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4 그룹의 주인 =========================================================================
한서진은 타르타로스 주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명령어를 타이핑하던 그는 잠시 고개를 돌려 타르타로스를 바라봤다. 본체 주변에 넘실거리는 에테르의 흐름이 눈에 보인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모습, 그러나 그는 아쉽다는 눈으로 주시했다.
“또 그대로네.”
오늘도 실패인가.
아쉬운 마음을 누르고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타르타로스를 감싼 빛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급히 주모니터를 응시했다.
「치직…… 치지직…….」
노이즈 화면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린다.
한서진은 심호흡을 하며, 모니터에 떠오른 풍경에 모든 집중력을 쏟았다.
왕이 있던 그 세상이다. 틀림없었다.
시선은 차분히 거리를 걸으며, 한서진을 인도했다. 그는 시선이 인도하는 대로 정신없이 따라갔다.
시선이 있는 곳은 전에 봤던 황금의 궁전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활기가 넘치는 거리였다.
한서진은 시선이 전해주는 풍경을 주시하며, 마치 자신이 그 사람들 속에 섞인 듯한 착각에 빠졌다.
‘참 신비하다.’
언뜻 보면 오래 전 중세 시대를 연상케 하는 풍속과 분위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질서정연하고, 거리는 제대로 정비가 되어 있었다.
거지나 빈곤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으며,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밝았다.
사람이 걷는 길이지만, 6차선은 될 법한 폭을 가지고 있다. 아스팔트는 아니지만 하얗고 고운 색을 띤 돌로 가지런하게 포장이 되어 있었다.
그런 길이 끝을 모르고 뻗어 있고, 좌우로는 높지는 않지만 아기자기하게 지어진 건물이 즐비해 있었다.
거리를 보면 그 문명 수준을 알 수 있다 했던가. 겨우 사람이 걷는 길을 이렇게 잘 정비한 것을 보면, 이곳의 문명 수준이 결코 낮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동차는 그렇다 치고, 아예 운송 수단이 없나? 모두 걸어서 다니는 건가?’
시선이 방향을 조금 틀었다. 작은 동물을 데리고 산책하는 귀부인이 보인다. 유난히 고급스러운 옷은 다른 행인들과 독특한 차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귀한 신분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귀부인은 별로 거리낌이 없는 듯했다. 행인들도 특별히 그녀에게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서진은 그녀의 어깨에 올라앉은 동물을 가만히 보다가 깜짝 놀랐다.
“저게 뭐지?”
얼핏 고양이만 한 크기의 동물은 다리 네 개가 달린 도마뱀처럼 보였다. 놀랍게도 그 도마뱀은 박쥐처럼 가죽으로 된 한 쌍의 날개가 등에 돋아나 있었다.
키익, 하듯이 입을 벌린 동물이 뭐라 소리를 질렀다. 물론 한서진은 그것을 들을 수 없었다. 그에게 듣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으니까.
갑자기 동물이 날개를 퍼덕이며 높이 날아올랐다. 귀부인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별로 놀라지 않았다.
시선은 비상한 동물의 움직임을 쫓듯, 아래에서 위로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시선을 덮었다.
한서진은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뒤로 넘어질 듯이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저건 또 뭐야?”
날개를 펄럭이며 천천히 하강하는 거대한 그림자. 그것은 방금 전 귀부인의 어깨에 앉아 있던 동물과 놀랄 만치 닮았다.
단지 그 크기가 무지막지하게 컸다. 대충 가늠할 때 몸길이만 15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다.
귀부인의 어깨에서 날아오른 작은 동물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동물의 앞발에 앉아서 몸을 비볐다. 닮은 생김새와 하는 짓을 보면, 아무래도 어미와 새끼의 관계인가 보다.
한서진은 어미 동물의 눈을 보았다. 붉은 섬광이 봉인된 구슬처럼, 신비한 휘광이 흘러나오는 눈동자였다.
바로 그때였다.
뚝.
화면이 뚝 끊어지며, 하얀 노이즈가 나타났다. 지직거리던 노이즈는 잠시 후 씻기듯 가라앉으며, 아무것도 없는 빈 화면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한서진은 그제야 꿈에서 깨어나듯 크게 심호흡을 토했다.
방금 전 본 광경을 믿기 힘들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물이 존재하다니.
더 이상한 것은…….
‘왜 다들 놀라지 않지?’
거리에는 혼란 같은 것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 생물의 출현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런 생물이 존재하는 게 이상하지 않다는 의미 아닌가.
다시금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손바닥에는 어느새 흥건한 땀이 고였다.
두근거림의 정체는 다름 아닌 설렘이었다.
꿈속의 세상.
두 번에 걸쳐 단면만을 조금 봤을 뿐이지만, 스치듯 본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이 뛴다.
그만큼 아름답고, 신비하며, 사람을 끌어당기는 황홀한 마력으로 가득한 곳이라니.
문득 그가 머리를 거세게 흔들었다.
“아냐, 단순히 꿈속 세상이 아니야.”
그는 주먹을 부서질 듯이 세차게 쥐었다.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세상이야. 어딘가에, 실제로.”
이서나는 수행원들을 데리고 회사 연구소를 방문했다. 막 개발을 마친 신제품을 보기 위해서였다.
연구소장이 공손한 태도로 보여준 제품을 보고 그녀는 한껏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것인가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회장님. 이 얼마나 감미롭고, 비단처럼 귀에 착 감기는 칭호란 말인가.
이서나는 기분 좋은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 표정을 관리하며, 신제품을 이리저리 살폈다.
“비교적 빨리 마쳤군요. 그래도 경험이 없는 분야라 꽤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PC용 메인보드는 사업 경험이 없을 뿐이지 연구소에서는 이미 충분한 기술을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전자제품 중 우리 연구소가 손대지 않는 분야는 없습니다. 당장 진출을 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예비 상태를 유지하고 있죠.”
연구소장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특히 PC시장처럼 우리 사업과 밀접하게 연관된 분야라면 더더욱 눈을 떼지 않습니다.”
“아주 좋아요. 그런 태도.”
이서나는 흐뭇했다.
그녀는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메인보드 개발 명령을 내렸다. 그녀가 내린 지시는 간단했다.
분석해서, 장점만 모으고, 베껴라.
특허도용은 살짝 피해가면 된다. 중요한 건 자사의 기술력과 타사의 노하우를 합쳐, 빠른 시일 내에 만족스러운 제품을 개발해내는 것이다.
유수의 메인보드 제조사들의 제품이 샅샅이 분해되었고, 연구원 전체가 이 프로젝트에 달려들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눈앞의 신제품.
“어디까지나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의 성능을 극대화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서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도 SJ인더스트리는 메인보드 개발은 직접 하지 않으니까. 절대 이 시장은 놓칠 수 없어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연구소장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잠시 메인보드를 살피던 이서나는 비서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 건강상태는 어떻죠?”
갑작스러운 질문에 비서는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것이…….”
“경영 복귀는 어렵습니다. 일에서 아예 손을 놓으시고 절대적인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주치의의 어조는 심각했다. 결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히 이용무의 안색도 굳어졌다.
“그 정도입니까?”
“또 다시 발작으로 쓰러지신다면 그때는 장담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번에 회장님께서 깨어나신 것도, 정말 기적적인 일이었습니다.”
불경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 하지만 이용무는 화를 내지 않았다. 주치의는 그만큼 부친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니.
“만약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경영에 신경을 쓰신다면 어떻습니까? 일선 복귀가 아니라 한 발짝 뒤에서 큰 교통정리 정도만…….”
“절대로 안 됩니다. 회장님은 무조건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주치의의 태도는 완강했다. 적어도 이것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부친의 예후는 정말 좋지 않다는 것을.
‘아버지가 또 쓰러지시면 안 되는데.’
이용무의 안색이 더욱 심각해졌다.
기적적으로 부친이 깨어나 겨우 숨을 돌렸지만, 현실적으로 부친의 운신 폭은 좁지 않은가. 건강 때문에 경영에는 아예 참가를 하지 말아야 하다니.
현실적으로 아버지의 지지만이 지금 승승장구하는 누나를 밀어낼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러나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해서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서진…….’
이용무는 그 순간 그를 떠올렸다.
박현준 차장과의 비밀 거래, 기적적으로 암이 나은 것, 김자홍의 증언, 결정적으로 백철중의 쾌차.
부친이 쓰러졌을 때는 그런 정황을 믿고, 그에게 마지막 거래를 시도했다. 그룹의 전부를 달라는 말에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지만 아버지라면…….’
부친이라면 거래를 성사할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룹 전체를 내주지 않아도 되는 조건으로.
그러나 부친에게 어디까지 털어놓아야 한단 말인가.
한서진은 분명히 말했다. 자신의 입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지켜보겠다고.
만약 그 사실을 발설한 걸 알게 되면, 설령 그게 부친이라 해도 그가 불쾌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지.”
이용무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누나에게 그룹을 빼앗긴 채로 밀려날 판이다. 어렸을 때부터 당연히 진성의 회장이 될 것이라 여겼던 몸으로서,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비록 1차전에서는 패배했지만, 아직 역전승의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왕관을 빼앗긴 채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 방법뿐이다.’
부친이 입원한 병실 문턱을 넘으며, 그는 결심을 굳혔다.
“왔느냐.”
부친이 쌀쌀맞게 맞이했다. 얼마 전 이서나가 다녀간 후로 부친은 자신을 대할 때마다 얼굴에 못마땅함이 흘렀다.
이용무는 차라리 그게 마음이 편했다. 부친이 아직도 자신을 후계자로서 마땅히 여긴다는 방증이기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해 보거라.”
“아버지께서 쓰러지신 동안 백철중 회장님도 한 번 쓰러졌었습니다.”
“얼핏 들었다. 뇌수술까지 받았다면서.”
두 재벌 회장은 한국 경제 발전의 양대 산맥이자, 영원한 라이벌이었다. 자연히 서로에게 관심이 많다. 이창용도 그쯤은 알고 있었다.
“후유증까지 남았는데 다행히 정상 생활을 한다면서. 아주 운이 좋은 친구구나.”
이창용은 오래 전에 H그룹을 넘어서서, 지금의 압도적인 격차를 만들었다. 진성그룹을 재계 1위로 우뚝 세웠다.
그러나 그것은 백철중의 이혼으로 인한 어부지리였다. 또한 백철중은 이창용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건강했다. 이창용은 그를 볼 때마다 자신이 패배한 기분이었다.
심지어 근래에는 두 그룹 간의 차이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고 있지 않은가.
이용무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되도록, 아니 절대로 한서진의 존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해야 했다. 그가 알게 되면 자칫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부친 스스로가 움직이는 것으로 포장해야 한다. 아무리 부친이라 해도 한서진의 이름은 담지 말아야 한다.
“백철중 회장님이 기적적으로 깨어나신 것…… 그냥 하늘이 도운 게 아니라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합당한 이유?”
이창용의 눈빛이 빠르게 변했다.
수십 년 간 최고 기업의 오너로서 많은 사람들을 부리며 제왕학을 손수 실행해온 사람이다. 그 짧은 말에 적지 않은 무게가 담겨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이차용은 자세를 조금 고쳐 앉았다.
“말해 보거라. 자세히.”
============================ 작품 후기 ============================
“백철중 회장, 아무래도 감독한테 로비해서 자기 대본을 늘린 것 같습니다. 원래는 시놉시스상 일찍 퇴장해야 할 캐릭터였대요.”
“사장이고 감독이고! 더러워서 실탄프로덕션에서 진짜 연기 못해먹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