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3 그룹의 주인 =========================================================================
100배 빠른 통신, 유레카.
H통신이 무선통신 서비스 브랜드로 내세운, 한창 세간을 술렁이게 하는 이름이었다.
“정말 100배 빠르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벌써 그런 기술이 나왔다고? H그룹은 원래 통신 서비스 하던 애들도 아니잖아.”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알기로 H통신은 주파수 경쟁에서 죄다 떨어졌다던데. 그럼 아예 무선통신 서비스 자체를 못하는 거 아닌가?”
H통신의 처참한 주파수 입찰 탈락 소식은 소비자들은 물론, 3대 이통사와 정부 관계처까지 당황하게 만들었다.
기간통신사업에 H그룹이 쏟는 야욕을 생각하면, 초반부터 압도적인 공세로 밀어붙여야 옳다.
그런데 입찰에서 모조리 떨어지다니? 그런 주제에 서비스 런칭을 밀어붙이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통신사 중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SKK통신은 급히 정황 조사에 들어갔다.
SKK통신 고유철 사장은 기가 막힌 보고를 받았다.
“기지국이 하나도 없다고?”
“예, 그렇습니다.”
“아니, 무슨…… 기지국이 없으면 무선통신 서비스를 어떻게 시작하겠다는 거야? 백철중 회장이 노망이 들었나?”
만약 H그룹의 귀에 들어갔다가는 경을 칠 소리지만, 고유철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만큼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주파수 입찰에서 모조리 탈락한 것도 그렇고…….’
H그룹은 나름 높은 가격을 써내긴 했지만, 그 가격에는 기존 3사 체제가 깨진 프리미엄이 반영되지 않았다. 덕분에 기존 3사는 예상했던 것보다 비싼 가격에 낙찰 받았다.
‘혹시 처음부터 무선통신사업을 할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겠지?’
이건 말이 안 된다.
무선통신사업을 할 마음이 없으면 왜 진성전자의 모바일사업부를 인수했겠는가. 지금도 모바일사업부 공장에서 스마트폰 신모델을 한창 찍어내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고 있는데.
“스마트폰 제조에 주력하고, 통신 서비스는 보조적으로 운영할 생각인가?”
차라리 이게 합리적인 설명이다.
그리고 정말 그렇다면 기존 3사에도 큰 타격을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주력 스마트폰 라인업이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이니 장사하기 수월해졌다.
손해라면 주파수 사용권을 조금 더 비싸게 사들였다는 것.
“그렇게 호락호락한 양반이 아닌데……. 가만, 혹시 위성 서비스에 올인할 작정인가?”
위성 통신이라면 기지국이 필요 없지만,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단말기도 턱없이 커지고, 지하에서는 통신이 터지지 않을 텐데.
“100배 빠른 무선 통신은 또 뭐고.”
고유철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H통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그 의미를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예 맨땅에 돈을 버리려고 발악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백철중 회장이 쓰러졌다가 정신 차리더니, 설마 진짜로 미쳤나?”
백철중 회장의 뇌에 영구적인 손상이 남았다는 것. 쉬쉬하지만 다들 아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멀쩡히 활동하고 있지만 일부는 여전히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당장은 눈에 띄지 않는 장애가 있을 거라면서.
만약 사소한 분노 조절 장애 후유증이라도 있다면, 재벌 총수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된다. 언제나 크고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사장님, H통신이 일주일 뒤부터 본격적으로 가입자를 받기 시작한답니다.”
“뭐? 그럼 이동통신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그럴 모양입니다.”
“아니, 가용 주파수도 없는 회사가 무슨 이동통신 서비스를 시작해?”
전파는 공공재다. 이통사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배타적으로 이용 가능한 주파수가 있어야 한다.
H통신은 주파수 경매에서 모조리 탈락했다. 그런데 어떻게?
“빨리, 빨리 알아봐!”
고유철 사장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부하 임직원들을 다그치는 것뿐이었다.
유레카 통신이 본격적으로 가입자를 받기 시작했다.
기존 통신요금보다 무려 30% 이상 싼 요금체계에, 새 핸드폰이 필요했던 소비자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서비스에 가입했다.
H모바일로 이름을 바꾼 진성 모바일사업부는 ‘칼라 스마트폰’이라는 새 제품을 정신없이 쏟아냈다. H통신은 칼라 스마트폰을 공급받아 새 가입자들에게 제공했다.
“이게 잘 될까?”
이제 막 개통한 남자 고객은 의심쩍은 눈으로 살피다가 인터넷으로 접속을 해보았다.
“웹 페이지 열리는 속도는 일단 엄청 빠르네.”
작게 감탄한 남자는 속도 측정 어플을 깔고 인터넷 속도를 측정했다. 잠시 후 결과가 나오자 그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 이게 뭐야?”
무려 2.56GB/s의 속도가 나왔다. 기존 이통사의 서비스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속도에 남자는 순간 멍했다.
“이거 기계 고장 아냐?”
몇 번이나 측정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남자는 눈으로 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진짜 100배라고?”
유레카 통신이 기존 통신 속도의 100배라고는 했지만, 그 홍보를 전적으로 믿은 것은 아니다. 아마 최고 조건에서 한계치를 끌어낸, 순간적인 기록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본 건 대체 뭔가.
“제길. 이럼 궁금하잖아.”
그는 결국 직접 시험을 하기로 했다.
미리 구매한, 용량 5기가짜리 영화 다운로드를 선택했다.
다운로드가 시작되고 3초도 채 지나지 않아 영화 다운로드가 끝났다. 숨 한 번 뱉는 동안에 5기가짜리 파일을 다운받은 것이다.
남자는 칼라 스마트폰을 굳게 움켜쥐었다.
“이거 완전 대박이네.”
서비스 개시 첫날, 일일 가입자 9만 명.
H통신의 성적은 그렇게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재민 구호 사업으로 좋은 이미지가 극대화된 점을 고려하면 더욱 아쉬운 성적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겉으로 보이는 숫자만 전부는 아닌 법이다.
“유레카 통신 써봤어? 대박, 완전 대박.”
“그거 신생 아니야? 난 아직 못미더워서 가입 안 했는데. 그렇게 좋아?”
“백 배 빠른 통신이라는 게 거짓말이 아니더라고. 5기가짜리 파일 하나 받는데 2초 밖에 안 걸려.”
“정말? 와, 그거 너무 사긴데.”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H통신 홈페이지 난리 났어.”
친구의 권유에 재빨리 홈페이지를 확인한 여자는 찬양일색으로 가득한 고객센터 게시판을 보고 눈을 비볐다.
―진짜 대박 속도. 초당 2, 3기가바이트 전송이라니, 이런 신세계가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백철중 회장님, 사랑합니다. 이런 좋은 걸 서비스해주셔서.
―심지어 요금도 엄청 싸! 완전 대박!
게시판을 아무리 뒤져봐도 악평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온통 속도와 품질, 요금에 관한 찬양 일색이었다.
“이거 회사에서 평가 관리하는 거 아니야? 막 안 좋은 말은 다 지우고 그러는 거. 왜, 대기업들 그런 거 자주 하잖아.”
“거기 말고 인터넷 블로그도 좀 봐. 지금 휴대폰 구매 사이트는 완전히 뒤집어졌어. 너 빨리 사는 게 좋을 거야. 내일만 돼도 이거 물량 미어 터져서 못 살 수 있어.”
“안 되겠다. 나도 빨리 사야겠어.”
기적의 조짐은 2일차에 발생했다.
전날의 15배가 넘는 서비스 가입자가 몰려든 것이다. 개통 시스템에 마비가 오지 않을까 우려될 만큼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그날도, 그 다음 날도, 서비스 가입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백철중 회장이 미친 거 아닐까 하고 반쯤 단정 짓고 있던 SKK통신 고유철 사장은 뒤집어질 듯이 놀랐다.
“이게 말이 돼? 가용 주파수도 없는데, 어떻게 무선통신 서비스를 시작하고 있는 거야?”
“그, 그것이…….”
“설마 우리 말고 다른 통신사들과 이미 합의가 된 거야? 주파수를 할당해서 쓰기로?”
“그건 법규 위반입니다. H통신이 바보도 아닌데 그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말이 안 되잖아, 말이! 전파를 쓸 권리가 없는데 무선통신 사업을 어떻게 하냐고!”
고유철은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다른 2대 통신사도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사실 확인에 나섰다. 정부에서도 당황해서 조사에 나섰다.
H통신 신임 사장, 정상용은 떳떳하게 정부관계자의 질의에 응했다.
“저희 유레카 통신은 전파를 쓰지 않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래과학부 차관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정상용은 침착히, 하나하나 설명했다.
“유레카 통신망은 전파를 쓰지 않는 새로운 개념의 통신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기지국이 필요 없던 거죠.”
“전파를 쓰지 않는데 어떻게 무선 통신이 가능합니까?”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도 아니고, 참나…… 왜 이렇게 말귀가 어두워?’
정상용은 답답했다. 몇 번을 설명해줘도 이 차관이라는 사람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나도 처음에는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었으니까.’
짜증을 참아가며 한참 동안 차분히 설명하자 차관은 겨우 개념을 이해했다.
“혹시 양자 얽힘, 뭐 그런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것과는 전혀 다른 원리라 알고 있습니다.”
“지금 H통신은 전파의 무단 도용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정확한 개념을 설명해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기업 기밀입니다만. 만약 강제 공개를 원하시면 법원의 명령을 가져오시지요.”
정상용은 다소 강경하게 나갔고, 차관은 한 발자국 수그렸다.
“일단 장관님께 그렇게 보고하겠습니다.”
차관은 얌전히 돌아갔다.
정상용은 일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전파를 전혀 쓰지 않는, 어떤 장애나 간섭도 거부하는 신개념 무선 통신. 그 실체를 드러낸 이상 세상은 H통신을 향해 온갖 관심과 러브콜, 압박과 적대감을 던질 것이다.
온갖 시기와 질투, 관심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짜릿해진다.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회장님, 정상용입니다. 지금 막 정부 관계처 사람이 돌아갔습니다.”
「이제 3일차니까 슬슬 입질이 올 때 됐지. 어떻던가?」
“예상대로 매우 당황하고 있는 눈치입니다. 오후에는 3대 이통사와 미팅이 잡혀 있습니다.”
「실수 없이 잘하게.」
“예, 알겠습니다.”
백철중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물었다.
「한 대표, 그 친구는 어떻던가? 경영에 조금 관심을 보이고 있나?」
“크게 관심은 없는 눈치입니다. 회장님이 잘 알아서 하실 거라고 굳게 신뢰하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정상용은 일단 좋게 포장해서 전달했다.
백철중은 그 말이 선뜻 믿기지 않는지, 수화기 너머로 나지막한 신음을 냈다.
「지분과 로열티로만 만족한다는 건가. 참 욕심 없는 친구 같으니……. 알았네. 당분간 자네가 잘 맡아서 경영하게.」
“예, 회장님.”
정상용은 눈앞에 백철중이 있는 것처럼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원래 자신은 몇 년짜리 시한부 사장이 될 몸이었다. H통신은 송하나를 위한 선물이었으니, 그녀가 장성하고 성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사장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변했다.
그룹 총수 자리가 예정된 송하나가 H통신 사장 자리를 맡을 이유가 없었다.
유레카 통신,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오래 관리할 수 있는지는 이제부터 어떤 성과를 내느냐에 달렸다.
그의 눈빛에 굳은 의지가 어렸다.
“할 수 있다.”
============================ 작품 후기 ============================
“어떻게 전파를 쓰지 않고 통신이 가능한 거냐고요오!”
“우리는 신성한 칼라를 통해, 모든 비트와, 모든 헤르츠를 함께 나누기 때문이라고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