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82화 (182/609)

00182  그룹의 주인  =========================================================================

“이재민 주택 지원 사업으로 여론 지지가 높은 지금이 바로 최적의 기회야.”

백철중은 단숨에 일을 밀어붙였다. 진성전자 모바일 사업부의 생산라인을 넘겨받은 H통신은 곧장 칼라 칩 스마트폰 양산 장비를 가동했다.

주파수 경매가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본격적인 제품 생산이 시작되었다.

칼라 통신망은 이미 완성되어 있고, 기존 스마트폰에 유심 대신 칼라 칩을 끼워 넣기만 하는 작업이라, 양산 개발 진행은 어렵지 않았다.

주파수 경매가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H통신은 대대적인 마케팅에 들어갔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속도를 보게 될 것이다! 최대 100배의 스피드를 자랑하는 ‘유레카 통신!’」

「전국 어디서나 감도 높은 서비스 보장!」

통신 사업과는 인연이 없던 H그룹이 이동통신사업에 뛰어들자 소비자들은 귀가 솔깃했다.

“H통신이 이동통신 서비스를 한다고?”

“이미 정부 승인은 났고, 서비스만 시작하면 된다더라.”

“기지국 설치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그럼 한참 뒤에나 서비스할 수 있겠네.”

“근데 벌써 예약 판매 시작했다는데?”

소비자들은 술렁거렸다.

확인되지 않은 루머와 찌라시가 증권가를 강타했다. 통신관련주가 연일 오르락내리락하며, 한치 앞도 보일 수 없는 곡선을 보여주었다.

일반 국민들은 두 팔을 벌려 환영했다.

“어쨌든 대형 통신사 하나가 더 생기면 경쟁도 늘어나고, 가격과 품질 상태도 좀 나아지겠지. 솔직히 지금 통신요금은 너무 바가지 수준이다.”

“H통신이 작정하고 출혈 경쟁 해줬으면 좋겠다. 다른 이통사들 엿 좀 먹게.”

“뭐가 됐든 H그룹이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지지한다. 태풍 복구 작업에 5,500억을 선뜻 내놓는 게 아무 기업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암, H그룹처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해줘야지. 진성처럼 야박한 대기업은 안 돼.”

“재벌이 다 그렇지. H그룹 말고 재벌들은 다 안 돼.”

100억을 내놓고도 욕을 먹은 진성그룹은 아직도 동네북처럼 두들겨 맞고 있었다.

칼라 통신망 사업 추진자인 정상용은 정부 관계자로부터 우려를 들었다.

“아직 기지국 작업도 완료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주파수 경쟁에 뛰어들면 손해가 크지 않겠습니까?”

전국에 기지국을 설치하고, 통신망을 정비하는 데만 일 년은 훌쩍 걸릴지도 모른다. 하루빨리 서비스를 개시하지 못하면 시간만 허공으로 날리고, 그만큼 손해를 보게 된다.

정부 관계자는 그 점을 염려했다. 그러나 정상용은 아무렇지 않게 대응했다.

“그렇다고 경매시기를 일방적으로 우리 회사에만 유리하게 조율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방통위에서는 기존 주파수 사용권을 소정의 비용으로 1년 연장하고, 경매를 내년으로 늦추는 방안도 고려중입니다.”

“그렇다면 특혜란 말이 나올 텐데요.”

“H그룹은 이재민 지원 자선사업으로 이미지가 좋으니 문제없을 겁니다. 통 큰 기부로 정부에서 배려를 해준 거라 치면 되지요. 국민들도 오히려 좋아할 테고요.”

H그룹을 향한 국민들의 지지에 묻어가겠다는 건가. 정부의 얄팍한 수작이 훤히 보인 정상용은 쓴웃음만 지었다.

“괜찮습니다. 경매는 예정대로 진행하시지요. 이건 회장님의 뜻입니다.”

“……정 그렇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백철중 회장의 뜻이 그렇다면야, 더 말릴 수도 없었다. 오히려 배려가 쓸데없다며 화를 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주파수 경매가 열렸다.

3대 이통사들은 강력한 경쟁자의 새로운 등장에 저마다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셋이서 힘들게 구축해놓은 경쟁 구도가 자칫 붕괴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백철중을 찾아가 담판을 지을 수도 없었다. 세 이통사들도 10대 안에 드는 대기업이지만, 백철중하고는 클래스가 달랐다.

그는 이창용과 더불어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살아있는 양대 산맥이었으니까.

“이번 경매는 청와대에서 특별히 신경 쓰고 있습니다. 합리적인 경쟁에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

미래과학부에서 차관급 인사가 세 이통사를 찾아와 직접 귀띔을 했다. 말이 귀띔이지, 반 협박이었다.

H통신을 따돌리기 위해 담합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 담합을 했다가는 가만 두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였다.

그렇게 경매가 열렸다.

주파수 경매에 별 관심 없는 이들도 이번 경매 결과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누가 승자가 됐든 간에 낙찰가가 엄청 뛸 거다. H그룹이 이통사업에 대한 의지가 장난 아닌 거 같던데.”

“기존 3대 이통사도 기득권 지켜내려면 주파수 사용권 절대 사수해야지.”

“셋이서 담합이라도 하면 H그룹은 난감하겠는데. 서로 짜고 미리 주파수 할당한 다음 거기에 올인해버리면…….”

“설마, 백철중 회장이 어떤 사람인데 감히 그런 티 나는 짓을 할 수 있겠어? 무려 재계 1위 기업이다. 소비자들을 상대로 통수는 쳐도 백철중 통수는 못 쳐.”

그렇게 역대급 관심을 받은 주파수 경매는 성황리에 끝났다.

낙찰가가 사상 초유를 기록할 것이라는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각 주파수마다 하나같이 10년 사용 기간에 1조 원을 넘어서는 높은 가격에 낙찰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H통신이…… 떨어졌어?”

“사용권을 하나도 못 따낸 거야?”

“말도 안 돼.”

H통신은 1.8㎓ 등 인기 높은 주파수 경매에 모두 입찰했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다. 단 하나라도 건진 게 없었다.

값비싼 가격을 치르고 주파수를 구매한 3대 이통사들이 오히려 크게 당황했다.

대체 얼마를 써냈기에?

“3위보다 900억 정도 낮은 금액을 써서 냈습니다. 그래도 기존 예상 낙찰가보다는 높은 금액입니다. 지금 낙찰가는 우리 그룹이 가세함으로써 껑충 뛴 가격이니까요.”

“남들이 보기에 이상하진 않겠군요.”

“그렇습니다.”

정상용의 보고에 한서진은 알겠다는 듯이 끄덕였다. 문득 작은 의문점이 생겼다.

“그런데 왜 제게 직접 보고하시죠?”

“회장님께서 앞으로 한 대표님에게도 직접 보고하라 하셨습니다. 만약 지시가 있다면 그것도 따르라 하셨고요.”

“제가 뭘 알아야 지시를 하지요.”

“그냥 편하게 의중을 알려주시면 됩니다. 그럼 저희 프로젝트 추진팀에서 한 대표님의 의사를 사업에 반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뛸 것입니다.”

한서진은 이내 백철중의 뜻을 이해했다.

“회장님은 제가 경영에 적극 참여하길 바라시는 거군요.”

“…….”

정상용이 바로 대답을 못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제대로 짚은 모양이다.

“그럼 직접 말씀하시지 왜 굳이……. 원래 저는 칼라 칩 생산만 맡기고 손을 떼려 했습니다만.”

한때는 H통신 경영에도 참여해볼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서진은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경영은 자신의 체질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칼라 칩 기술 제공자로만 남기로 했던 것이다. 어차피 51%를 가진 대주주 아닌가.

“내키지 않으신다면 그냥 지켜보기만 하시면 됩니다. 다만 회사의 경영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언제든 저를 통해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사소한 걸 일일이 회장님께 말씀드리기도 번거로우실 것 아닙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정상용이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한서진은 자리에 앉았다가 문득 ‘대표 한서진’이란 명패에 눈이 닿았다.

펜트하우스 사무실에 직원 수십 명을 거느린, 자산 500억 불의 청년 기업가. 남들이 보기에 이만하면 전생에 행성을 구했다 여겨질 만큼 큰 성공을 거둔 것이리라.

‘혹시 모르지. 전생에 왕이었을지도.’

꿈속 세상을 떠올리며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거대한 황금의 성에서 오롯이 세상을 지배하는 군주. 그 남자의 위엄 넘치는 눈빛과 부딪치던 순간이 떠오르자, 온몸에 가벼운 소름이 돋는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분명한 실체.

아마도 그 세상은 통찰안 능력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교수님들은 미스릴과 USL이 외계 문명의 잔재일 수도 있다고 하셨지.’

미스릴은 하드웨어이고, USL은 그 하드웨어를 움직이는 프로그램 언어일 수도 있다며, 박효산은 농담처럼 가설을 말하곤 했다.

하지만 한서진은 그게 농담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에테르 언어를 회로에 새겨 에테르의 힘을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USL과 에테르 언어의 상관관계를 확실히 알면 더 좋은데.’

둘 모두 언어인 것은 분명하다.

굳이 느낌을 말하자면, USL은 인간이 쓰는 언어이고 에테르 언어는 기계가 쓰는 언어에 가깝다고 할까.

창가에 서서 도심을 내려다봤다.

빼곡하게 들어찬 수많은 빌딩과 거리. 그리고 바쁘게 오가는 차량들과 인파.

한때는 저 풍경을 이 두 손으로 움켜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처럼 승승장구한다면, 불가능한 꿈은 아니리라.

자신의 한 마디에 이 거대한 도시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했었다.

마약처럼 짜릿했던 상상.

그러나 꿈속의 그 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 나라일까? 외계? 아니면 외우주? 정말 다른 차원의 문명일까?’

만약 미스릴이 그들이 남긴 문명의 잔재라면, 그들은 미스릴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까?

‘그 왕은…… 통찰안이 뭔지 알고 있을까?’

불현듯 오싹한 상상이 들었다.

혹시 통찰안의 능력은 그 왕이 시공을 넘어 자신에게 준 선물이 아닐까, 하는.

‘나한테 적의는 없었어. 아니, 그건 분명히 호의였다.’

마법의 대륙처럼 그저 아름답기만 한, 비옥하고 넓은 대지.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사람과 거리, 그리고 거대한 황금의 성.

그 신비한 풍경을 떠올리자 가슴이 조금 답답해졌다.

갑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500억 달러, 5nm공정 기술의 특허권자라는 명성, SJ인더스트리의 주인이라는 지위…….

그 모든 것들이 꿈속의 왕에 비하면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한서진은 퍼뜩 시간을 확인하고 급히 퇴근 준비를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송하나 과외를 해주러 간다.

“모의고사는 잘 봤니? 매달 시험 치르지?”

“보긴 봤는데……. 점수 안 알려드릴래요. 부끄러워요.”

“그렇게 못 봤어?”

“너무 걱정 마세요. 그래도 선생님이 아직 희망은 있다고 하셨어요.”

한 시간 반 정도 과외를 마치고, 둘은 이런저런 가벼운 잡담을 나누었다.

송하나는 수험 준비에 관한 고충을 털어놓으면서도, 장밋빛 대학 캠퍼스 생활에 대한 낭만을 드러냈다.

“전요, 대학에 가면 공부만 하지 않을 거예요. 동아리 활동이나 행사, 축제 같은 걸 특히 많이 할 거예요.”

“좋은 생각이야. 그런 건 어릴 때 할수록 더 재밌고, 보람도 크거든. 그래도 공부는 조금 신경 쓰고. 아, 어차피 학점은 의미가 없으려나.”

이제 19살이지만, H그룹의 차기 회장이 내정된 인물이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아, 엄마 오실 때 됐어요. 이만 나가요, 오빠.”

“그래.”

송하나는 과외 할 때만큼은 모친과 마주치지 못하게 한다. 한서진은 처음에는 왜 그러나 싶었는데, 그냥 외간 남자와 단둘이 방에 있는 모습을 엄마에게 보여주기 싫어서라고 이해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이 아닌가.

“안녕히 가세요.”

“응. 내일 또 보자.”

한서진이 나가고, 10분도 지나지 않아 송지현이 집에 들어섰다. 다행히 둘이 마주치는 것은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엄마, 오늘 왜 이리 빨리 왔어?”

“평소처럼 온 건데 뭐가 빨리 와. 너는 뭐 했어? 집에서 또 그냥 공부만 한 건 아니지?”

“그냥 여름 여행 계획 좀 짰어.”

“잘했다. 여행이라도 좀 가고 그래라. 수시도 붙었는데 이때 아니면 언제 놀겠니.”

“……잘 놀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

============================ 작품 후기 ============================

수시 합격하고도 공부만 하는... 놀 줄 모르는 딸...

아이고.

어머니도 참,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하시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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