕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시구려. 오늘따라 하늘이 참 맑소.”

“오수를 즐기고 계셨습니까.”

“조금 생각을 하고 있었소. 경의 이름이 뭔지.”

노신하는 쓰게 웃었다.

“의미 없는 일로 옥체를 혹사하지는 마소서.”

리미트리스 드림, 저주가 남긴 잔재.

왕은 충직한 신하의 정체성에 관한 조각 하나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신하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말해도, 주변의 다른 이들이 알려줘도, 왕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지저분한 잡음으로만 느껴질 뿐이다. 문자로 써서 보아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그가 어떤 충심으로 자신을 섬겨왔는지, 그와 어떤 경험을 공유했는지, 모든 것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단지 잃어버린 것은 이름을 포함한 그의 정체성, 그것뿐이다.

“근래 들어 폐하께서는 저주 속 세상에 정을 붙이고 계신 듯합니다.”

“그 아이들이 그새 말을 했나 보군.”

“폐하, 저주는 단지 폐하를 현혹시키기 위해서…….”

왕은 더 듣지 않고, 단칼에 말을 잘랐다.

“그 세상에서 여흥을 추구한 건 사실이오. 그러나 경은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소.”

지엄한 판결을 내릴 때처럼, 왕의 눈동자는 정제된 이성으로 가득했다.

“어느 쪽이 현실이고 어느 쪽이 가짜인지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니까.”

============================ 작품 후기 ============================

―오프더레코드

“왕과 레노지안이 자주 안 나오는 이유는... 아무래도 광활한 판타지 배경이잖아요? 마법도 나오고, 왕궁도 나오고, 막 용도 나오고. 어휴. 그래픽 작업만 돈 엄청 깨져요. 세트 비용은 말할 것도 없어요.”

“……그니까 어른의 사정이란 건가요?”

“실탄프로덕션은 영세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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