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1 그룹의 주인 =========================================================================
이창용 회장은 기적적으로 의식을 차렸다. 아니, 이제는 전 회장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룹 홍보실은 이창용 회장의 상태에 관해서 보도 자료를 배포했고, 언론들은 신이 나서 ‘이창용 회장, 깨어나다!’라는 식의 보도기사를 냈다.
이창용이 쓰러졌을 때는 진성그룹 관련주가 떨어졌지만, 이서나가 그룹 회장이 된 이후로는 오히려 안정세에 접어들었다. 변수가 제거되었다는 시장의 판단 덕분이다.
그러나 이창용이 깨어나자 주가는 오르락내리락, 혼란의 길에 접어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정신을 차림으로써 권력 구도에 다시 불안정한 변수가 생긴 것이다.
“이창용 회장은 원래 이용무 부회장에게 그룹을 물려주려 했잖아. 근데 의식불명인 틈을 타서 장녀가 회장 자리를 뺏어버렸으니, 기분 참 그지 같겠네.”
“그나저나 이창용 회장이 이서나의 권력을 인정할까? 이미 쌀 익어서 밥이 됐는데.”
이서나는 그룹을 지배할 수 있는 지분이 그리 많지 않다.
자기 힘이 아닌, 순전히 주변의 도움에 힘입어 간신히 회장의 자리에 오른 케이스다.
정신을 차린 이창용이 과연 그녀의 왕좌를 용인할까?
재계는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도 진성그룹의 권력 구도는 흥미로운 관심거리였다.
“모든 게 이창용 회장 건강상태에 달렸네.”
의식을 차렸다고 다가 아니다.
과연 이창용이 지금의 그룹을 장악할 만한 상태인지 아닌지, 세간의 눈이 그쪽으로 쏠렸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복도에 울린다.
네 명의 수행인원을 거느린 이서나는 차분히 병원 복도를 걷고 있었다. 이미 의료진을 통해 아버지의 상태를 알아봤다.
‘이제 그만 경영에는 손을 떼셔야 한다고 했지.’
백철중 회장과 달리, 부친은 정신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심장이 너무 약해져서 경영을 포함한 일체의 격무를 멀리 해야 한다고 했다.
그룹 장악처럼 큰 심력 소모가 필요한 일도 지금의 부친에게는 힘들 것이다. 또다시 쓰러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룹 경영에서는 이만 손을 떼야 옳다.
건강에 집착하는 부친의 성정을 고려하면, 자신의 그룹 찬탈 행위는 추인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버지가 어쩌겠어. 이미 다 끝났는데.’
그녀는 자신만만했다.
그렇게 무섭던 부친이지만, 죽었다 살아난 지금 기력이 예전만은 못할 것이다.
병실 입구에는 두 명의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서나는 아무렇지 않게 태연히 들어섰다.
환자복을 입은 부친이 상체를 일으킨 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초췌한 안색이지만 눈빛은 지극히 맑다.
그리고 옆에는 이용무가 와 있었다. 이서나는 아무렇지 않게 부친에게 인사했다.
“깨어나셨군요, 아버지. 정말 걱정했어요.”
“앉거라.”
“예. 용무가 저보다 먼저 왔네요.”
그녀는 슬쩍 동생을 언급하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표정을 감춘 동생은 아무 말이 없다.
부친의 침묵은 제법 길었다. 그러나 이서나는 답답해하지 않고 기다렸다. 약한 모습을 보일수록 부친은 더욱 못마땅하게 여길 뿐이다.
“네가 새로 그룹 회장이 되었다고 들었다.”
“죄송해요. 그룹이 흔들리는 와중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누군가는 그룹의 중심을 잡아줄 필요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복귀하신다면 전 군말 없이 물러나겠습니다.”
이서나는 오히려 역으로 치고 들어갔다. 겉으로는 공손한 태도지만, 반쯤은 위협도 담긴 말이었다.
대외적으로 이서나는 그룹의 위기를 무사히 수습했다. 이창용이라 해도 깨어나자마자 그녀를 경질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이창용은 이서나의 역공에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덤덤한 낯빛을 유지했다.
“중심을 잡아야 했다라…… 그게 반드시 너여야만 했느냐?”
“하필 용무가 그때 로열티 조정 문제로 공격을 받고 있었어요. 찍어낼 때마다 2달러씩 오히려 손해를 보는 구조였으니까요. 제 협상으로 2달러씩 이익을 보게 만들지 않았으면, 주주들의 분노를 달래기 어려웠을 거예요.”
야무진 설명, 하지만 이창용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그 안에 담긴 희미한 못마땅함만큼은, 이서나도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비즈니스에서 대가 없는 양보는 없다. 너도 알지 않느냐?”
“모바일 사업부를 원하더군요. 통신사업에 진출할 생각 같던데, 그 사업부를 주고 파운더리 조정을 하는 게 훨씬 낫다고 판단했어요. 그냥 준 것도 아니고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매각한 거니까요.”
“…….”
이창용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서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모바일 사업부는 미끼일 뿐이다.
ADSC는 4달러의 양보를 해준 만큼, 훗날 그 이상으로 다시 받아갈 것이다. 이 사실이 지금 알려지면 자신의 입지는 흔들리게 된다.
과연 부친이 속아 넘어갈 것인가. 이서나는 지금처럼 긴장된 적이 없었다.
“……잘했다. 네가 그룹을 살렸구나.”
나지막하지만 분명한 칭찬이었다. 이서나의 얼굴에 비로소 기쁜 낯빛이 떠올랐다.
“너무 좋아하지는 말거라.”
“네?”
“지금까지 너의 자격은 검증하지 않았다. 좀 더 지켜보겠다는 의미이니, 더 나은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서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자신이 원했던 완전한 추인은 아니지만, 이 정도도 예상했던 바였다. 오히려 당장 회장직을 내놓으라고 압박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흘끗 이용무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튄다.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 하지만 왕관을 위해서 서로 찔러야 할 사이.
단지 여자란 이유만으로 승계 경쟁에서 박탈당했다.
그러나 천운이 닿은 덕에 이렇게 왕관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어떻게 좁힌 거리인데, 순순히 물러날까보냐.
“꼭 지켜봐주세요, 아버지.”
이서나가 돌아갔다.
부친이 누나를 조금 인정하는 듯한 태도에 이용무는 살짝 배신감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서나가 한 말이 사실이냐?”
대뜸 부친이 질문을 던졌다. 이용무는 바짝 정신을 차렸다.
지금 부친은 정보를 얻기 위해 물어본 게 아니었다. 자신을 시험하고, 또 정보를 대차대조하기 위함이다.
부친이 알고 있는 것과,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일치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누나가 한서진 대표를 통해 ADSC와 협상을 해서 특허 로열티를 4달러만큼 하향 조정한 건 사실입니다. 한 대표는 H그룹과 통신사업을 기획하고 있는 중이라 진성전자의 모바일사업부를 매수하기로 했고요.”
겉으로 보기에는 이상할 게 없는, 정상적인 거래다.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이가 아닌, 산중턱에서 정상을 올려다보는 이들 시야에서는 말이다.
저 거래에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들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위화감이 존재한다.
이서나 역시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쪽이 그런 위화감을 느끼고 있음을.
“여기에는 ADSC가 챙겨야 할 몫이 빠져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향후 로열티 재조정을 하든 뭘 하든 다시 그만큼의 이익을 가져갈 거라 생각합니다.”
“네 말이 맞다. 그 놈들이 순순히 양보를 해줄 놈이 아니지. 아무리 특허권자의 중재가 있었다 해도 말이다.”
한서진이 이서나 대신 그 손실을 메워줘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고 말이다.
“살점과 뼈, 그 중 무엇을 내주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그게 현물인지 선물인지도 파악해야 하고. 알겠느냐?”
“예.”
“못난 놈. 겨우 내가 잠깐 쓰러졌다고 네 누이 하나 막아내지 못하고 이 꼴이 돼?”
부친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이용무는 죄송스러워서 고개를 숙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을 놓았다.
자신을 타박하는 부친의 태도에서 오히려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부친이 심중에 둔 후계자는 여전히 자신이라는 것을.
“능력만 따지면 차라리 서나가 너보다 낫다.”
“…….”
이용무는 입술을 잘게 씹었다.
자신도 평소 어느 정도 인정하던 사실, 경영상의 수완이나 능력은 누나가 훨씬 뛰어나다. 심지어 과감성이나 비정공법적인 면에서도.
“만약 서나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지금 너희 둘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
또 한 번 들어온 날카로운 일침.
부친은 그런 말을 직접 담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룹의 차기 왕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나 지금은 뼈아프게 찔러대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서나가 아닌 너를 선택했는지 아느냐?”
이용무는 이를 악물었다. 이 질문에서마저 부친을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세상은 남자가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맞다. 단지 그것 때문이다.”
당장 한국 정재계만 봐도 그렇다. 정치인들의 상당수는 남자고, 20대 재벌 총수 중에 여자는 단 한 명도 없다.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그런 생태계에서, 여자라는 사실은 결정적인 순간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진성그룹이 재계의 맏이로서 단단히 서 있기 위해서는, 딸인 이서나보다는 아들인 이용무가 필요했다. 그것이 이창용이 평생 지켜온 지론이었다.
“잊지 마라. 너를 선택한 것은, 단지 네가 내 장남으로 태어났다는 것 때문이다.”
예전에는 자랑스럽게 여겼던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떤 비수보다 싸늘한 질책으로 들렸다.
너는 이서나보다 못하다는.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한서진이 농담처럼 한 말에 백철중은 껄껄 웃었다.
“엘릭서를 못 팔게 된 게?”
“전부는 몰라도, 절반은 가져올 수도 있었잖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아깝네요.”
“이래서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하는 거지.”
빈말이 아니라 정말 그런 마음이었다.
엘릭서의 객관적 가치는 세상을 뒤흔들 만큼 뛰어나다. 하지만 한서진한테는 별 것 아닌 물질이다.
비밀만 지킬 수 있다면, 엘릭서 한 병을 주고 진성그룹의 절반을 얻는 것도 짭짤한 거래가 될 수 있었다.
이창용이 정신을 차린 이상 이제는 물 건너갔지만.
“너무 마음에 담지 말게. 어차피 줄 생각도 없었잖나.”
“버스 보내고 나니 막상 아쉽긴 하네요.”
“사람 심리가 원래 그런 걸세. 그런 것에 미련을 두면 정작 내가 기다리던 버스를 놓치게 되네.”
백철중은 시원스럽게 말을 맺고, 서류를 펼쳐 들었다.
「주파수 입찰 공고」라는 큰 제목을 확인한 한서진의 얼굴도 진지해졌다.
“정부는 우리가 이번 주파수 경매에 입찰하는 줄 알고 있네.”
“아, 그럼……?”
“기간통신사업 승인이 났어. 이제는 정부도 변덕으로 물릴 수 없게 됐네.”
백철중이 쓰러지기 전부터 준비해왔던, 칼라 통신 사업이 빛을 드디어 볼 때가 된 것이다.
칼라로 가득 뒤덮인 통신망을 상상하자 한서진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선통신의 대혁명을 자신의 손에서 일구는 것 아닌가.
“일단 다운그레이드 서비스부터 시작하지. 1/400 정도의 성능만 해도 기존 통신망의 100배 가까운 성능이야. 지나친 오버스펙으로 미래 경쟁력을 깎아먹을 필요는 없네.”
“알겠습니다. 그 정도 조치는 생산 단계부터 제한을 걸면 해결될 것 같습니다.”
“이미 큰 준비는 다 끝냈으니, 모바일 사업부를 인수받는 즉시 생산에 들어가지. 주파수 경매가 열리는 대로 마케팅을 시작할 생각일세.”
“그런데 주파수 경매는 왜 참석합니까?”
칼라 칩은 전파를 쓰지 않는다. 당연히 정부로부터 주파수 대역 사용권을 낙찰 받을 필요도 없다.
“만에 하나의 변수를 대비하기 위함일세. 칼라가 전파를 쓰지 않는 게 너무 일찍 알려져 버리면, 자칫 타 이통사들의 로비로 정책이 바뀔 수도 있으니. 물론 가능성은 낮지만.”
“그러다가 자칫 낙찰돼버리면 돈만 날리는 거 아닌가요?”
백철중은 대수롭지 않은 듯 껄껄 웃었다.
“걱정 말게. 가장 인기 좋은 주파수 경매에 참석해서, 탈락이 확실한 입찰가를 써낼 테니까.”
============================ 작품 후기 ============================
“실수로 0하나 붙이시면 큰일날 듯요. 조심하세요, 회장님.”
“걱정 말게. 내가 ₩ 대신 $을 잘못 쓴 적은 있어도, 0하나를 실수로 붙인 적은 없어.”
“그게 더 수습불가잖아요!”
연재 주기에 관해서 중요한 공지입니다.
앞으로는 자정 10분 경을 기해서(전후로 수 분의 오차가 있을 수 있음) 연재를 합니다.
그 외 시간에는 업데이트를 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즉 업데이트는 0시 10분 경에 하루 딱 한 번만 합니다.
타 연재처와 연재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서 그러니 양해해주세욥
1편만 올릴 수도 있고, 2편을 동시에 올릴 수도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2편을 지향한다고 하고 싶지만 그건 확답은 안 드리려구요.ㅋㅋㅋ
일단 1편은 제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거의 올라온다 보시면 되구요
만약 2편이 올라오면 제가 좀 널널했구나 생각하시면 돼요.
저야 마음 같아서는 2편, 3편도 쓰고 싶죠. 빚이 얼만데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