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85화 (185/609)

00185  그룹의 주인  =========================================================================

유레카 통신은 국내 이동통신시장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냥 호수에 바위를 투석기로 퍼부어댔다. 깜짝 놀란 개구리들은 호수를 버리고 이리저리 달아났다.

무선으로 초당 2기가바이트가 넘는 전송속도는 혁신 그 자체였다. 아무도 그런 경이로운 무선기술이 이렇게 깜짝 쇼처럼 튀어나오리라 예상 못했다.

4.5세대니 5세대니 하던 기존 통신 기술은, 유레카 통신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에 전파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 갈팡질팡하는 소비자들의 마음에 한 번 더 불을 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파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 소비자 사이에 퍼지지 않았다. H통신은 그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고, 정부와 3대 이통사도 굳이 그 사실을 퍼트릴 필요가 없었다.

“들었나? 벌써 가입자가 200만을 넘었다네. 하하하!”

백철중은 보자마자 몹시 즐거워하며 기쁜 감정을 드러냈다. 한서진도 마음이 흡족해졌다.

“100배 빠른 속도라는 게 제대로 먹혔나 봅니다. 하긴, 통신은 속도가 생명이니까요.”

“음…… 조금 아쉽기도 해. 기왕이면 200배 정도로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거야 기존 인터넷망 속도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으니까요.”

칼라 칩끼리는 초당 1테라바이트의 전송 속도로 무선 통신이 가능하다. 몇 번에 걸친 테스트에서 이미 검증이 되었다.

다만 H통신이 판매하는 스마트폰은 2.5기가바이트 정도로, 약 409배 정도 다운그레이드 락이 걸려 있다.

다운그레이드를 하지 않았어도 그 이상의 속도를 내기는 어려웠다. 국가 기간망과의 속도 차이 때문이다.

칼라 시스템끼리 따로 인터넷망을 구축하지 않는 한, 초당 1테라바이트의 속도를 체감하기는 요원할 것이다.

물론 이 정도 속도만 해도, 3대 이통사들이 절망의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준이었다.

“병아리 세 마리가 화들짝 놀라서 궁리 중이라는데, 지들이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나?

백철중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오랜만에 보는 듯했다. 숙원이던 통신 사업에 성공적으로 진출하게 돼서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다.

모시는 주인이 즐거워하자 정상용도 뿌듯했다.

“그리고 진성전자에서 새로운 타입의 종합메인보드를 개발했다고 합니다.”

“메인보드?”

“크게 개인 컴퓨터형과 모바일 단말기형, 이렇게 두 가지 모델을 개발했습니다.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의 성능을 극대화하는데 초점을 둔 모델입니다. 벌써 양산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주가 좀 올랐겠구만.”

백철중은 조금 못마땅한 듯이 중얼거렸다.

전자기기는 부품이 조화를 이룰 때 안정적인 성능을 낸다. 3인이 서로 줄을 묶고 달리기를 하는 것과 같다. 가장 느린 사람에 맞춰서 다른 이들이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다.

그간 대만의 보드제조사들이 만든 메인보드는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다. 진성이 만든 보드는 과연 그 차이를 좁힐 수 있을까?

“진성이 베껴서 더 좋은 제품 만드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니, 뭐 어느 정도 통하겠지. 서나 고년도 결국 SJ인더스트리에 기생하는 걸 택한 건가.”

백철중은 껄껄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소리가 마냥 편하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H반도체 때문인가…….’

한서진은 괜히 조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룹의 차세대 산업으로 키우려고 했던 반도체를 하루아침에 빼앗겨 버렸으니. 진성전자가 메인보드 사업까지 뛰어든 걸 보며 백철중도 마냥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회장님, 제가 전에 부탁드린 거 기억하십니까?”

“부탁?”

“H통신 설립을 제안하면서 했던 부탁 말입니다.”

“아아, 그거.”

백철중은 이제 알겠다는 듯이 무릎을 가볍게 쳤다. 그때의 대화가 떠올랐다.

‘나중에 제가 회장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때 한 번은 잊어주십시오.’

‘심기가 불편한 일이 있어도, 잊어 달라?’

백철중은 아무렇지 않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난 또 뭐라고. 내가 그거야 흔쾌히 승낙하지 않았던가. 왜 그리 어렵게 말하나?”

“감사합니다.”

“수능도 필요 없겠다, 이제 그만 데려가게. 우리 하나.”

“……예?”

한서진은 순간 멍해졌다. 하나를 데려가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아, 우리 하나 데려간다는 이야기 아니었나?”

“그, 그런 게 아닙니다.”

“난 또 뭐라고.”

백철중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사람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표정에 한서진은 괜히 민망해졌다.

하나를 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남자라면 이런 심정, 이해할 것이다.

“실은 진작 말씀드렸어야 할 게 있는데, 어쩌다 보니 차일피일 미루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점에 관해서 먼저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자네, 그렇게 분위기 잡으니까 내가 다 긴장되는구먼.”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에 백철중 회장도 덩달아 낯빛이 굳어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설마 자네, 여자친구라도 생긴 건가?”

“그,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대체 뭔데 이러나? 늙은이 심장 떨어지겠어.”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 개발자가 접니다.”

“……응?”

백철중은 순간 멍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무슨 말인지 귀는 포착했는데, 머리는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한서진은 눈을 질끈 감고, 쐐기를 박듯이 말을 던졌다.

“에스코너의 오너도 접니다.”

“…….”

굳어 있던 백철중의 눈빛이 서서히 맑아졌다. 한서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혹시 떨어질지 모르는 날벼락을 기다렸다.

만약 그가 호통을 친다면, 겸허히 맞으리라.

‘하나 아버지이신데…….’

눈빛이 돌아오고도 한참이나 말이 없던 백철중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에스코너라면, SJ인더스트리의 지분 대부분을 가진 L국에 있는 그 회사를 말하는 건가? 동명의 다른 회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 회사가 맞습니다.”

“슈나우저, 코카 스패니얼을 자네가 개발했다고?”

“……예, 스티브 진은 제 미국식 이름입니다. 미국에 출원을 하려니 미국식 이름이 나은 듯해서…….”

갑자기 백철중이 시원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한서진의 불안했던 마음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청량한 웃음이었다.

“아니, 이 사람아. 갑자기 그렇게 잔뜩 분위기 잡길래 난 또 잔뜩 쫄았지 뭔가. 무슨 폭탄을 터트리려고 이 사람이 이러나 하고 말일세. 하하, 심장 떨어질 뻔했네. 자네가 딴 여자 생겼다는 줄 알고.”

“그, 그건 아닙니다만…… 그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 겁니까?”

“자네가 영 쑥스러우면 그건 넘어가기로 하고, 아무튼 자네가 SJ인더스트리 오너라는 거 아닌가?”

“……네, 그렇습니다.”

“SJ인더스트리가 생산 공장으로 H반도체를 가져갔고.”

“……그렇지요.”

“뭐, 약혼 예물 해준 셈으로 치세.”

“네?”

한서진은 화들짝 놀라서 바라봤다. 이 분이 사람 민망하게 자꾸 왜 이러실까?

백철중은 오히려 마음 편하게 웃었다.

“생판 남한테 뺏긴 거라면 두고두고 속이 쓰렸을 건데, 자네가 가져갔다니 차라리 잘 된 일이구만.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기분일세. 허어, 오늘부터 조금도 마음에 거리낌 없이 편히 잘 수 있겠어. 늘 H반도체가 마음에 걸렸거든.”

“……회장님?”

“암,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가 가져간 거라면 좋은 일이지. 이참에 남은 내 지분도 줄까?”

“그,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언짢은 반응을 보일 거라 각오했다. 그런데 이 시원스러운 반응은 뭔가. 오히려 좋은 소식을 전해줘서 고맙다는 감정이 얼굴에 가득하다.

“아예 이름도 바꾸는 게 어떤가? SJ반도체라고 말이야. 그게 더 어감이 좋을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때?”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한서진은 쩔쩔매며 거절했다.

다음 날 저녁.

일찍 귀가해서 쉬고 있던 백철중은 느닷없이 이창용이 방문했다는 말에 의아해서 돌아봤다.

“이창용이가? 무슨 일로?”

“저야 모르죠. 지금 정원 들어오고 계세요.”

송지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백철중의 안색이 굳어졌다. 사전에 약속도 잡지 않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들어오다니.

‘이놈이 무슨 일로?’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으니 떨떠름했다.

양해를 구하지 않은, 느닷없는 방문.

결코 이런 일을 할 사람도 아니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다. 원수를 진 적은 없다만, 수십 년 간 한국 경제의 양대 거목으로 부딪치고 경쟁하면서, 상한 감정이 좀 많은가.

굳이 말하자면 애증의 관계라고 할 수 있으리라.

“나 왔네.”

백철중은 앉은 자세 그대로 그를 맞이했다.

이창용은 휠체어에 타고 있었다. 소파에 옮겨 앉을 힘도 없는 모양이었다. 기력이 많이 쇠해진 게 눈에 훤히 보인다.

“검찰에 출두하고 오는 길인가?”

“자네 농담은 재미없어. 그새 잊었나 보군.”

“말하는 걸 보니 아직 기력은 쌩쌩한가 보군. 휠체어는 사치인 거 같은데?”

“허허, 자네 정정함에 비하면 턱도 없지. 어떻게 건강관리를 하기에 그 나이에도 그런가?”

“젊은 와이프와 어린 막내딸 덕이지. 두 사람 보는 맛에 하루하루가 젊어진다네.”

“그럼 나도 새장가나 갈까.”

“그 나이에 새장가 들었다가는 골로 갈지 모르니, 신중히 생각하게.”

평생 경쟁을 하며 해묵은 감정이 쌓였지만, 반대로 둘만이 가지는 유대감도 있다.

둘은 나이도 같고, 대한민국 1, 2위를 다투는 최고 재벌이었으며, 이 나라 산업경제를 함께 이끌었다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비록 일생을 다툰 사이라 하나 유일하게 공유하는 동질감이 있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인연이다.

애증이란 그런 의미였다.

“자네 이야기는 들었네. 내가 의식이 없는 동안 수술까지 받았다면서.”

“그랬었지.”

백철중은 슬슬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이창용은 뚫어져라 주시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꽤나 정정해 보이는군. 뇌수술까지 받은 사람 같지가 않아. 허허, 참 어쩜 그리 정정한 겐가.”

“건강하게 장수하는 방법이라면 자네 주치의에게 묻는 게 어떤가. 아니면 나처럼 운동을 하던가.”

“영구적인 손상이 남았다고 들었는데, 말이나 몸짓을 보면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군.”

백철중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이 친구, 자꾸만 선을 넘으려고 하고 있다. 그 점이 몹시 불쾌했다.

“그런 골골대는 몸으로, 농담이나 따먹자고 약속도 없이 집에 쳐들어왔을 리는 없을 텐데.”

“…….”

“자네,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이창용은 잠시 말이 없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질문이 있네. 해도 되나?”

영원한 경쟁자이자, 한편으로는 동반자이기도 한 사이. 이창용은 그런 이에게 지금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겨우 질문 하나를 해도 되느냐고.

백철중은 그의 이런 신중함이 낯설었다. 그리고 거슬렸다.

일찍이 이창용은 자신 앞에서 이런 조심스러운 자세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생 동안 둘은 동등했다.

사석을 가리지 않고 서로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고, 또 그 말이 귀에 들어오더라도 ‘나보고 개자식이라 했다고? 뭐, 그놈이라면 그래도 돼.’라며 눈 하나 깜짝 않던 사이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기에, 이창용은 그답지 않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지푸라기라도 잡으러 왔다네.”

백철중의 얼굴이 더욱 경직되었다. 불길한 예감이 구체화되며, 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나도 자네처럼 건강해지고 싶네.”

============================ 작품 후기 ============================

“지금 빈손으로 찾아와서 대본 출연 늘려달라는 겁니까? 아놔, 이 사람이 정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