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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86화 (186/609)

00186  욕심과 탐욕 사이  =========================================================================

“그게 무슨 소린가?”

백철중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서릿발이라고는 조금도 서려 있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이.

“말 그대로일세. 나도 건강해지고 싶네.”

“그건 주치의한테 가서 물어야지. 왜 그걸 여기서 묻고 있나?”

“자네라면 답을 알려줄 것 같았네.”

“누가 그러던가? 이해 못할 소리만 하는군.”

이창용은 잠시 입을 다물었고, 백철중은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혀까지 쯧쯧 찼다.

“자네, 죽다 살아나더니 눈이 흐려졌군. 그 총명했던 이창용이는 어디로 갔나?”

“이보게, 백철중이.”

“대관절 나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건강해지는 답을 알려줄 것 같았다니? 내가 무슨 불로장생초라도 갖고 있는 줄 아는가?”

백철중의 목소리는 엄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눈빛에는 냉정함 대신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그런 방법 따위는 모르거니와, 만약 정말 있다 해도 내가 혼자 쓰지 자네와 나눌 것 같나? 대체 누가 그리 자네 눈을 흐리게 했나? 갑자기 찾아와서, 말도 안 되는 억지나 부리고 말이야.”

“부탁하세.”

“이놈! 이창용이!”

갑자기 백철중이 버럭 호통을 쳤다. 그러나 이창용의 눈썹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차갑게 얽힌 분위기 속에서, 백철중은 맹수가 으르렁대듯이 말했다.

“너, 똑똑하고 냉철한 놈이잖냐? 어부지리긴 하지만, 진성그룹을 재계 1위로 끌어올린 놈이 바로 너잖냐!”

“…….”

“오래 살고 싶은 욕망에 눈이 처멀었나 보구나. 그래서 뇌세포가 완전히 녹았어, 녹아버렸어. 되도 않는 망상이나 믿고, 말도 안 되는 억지나 부리고.”

“이봐, 백철중 회장.”

“욕심이 씐 게야, 쯧쯧쯧……. 난 자네 망상에 어울려주고 싶은 생각 없으니 이만 돌아가게. 배웅은 않겠네.”

완벽한 축객령을 내리고, 백철중은 그대로 일어서서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이창용을 보필해온 경호원들은 두 재벌 총수의 살벌한 분위기에 완전히 눌려 있었다.

이윽고 이창용이 입을 열었다.

“가자.”

의외로 평온한 음성에 경호실장은 살짝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의 주인은 마음이 전혀 동요하지 않은 듯이 보였다.

휠체어를 타고 나오며, 이창용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가만히 띠었다.

“백철중…… 네놈은 내가 잘 알지. 네놈이 나를 잘 알듯이.”

이용무의 말을 전적으로 믿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확인해볼 가치는 있다고 느꼈다. 근거는 없지만 심증이 그렇게 하라고 부추겼다.

그래서 왔고, 백철중의 의중을 확인했다.

수십 년 간 부딪치며 경쟁해온 사이이기에, 오히려 형제보다 상대를 잘 알 수 있다. 그는 냉정한 연기를 펼쳤지만, 그래서 이창용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가 있다는 건 확인했으니…… 이제 그게 무엇인지 파고들면 되겠어.”

모든 것을 가진 삶을 살았고, 이제 잃어가고 있는 것은 건강뿐. 죽음이 가까워진 노인 재벌이 건강과 삶에 가지는 욕심은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고도로 농축된 탐욕은 오히려 깨끗하고 정갈한 법, 이창용의 눈빛에는 그런 냉정함만이 가득했다.

“눈치 챘어.”

백철중은 창가에 서서, 멀어지는 이창용의 마이바흐를 바라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이용무가 자신이 알아낸 바를 말했다면, 이창용은 충분히 근접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

오늘 그는 구걸을 하러 온 게 아니다.

다만 확인을 하러 온 것이다. 백철중의 반응을 통해, 자신이 품은 생각이 맞는지를.

‘기적’이 정말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내가 너를 잘 알듯이, 너도 나를 잘 알겠지.”

확인을 하러 왔다는 것을 백철중이 눈치 챘듯이, 이창용도 백철중이 거짓을 말하고 있음을 눈치 챘을 것이다.

숨길 수 있는 게 있고, 숨길 수 없는 게 있다.

자신들은 공통점이 많았다. 많은 것을 가졌고, 이 나라를 오랫동안 호령했다. 사람을 부리고, 지배하고, 군림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리고 이제는 이 모든 것을 남겨두고, 언젠가 세상을 떠나야 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

모든 것을 가진 노인이 삶의 연장에 가지는 집착. 그를 둘러싼 진실과 거짓은 숨길 수가 없다.

결국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은 말은,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는 연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창용이…….”

백철중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살고 싶은 욕망에 눈이 멀어 뇌가 녹았느냐는, 원색적인 비난. 자신도 그 말을 하면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조금 더 유리할 뿐, 크게 입장이 다른 것은 아니기에.

자신의 마음 역시 그와 별다를 것이 없기에.

“죽기 싫고, 더 오래 살고 싶은 그 마음을 내가 왜 모르겠나. 하지만…….”

그의 눈빛이 냉정하게 변했다.

“선을 넘진 말게.”

백철중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한서진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는 그의 앞에서 돌 하나를 가슴에 얹은 듯한 갑갑함을 느끼지 않아도 될 듯하다.

한서진은 캠퍼스 주차장에 레인지로버를 세우고 내렸다. 요즘에는 학교에 올 때 주로 레인지로버를 이용한다. 포르쉐나 람보르기니보다 확실히 눈에 덜 띄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캠퍼스 내에서 온갖 주목을 받는데, 람보르기니 같은 것을 타고 다니면 살짝 창피했다.

박효산 교수가 보자마자 가볍게 타박했다.

“요즘 얼굴 보기 정말 힘들구나.”

“죄송해요. 워낙 이것저것 바빠서요.”

“괜찮다, 괜찮아. 연구비만 두둑하게 내놓고 가거라.”

“그거야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죠.”

“녀석, 넉살은. 처음 만났을 때하곤 진짜 완전히 달라졌네.”

박효산이 웃자 한서진도 피식 웃었다.

박효산을 처음 만났을 때와 지금의 자신은 바위와 하늘처럼 까마득한 차이가 났다. 과거에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곤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다.

그래도 선명하고 깨끗한 기억이 있다.

바로 췌장암에 걸려 죽음을 앞두었을 때의 절망과, 통찰안으로 삶의 가능성을 엿보았을 때의 희망이었다.

그때의 절망과 희망, 이것은 아마 죽을 때까지 흐려지지 않을 기억이리라.

“곧 중간고사인데, 준비는 잘 돼 가냐?”

“아, 모르겠습니다. 그냥 D만 주셔도 좋으니 낙제만은 말아달라고 애원해야겠어요.”

“그 정도는 다들 봐줄 거다. 500억 불의 학생인데, 누가 감히 밉보이고 싶겠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돈으로 다 해결하려는 나쁜 놈 같잖아요.”

“돈으로 해결한다는 게 꼭 나쁜 건 아니지.”

한서진은 반도체 연구소에 이어 단대 건물에도 들렀다.

지나가던 과 학생들이 그를 보고 반가워하며 다가왔다.

“선배! 오랜만이에요!”

“형! 왜 이렇게 학교에 안 나오셨어요? 사업하느라 엄청 바쁘신가 보다.”

“오빠, 또 강연 같은 거 안 하세요? 저, 오빠 강연 되게 인상적이었어요.”

선망과 동경에 가득한 수십 쌍의 눈동자가 이제는 부담스럽지 않다. 마치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딱 알맞은 느낌이다.

“뭐, 좀 바빴어. 혹시 강태규 교수님 어디 계신지 아니? 지금 교수실에 계신가?”

“방금 강의 끝났으니, 아마 교수실에 계실 거예요.”

“얼른 가봐야겠네. 이따 보자.”

한서진은 강태규 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첫 수업부터 시작해서 단 한 번도 출석하지 않은 과목의 교수였다.

일반 학생이 그랬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F다. 여기에 괘씸죄까지 곁들여서.

그렇기에 한서진은 살짝 걱정하는 마음으로 들어섰다.

“한서진 학생?”

“교수님, 죄송합니다! F만 주지 말아주십시오!”

한서진은 교수를 보자마자 넙죽 고개를 숙였다.

총장도 벌벌 떠는 500억 불의 재력가라는 게 중요한가? 지금 상대는 자신의 학점에 생사여탈권을 가진 사람인데. 굽히고 비는 게 학생으로서 예의다.

“아유, 공부 말고도 큰일에 바쁜 학생인데 당연히 배려를 해줘야지요. 걱정하지 말고 있어요. C 이상은 나갈 테니까.”

“C나 주시는 겁니까?”

“그래도 논문 제출로 학기 통과할 줄 알았는데…… 그게 조금 아쉽긴 하네. 나도 한서진 학생 논문 검토 해보고 싶었거든.”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시간이 없어서.”

“이해해요. 그래도 잠깐 차 한 잔 할 시간은 되지?”

“물론입니다.”

한서진은 30분 정도 강태규 교수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술적인 주제는 물론, 경제와 투자, 금융에 관해서도 제법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한서진은 그런 분야는 잘 몰랐지만, 강태규는 열심히 귀담아 들었다.

“역시 최고 부자의 시야는 많이 다르네. 고마워요, 많은 도움이 됐어.”

뭐가 도움이 됐다는 건지 모르지만, 30분 간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 강태규는 몹시 만족한 듯했다.

“다음 학기에도 내 수업 듣죠?”

“예, 아마 그럴 겁니다.”

“그때는 꼭 B코스 도전해 봐요. 내가 그렇게 어려운 걸 내진 않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한서진은 다음 학기에는 어떻게든 시간을 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으, 이번 학기는 인간적으로 너무 일이 많이 터졌어.’

진성그룹의 분열, H그룹 내의 갈등, 태풍 메기, H통신 등 다양한 일이 터지는 바람에 도저히 학교 수업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저 많은 일이 겨우 상반기 동안 일어났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꿈속 세상도 다시 탐사해야 하는데.’

타르타로스를 통한 두 번의 탐험. 아직 그 후로 다시 그 꿈속의 세상을 엿본 적이 없었다.

교수실을 나선 한서진은 1층 로비에서 멈칫했다.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설마.’

그는 눈을 비비고 가까이 다가갔다가 놀랐다. 자신의 예상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하나야?”

“아, 오빠.”

그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본 송하나가 배시시 웃었다.

흰색 핫팬츠에 착 달라붙는 분홍색 면티를 입은 모습은 상큼하면서도 아찔했다.

숨길 수 없는 볼륨감에, 지나가는 남자들이 하나같이 힐끔거린다. 교내 최고 인사인 한서진과 같이 있다는 점이 더욱 시선을 끌었다.

“여기는 어떻게 왔어? 학교는 어떡하고?”

“아, 오늘 모의고사라서요. 그래서 조금 일찍 끝났어요.”

“그래? 근데 무슨 일로?”

“…….”

송하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서진은 순간 자신이 말을 잘못 했나 싶었다.

“그냥…… 요새 공부도 잘 안 되고 해서요. 한국대 캠퍼스 좀 돌아보면 자극도 되고, 공부하는 동기도 되지 않을까 해서 왔는데, 안 돼요?”

“잘 왔어. 겸사겸사 나도 보고 좋지, 뭐. 그럼 내가 대학 안내해줄까?”

“정말요?”

“나도 마침 끝났거든. 근데 다음부터는 미리 연락을 해. 내가 학교에 없을 수도 있어.”

“알겠어요.”

한서진은 송하나를 데리고 학교 이곳저곳을 안내해주었다.

“넌 경영학과 갈 거지? 그럼 여기 단대는 봐도 별로 소용이 없겠다.”

“아뇨, 저도 반도체공학부 올 거예요.”

“반공부에?”

“저 이과인데요. 모르셨어요?”

그것도 여태 몰랐냐는 듯 서운하다는 목소리에 한서진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전에 경영 쪽 생각한다고 해서 나는 문과인 줄 알았지.”

“저 공대 좋아해요. 경영은 아버지 때문에 교차지원하려고 했었던 거죠. 근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요.”

“정말 반도체공학부에 올 거야?”

“네. 그래야 오빠와 선후배 되잖아요.”

같은 대학일 뿐만 아니라, 같은 과 선후배라? 그 모습을 상상하자 한서진은 기분이 살짝 들떴다.

‘잠깐만?’

그때였다. 한서진은 불현듯 잊고 있었던 기억의 한 조각을 끄집어냈다.

며칠 전에 백철중 회장님이 말씀하시길, 분명히…….

“근데 회장님이 너 수능 필요 없다고 하시던데?”

============================ 작품 후기 ============================

이제 하나쏭이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꼬리가 몇 개인지 판별이 납니다. 하나일지, 아홉 개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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