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7 욕심과 탐욕 사이 =========================================================================
흠칫, 하는 기색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 것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야무진 표정으로 되묻는다.
“아빠가 그랬어요?”
매우 자연스러운 태도에 한서진은 자신이 혹시 그때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 응. 너 수능 필요 없다고 하신 거 같은데…….”
“아빠가 잘못 말씀하신 거예요. 아니면 오빠가 잘못 기억하시거나.”
“그런가?”
“그럼요. 수능 안 보고 어떻게 대학을 가요? 한국대는 기부 입학도 안 돼요.”
야무지게 당찬 목소리다. 듣기 좋은 음색은 사람에게 강한 믿음을 불러 넣는 힘이 있었다. 저런 목소리가 거짓말 같은 것을 할 리가 없어, 그러니 진짜일 거야, 하는 그런.
“아무래도 내가 잘못 기억하나 보다.”
“제가 이따가 집에 가서 아빠한테 여쭤볼게요.”
“응.”
한서진이 끄덕이자 송하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소매 끝을 잡아끌었다.
“저 목말라요. 우리 음료수 마셔요.”
자판기로 데려간 송하나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음료수 두 개를 뽑아 마시며, 둘은 다시 캠퍼스를 걸었다.
시선이 쏟아진다. 그중 상당수는 자신이 아닌 송하나를 보는 남자들의 것이었다. 한서진은 왠지 기분이 좋다가도, 한편으로는 나빠졌다.
그러고 보니 저 핫팬츠, 너무 짧은 거 아니야? 요즘 여고생들은 도대체…….
“근데 너, 춥지 않니?”
“이제 곧 여름인데요. 뭐가 추워요?”
“…….”
괜히 말을 꺼냈나. 말문이 막혀서 머뭇거리는데 송하나가 다시 말했다.
“바지가 좀 이상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너무 짧지 않은가 해서. 그럼 앉을 때 불편하지 않아?”
“안 앉으면 되죠.”
송하나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이 대답했다. 한서진은 괜히 시선을 피했다.
평소 송하나는 대하기 편한 동생이지만, 가끔 얼굴을 쳐다보기 어려울 때가 있다. 마침 지금이 바로 딱 그런 것 같다.
한서진은 단대 건물을 대충 보여준 뒤, 캠퍼스 휴양 공간 위주로 보여주었다. 농구장, 잔디밭, 수영장 등등.
마지막으로는 반도체 연구소로 데려왔다.
“여기는 전에 온 적 있지?”
“네, 기억나요.”
한서진은 그때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칼라 칩이 탄생했던 그날, 송하나는 스마트폰 안테나라는 발상을 제시함으로써 지금의 H통신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때 그녀의 한 마디가 아니었으면, 자신과 박효산 교수는 서버 클러스터 네트워크 칩으로나 쓰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난 학교 오면 주로 여기 연구소에 있어.”
“그럼 수업은요?”
“거의 안 듣지. 논문 제출로 끝내거나, 아니면 그냥 낙제만 면하는 식으로 해. 졸업만 하면 되니까.”
“하긴, 오빠는 성적이 별로 중요하지 않겠네요.”
“뭐, 그래.”
어깨를 나란히 한 캠퍼스 나들이는 즐거웠다.
한서진은 문득 둘이 같이 벚꽃을 보러 갔던 그때가 생각났다. 한지혜가 빠지는 바람에 마치 데이트처럼 돼버린 그날. 송하나는 그때 그 분위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벌써 저녁이네.”
“저 밥 사주세요. 학식으로요.”
“알았어.”
한서진은 송하나를 데리고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어른스러운 마스크라서일까. 그녀는 고교생이 아니라 어엿한 대학생처럼 자연스러웠다.
별로 맛없는 학식이지만 송하나는 아무렇지 않게 먹었다.
“근데 왜 하필 학식이야?”
“내년부턴 저도 이 맛에 익숙해져야 하니까요.”
“대학 다니면서 밖에서 사먹는 게 낫지 않아?”
“그럼 친구 못 사귀잖아요.”
나름 야무진 대답에 한서진은 끄덕이며 수긍했다.
저녁이 깊어 한서진은 차에 태워 그녀를 데려다주었다.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녀와 같이 있는 시간이 즐겁고 재미있었으니까.
어느덧 한남동 저택에 도착했다.
차를 세운 한서진은 물끄러미 송하나를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그녀도 갸웃거리며 마주 보았다.
“그거 수능 말인데, 내가 진짜 잘못 들은 건가? 내내 생각을 해봤는데, 그건 아닌 거 같아서…….”
송하나가 갑자기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오빠, 지금 저 시험하는 거예요?”
“으, 응? 시험이라니?”
뜻밖의 질문에 한서진은 당황해서 버벅거렸다.
그녀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무대 커튼은 들추는 게 아닌데. 그렇게 무대 뒤가 궁금하세요?”
“…….”
“갈게요. 오늘 즐거웠어요.”
말을 할 틈을 주지 않고 송하나는 조수석에서 훌쩍 내렸다.
뒷걸음질로 멀어지다가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든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인다.
한서진도 얼떨결에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그녀가 정문 안으로 사라지자 차를 돌렸다.
집으로 향하며, 그는 작게 투덜거렸다.
“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
정원을 거니는 왕의 표정이 제법 밝았다.
모시는 군주의 기분이 좋은 듯하니, 수행을 위해 따르는 시종과 시녀들의 얼굴도 화사했다.
왕이 잠시 그늘에 걸터앉아 쉬자, 두 시녀가 은쟁반에 과일을 정중히 받쳐서 올렸다.
“수고했다.”
왕은 과일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던 시녀가 공손히 입을 열었다.
“폐하, 어인 일로 그렇게 표정이 밝으시옵니까. 저희에게도 그 연유를 알려주시지요.”
“짐의 표정이 밝아 보이느냐?”
“그렇사옵니다. 액을 당하신 이후, 폐하께서 오늘처럼 밝게 웃으시는 것은 처음 봅니다.”
“오늘처럼 웃은 적이 없다라……. 내가 그렇게 얽매여 있었나 보구나.”
왕은 옅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급 시녀들까지 걱정과 불안에 떨 정도로, 그동안 자신이 위태로웠나 보다. 그런 생각에 헛웃음이 났다.
레노지안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자신이, 저 약한 아이들의 걱정을 사다니. 실로 우습지 않은가?
“저주 속 거짓 세상이지만…… 그 안에도 즐거운 일은 한 가지 있더구나. 그래서 짐이 기꺼운 모양이다.”
“리미트리스 드림에서 즐거운 일이라고요?”
시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다른 시녀들도 마찬가지로 귀를 쫑긋 세웠다.
끝이 없는 꿈을 통해 피시전자의 영혼을 영원히 소멸시키는 고대의 저주, 그 거짓된 세상에서 즐거운 일이 있다니.
시녀들도 저주의 무서움을 익히 들어왔기에 왕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있더구나. 밝고, 아름답고, 현명한 사람이……. 그래서 저주 속임에도 불구하고 ‘적합’이 뜬 것이겠지.”
왕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송하나는 아니었다. 그녀는 한서진의 여자이자, 거짓된 꿈의 일부로 부속된 인물이니.
꿈속에서 보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일순간 흐뭇할 순 있어도, 지금 같은 순간에 그리워할 존재는 아니다.
‘왕비…….’
왕은 불현듯 생각했다.
드물기 그지없는 적합의 두 여인. 그들을 떠올리고 비교하며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저주가 자신을 옭아매기 위함이 아닐까 하고.
호출을 받고 병실로 온 김자홍은 아무 말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창용 회장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았다.
그는 불길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회장님이 왜?’
자신은 의료진 중 한 명일뿐, 최고주치의는 아니다. 그런데 회장은 자신을 콕 집어서 불렀다고 했다. 대체 무슨 이유일까?
‘혹시……?’
그의 표정이 흐려졌다.
짚이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것 같다.
단지 그때는 그룹 기조실장이었고, 지금은 물러나긴 했지만 그룹 총수라는 점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김자홍 교수라 했나?”
이창용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의외로 조용하고 차분한 어조였다. 김자홍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예, 그렇습니다, 회장님.”
“밤낮으로 내 건강을 살피느라 노고가 많네.”
“아닙니다.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김자홍은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묵묵히 바라보던 이창용이 다시 입을 열었다.
“2년 전, 한서진이란 환자를 진료한 적이 있다고 들었네.”
“아, 예.”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그거였구나. 김자홍은 다소 긴장의 끈이 풀어졌다. 적어도 자신이 실책을 저질러 부른 것은 아니었다.
“그때 일은 기조실장한테 대충 들었지. 하지만 자네의 자세한 느낌을 듣고 싶어. 직접, 생생하게.”
“제 느낌 말씀이십니까?”
“솔직했으면 좋겠군.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짚이는 거, 걸리는 게 있으면 말해보게. 판단은 내가 할 테니.”
김자홍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창용이 왜 이러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한 번 쓰러진 후 그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으니까. 노령을 고려하면 언제 다시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한서진에게 일어났던 기적, 늙은 재벌은 거기에 관심이 깊은 것이리라. 진시황이 불로초에 관심 깊었던 것처럼.
“췌장암 말기였습니다. 위장과 간장, 십이지장까지 심각하게 침윤된 상태였지요…….”
마음을 다진 김자홍은 차분히 이야기를 꺼냈다.
환자의 비밀보호? 병원 전체의 주인이자 이 나라 재계 1위 재벌 총수 앞에서 그런 생각을 어찌 할 수 있을까.
제법 긴 이야기였지만 이창용은 진지한 얼굴로 들었다. 이야기가 지속되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흐름을 끊지 않았다.
마침내 김자홍의 이야기가 끝났고, 한참 동안 생각하던 이창용이 그를 바라봤다.
범 같은 묵직한 시선에 김자홍은 가슴이 조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자네 느낌은 어떤가?”
“어떤 느낌을 물으시는 건지…….”
“신체의 자연적인 치유인가, 아니면 다른 원인이 개입되었다고 생각하나?”
김자홍은 잠시 2년 전의 그때를 떠올렸다.
지금도 계속 생각하곤 한다.
그것은 기적이었을까, 아니면 어떤 인과관계의 사슬이었을까.
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일개 의사인 자신의 힘으로 그것은 불가능했다.
“일단은 자연적인 치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태를 호전시키는 약물이나 치료법은 현대 의학에 없습니다. 한방 의학이라 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의 생각을 의심하고 있군.”
이창용은 덤덤히 짚었고, 김자홍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자연적인 치유 역시 말이 안 됩니다. 기적은 있을 수 있지만, 그런 단시간 안에 그런 기적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한에서는…….”
“알았네. 무슨 말인지.”
이창용은 고개를 묵직하게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저었다.
“이만 나가 보게.”
“편히 쉬십시오.”
김자홍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병실을 나서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성일 기획조정실장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김자홍에게 바짝 붙으며 낮게 속삭였다.
“비밀은 유지하실 거라 믿습니다. 영원히.”
“……물론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여기 회장님이 주시는 답례입니다.”
김성일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며 김자홍은 쓴웃음을 지었다.
기조실장이 질문했을 때는 외압만이 있었는데, 회장이 하문하니 하사품이 추가로 붙는 건가. 그는 얌전히 그것을 받아 챙겨서 병실을 떠났다.
기조실장이 병실에 들어서자 이창용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지시를 내렸다.
“박현준이라고 했나. 진성제약에서 근무했다던.”
“예, 그렇습니다.”
“지금 어떻게 하고 있지?”
“일단 그 친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무슨 사업체를 차리려는 것 같습니다만, 아직 움직임이 확실하진 않습니다.”
“조용히 그 친구를 데려오게. 알겠나? 조용히 말이야.”
은근하지만 분명한 뜻을 담은 명령. 김성일은 경직된 머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비로소 그를 쳐다보며, 이창용은 차갑게 말을 덧붙였다.
“조용히, 그리고 반드시 데려오게.”
============================ 작품 후기 ============================
그래서 송하나의 꼬리는 몇 개?
전 한 개에 한 표...ㅎ
왜냐면 ‘하나’쏭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