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0 그룹의 주인 =========================================================================
저 사람은 지고한 존재다.
보는 것만으로도 강한 예감이 온몸을 뒤덮는다.
단순히 한 나라를 지배하는 왕이나 군주 같은 게 아니다. 그런 시시한 존재가 아니다.
모든 것을 관할하는, 지고지순한 존재.
저 남자는 바로 그런 존재다.
왕이 일어섰다. 이쪽을 향해 똑바로 다가온다.
‘시야’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마치 뒷걸음질 치고 싶은 한서진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왕은 다시 성큼 다가왔다. 입을 열어 뭐라고 말을 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시야’는 마치 얼어붙은 듯이 그 자리에 정지했다. 더 이상 물러서지 않는다.
혹시 왕이 방금 말한 명령은, 멈추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왕이 천천히 다가왔다. 걸음 하나하나에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이 실려 있다.
왕의 시선이 가까워질수록, 한서진은 심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느덧 손안이 축축해졌다.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간다.
‘시야’ 앞에서 왕이 완전히 멈췄다. 마치 창문 밖에서 안쪽을 들여다보듯, 푸른 눈동자가 똑바로 응시한다.
왕이 입을 열어 뭐라고 말했다. 한서진은 불현듯 아까 왜 왕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 깨달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보는 것은 허락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는 허둥지둥 스피커를 확인했다. 전원도 켜져 있고, 볼륨도 정상이다.
왕이 여전히 뭐라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한서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왕이 있는 세상을 보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곳의 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럼 저쪽도?’
그런 궁금증이 생겼다. 왕도 자신과 마찬가지일까? 자신처럼 지금 이쪽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을까?
왕이 계속 뭐라고 말을 했다. 입술이 발음하는 모양이 낯설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언어는 아니었다.
한서진은 멍하니 왕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익숙한 입술 모양으로 왕이 뭔가 말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반복해서.
한서진은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자세히 확인했다.
왕이 몇 번이고, 천천히 반복하는 그 단어는…….
‘한서진.’
자신의 이름이었다.
“보고 있군.”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주시하며, 왕은 차분히 말했다. 누가 보면 왕이 왜 그러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그러나 왕은 느낄 수 있었다. 바로 눈앞에 존재하는 또렷한 이질감, 그 에너지를. 그 균열 너머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존재를.
“또 다른 나 자신이여. 지금 짐이 보이는가?”
왕은 천천히, 또박또박 물었다.
이곳 현실과 저쪽 꿈을 이은 균열. 그 통로의 존재는 또렷이 느껴지지만, 저쪽이 어떤 모습인지 보이지는 않는다. 꿈속의 자신이 지금 이곳을 보고 있는 게 확실한데,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띠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꿈속으로 다시 돌아가면 알 수 있을까?’
왕은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그는 한 걸음 내딛었다. ‘시선’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는 게 느껴진다.
“도망치지 마라. 그대를 해하려는 게 아니다.”
왕은 부드럽게 뜻을 전했다.
“그대는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지가 통했을까. ‘시선’이 그 자리에 멈췄다. 왕은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여전히 통로 너머 모습이 어떤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쪽을 들여다보는, 또 다른 자신을 느낄 수 있었을 뿐.
왕은 또 다른 자신을 엄숙히 불렀다.
“한서진, 또 다른 짐이여.”
예전에 미처 끝맺지 못한 말, 왕은 깊은 당부를 건네듯 차분히 입을 열었다.
“깨닫거라. 그곳의 모든 것은 꿈이며, 거짓이라는 것을.”
꿈과 현실을 이은 균열, 그 통로가 서서히 좁아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왕은 초조하지 않았다. 이것은 일시적인 연결이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로는 다시 열릴 것이다. 그 간격은 점점 짧아질 것이고, 마침내 꿈속의 자신이 무엇이 현실인지를 깨닫게 되리라.
“존재하는 모든 것의 군주가 그대임을, 하루빨리 인식하기를 바라노라.”
거짓된 세상에 갇힌 자신에게, 이 진심이 닿기를 바라며.
「치직…….」
화면이 꺼지며, 다시금 모니터에는 시끄러운 노이즈가 나타났다. 화면 가득 번져 나가는 화이트 아웃을 멍하니 바라보던 한서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뭐야…… 대체.”
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딱 하나만큼은 알아들었다.
‘한서진…… 분명히 한서진이라고 했어.’
왕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이쪽을 볼 수 있는지, 아니면 인식만 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확실했다. 왕은 자신의 존재를 오롯이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나에게 적개심은 없었다.’
설명할 순 없지만, 왕은 분명히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다. 한서진은 그걸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절대 단순한 꿈이 아니야.’
마치 텔레파시처럼, 먼 우주 바깥이나 혹은 다른 차원에서 온 메시지가 아닐까?
간접적으로 접한 왕의 존재감은 숨이 얼어붙을 만큼 거대한 것이었다. 그런 존재가 절대로 꿈속의 허구일 리가 없다. 분명히 세상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고, 나라이다.
통찰안의 비밀도, 미스릴의 진실도, 그 존재라면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보고 싶다. 확인하고 싶어.’
한서진은 주먹을 불끈 쥐며 타르타로스를 노려보듯이 주시했다. 그는 다시 키보드 위로 손을 올렸다.
「태풍 경로 예측으로 선물 시장에서 큰 재미를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크렘 회장의 목소리는 유쾌했다. 한편으로는 좋은 정보를 알려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도 섞여 있었다.
그걸 모를 리가 없지만, 정지원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시치미를 뗐다.
“운이 조금 좋았습니다.”
「운이 조금 좋았다고 열흘 만에 4억 달러를 벌어들일 순 없지요. 대단합니다.」
크렘 회장이 620억 달러의 자산가라 하지만, 열흘 만에 4억 달러의 수익은 그의 기준으로도 엄청난 수준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태풍 재해 복구 사업에 기부해버렸다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그런 완벽한 예측이 가능했던 겁니까?」
크렘 회장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정지원은 가만히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미 다 알면서 떠보고 있는 것이다. 자연히 정지원의 표정도 신중해졌다.
“완벽한 예측은 아닙니다. 실제로 막판에는 계산이 틀려서 하마터면 큰 손실을 낼 뻔 했습니다.”
「이미 제 친구들 사이에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한 대표가 정말 뛰어난 기상 예측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정확히는 분석 프로그램은 기존의 것을 갖다 썼다. 타르타로스가 지닌 에테르 분석 기능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크렘이나 정지원이 그것까지 알 리가 없었다.
한서진은 일본 기상청도 종잡지 못했던 태풍 메기의 이동 경로와 위력을 정확히 예측했다. 그것도 열흘 전에 이미.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면 국제적인 대부호들이 군침을 흘리며 달려들 것이다.
완벽한 날씨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은 재해 예측이 가능하다는 소리이고, 이로 인해 국제 선물, 옵션 시장에서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다.
만약 연간 기후를 예측할 수 있다면 또 달라진다.
식량 생산 추이를 가늠할 수 있고, 여름 냉방비와 겨울 난방비 수요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날씨와 기후를 내다보는 것만으로, 앉은 자리에서 돈을 쓸어 담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개발한 건 아니고, 커스터마이징한 Z7을 이용해 분석을 한 거라 합니다. 하드웨어 성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기존 프로그램으로도 더 놀라운 정확도를 보인 거지요.”
「그렇습니까. 우리도 서둘러 Z7을 구매해야겠군요.」
“저희 제품을 구매해주신다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저희 제품이기도 하지요. 저 역시 SJ인더스트리의 주주 아닙니까. 아무튼 알겠습니다.」
크렘 회장은 유쾌하게 전화를 끊었다.
폰을 내려놓는 정지원의 안색은 다소 경직돼 있었다.
‘이상한 욕심을 부리는 자들이 없어야 할 텐데.’
현재 미국의 대부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서진을 주시하고 있다. 그가 에스코너의 소유주고,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의 아버지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조차 한서진의 활약을 관심 있게 주목한다.
5nm공정 기술 매매로 단숨에 500억 달러의 재력가가 된 것, 그리고 이번에 태풍 메기의 진로와 위력을 정확하게 예측한 것 덕분이다.
정지원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거, 워싱턴에 좀 더 로비를 해야겠는데.”
아무래도 실탄을 좀 풀어야겠다.
자본의 노예들이 고용주의 평온을 귀찮게 하지 않도록.
“지금보다 더 좋을 수가 없네.”
며칠 만에 만난 백철중은 몹시 즐거워했다.
“지금 국내에서 우리 H그룹의 이미지는 단연컨대 최고야.”
국민들에게 재벌은 애증의 대상이다. 그들의 화려한 삶을 동경하면서도 끊이지 않는 불법 스캔들에 도끼눈을 뜨고 바라본다. 진성전자나 H그룹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태풍 피해 지원 사업으로 H그룹을 보는 시선이 크게 반전했다.
무려 5,500억 원을 들여 이재민들에게 새 집을 지어주겠다니.
물론 H그룹이 부담하는 돈은 그 중 500억 원일 뿐이지만, 그렇게 세세한 걸 따지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다수 사람들은 ‘H그룹과 SJ인더스트리가 이재민 지원 성금으로 5,500억 원을 내놓았다.’라는 문장에 주목할 뿐이다.
SJ인더스트리와 H그룹의 이미지는 비약적으로 좋아졌다. 특히 이재민이 대량으로 발생한 남부 지방에서 백철중은 거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아직 매출은 부족하지만 이름값으로는 이미 진성을 넘어섰어. 국민들은 우리 H그룹을 재계 1위로 여기고 있네.”
H그룹이 5,500억을 내놓을 동안 진성그룹은 달랑 100억만 내놓았다, 뭐 이런 시선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진성그룹으로서는 무척 억울할 것이다. 돈을 내고도 조롱거리가 되다니.
“이창용이가 어서 깨어나서 이 꼴을 봐야 하는데 말이야. 하하하!”
백철중은 크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말을 보면 저대로 죽기를 바랄 정도로 미운 사이는 아닌가 보다. 하긴 죽이고 살리고 할 정도의 원한은 아닐 테니.
한서진은 농담처럼 말했다.
“그럼 그분한테 엘릭서라도 줄까요?”
“그럴 필요가 있겠나. 이창용이가 안 된 건 사실이지만, 자네가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세상을 발칵 뒤집히게 할 보물 아닌가?”
“진성그룹 전부를 준다면 그 정도 리스크는 감수할 가치가 있겠죠.”
“그건 나도 그럴 수 있다고 보네. 하지만.”
백철중은 차갑게 웃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걸세. 용무와 서나는 그룹을 통째로 내놓을 바에는 차라리 이창용이가 저대로 죽게 놔둘 거야. 아니, 이창용이 본인이 원한다면 모를까.”
돈의 비정함이란 것인가.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엘릭서라도 줄까, 라고 했던 것은 진심이 아니었다. 백철중 회장의 생각이 어떠한지 의중을 엿본 것뿐이다.
그때 백철중의 스마트폰이 가볍게 진동했다.
수신 문자를 확인한 그의 안색이 확 변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처럼 보였다.
“회장님? 왜 그러십니까?”
“이창용이가…… 의식을 차렸다는군.”
============================ 작품 후기 ============================
“그대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군주임을, 하루빨리 깨닫기를 바라노라.”
“뭐어라고? 안 들리는데에?”